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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색깔있는 문화이야기 ⑩

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 산물인가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 산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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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 산물인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시대와 국가에 따라 여러 형태로 변주되어 왔다. ‘오셀로’와 한국춤의 만남을 시도한 무용극.

‘폭풍우’보다 먼저, 1603~04년에 쓰여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는 흑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흑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당시, 흑인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까닭에 인종의 제약을 넘어 보편적 인간성 표현에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왔다. 흔히 오셀로를 무어인이라 하나 이는 곧 흑인을 뜻한다. 이글턴은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에서 오셀로의 질투심을 관념주의 철학자들의 편집광적 성격의 표출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으나, 솔직히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피부가 검은 인간을 설명하고자 하는 유럽적 언설은 고대 그리스 이래 방대하게 축적되어 왔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태양의 화차를 잘못 운전한 탓으로, 구약성서와 유대교에서는 노아가 한 자식에게 내린 저주로, 또는 자연 감염에 의한 유전 등으로 설명되었다. 어느 것이나 흑인은 백인과 다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15,6세기 아직 후진국이던 영국에서조차 백인 실업문제 해결을 위해(기묘하게도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흑인의 국외이송 명령이 빈번히 내려질 정도로, 당시 이미 흑인은 서양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었으나, 그들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남’이었다. 또한 영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한 16세기 이전부터 유럽에서 ‘흑’이란 언제나 불결·불순·음험·위험·악의·죽음·불길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오셀로’에서 주인공 오셀로는 이름보다 무어인으로 불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가 흑인임을 강조하는 부정적 이미지의 대사 또한 18군데나 등장한다. 두터운 입술, 검은 피부, 악마성, 호색, 변덕, 격정, 요술 사용 등을 강조한 것들이다. 물론 이는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것이 아닌, 당시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흑인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오셀로’의 제국주의적 요소는 이야기 자체에 있다. 주체적 판단을 못하고 타인의 감언이설에 속아 백인 아내를 죽이는 흑인 오셀로의 인간상은 바로 흑인 멸시의 형상화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를 오직 ‘제국주의의 원조’로만 부각시키려는 것은 내 의도가 아니다. 같은 시대 사람인 콜럼버스조차 오직 제국주의자였던 것만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면 그가 참으로 다양한 분야에 박식한 르네상스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그 점을 굳이 강조하지 않은 것은 그런 평가는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사실 신비의 인물이다. 그만큼 생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적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1564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우리의 초·중·고에 해당하는 그래머스쿨을 다녔으나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18세에 8세 연상인 여성과 결혼해 쌍둥이를 낳았다. 이후 1584년부터 12년간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20대 시절의 셰익스피어를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여하튼 30대로 들어서면서 그는 유명 시인이자 극작가로 런던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된다.

이후의 삶도 안개 속이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 셰익스피어를 필명 삼아 작품을 썼다는 학설이 제기될 정도다. 그 ‘다른 사람’으로 거론되는 이 중에는 당시 석학인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도 있다.

셰익스피어와 관련해 특히 내 관심을 끈 건 그가 법률가라는 주장이다. 18세기말에 그런 이야기가 처음 나와 1858년에는 ‘셰익스피어는 법률가다’라는 책까지 출판됐다. 이 논의는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역사적 공백기인 20대에 법률을 공부했거나 법률직에 취업했을 가능성이 주로 제기된다. 그러나 이는 오직 그래야만 법에 관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식의 전제에서 나온 것이라 문제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아버지는 일생 동안 몇 차례나 소송을 했고, 특히 20년에 걸쳐 처의 형제들과 토지를 둘러싼 소송을 벌였다. 셰익스피어 자신도 1596년에는 극장 경영권을 둘러싸고, 1604년에는 이웃과의 채권채무 관계, 1609년에는 투자와 관련하여 소송을 했다. 그가 벌인 소송은 이외에도 많았다. 어쩌면 그는 소송을 꽤나 좋아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또 소송을 통해 법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게 됐을 수도 있다. 사실 당시 극단에는 법률가가 많았다. 셰익스피어의 경우 자신의 연극을 법률학교에서 상연한 경우도 있음을 감안할 때, 그곳 사람들로부터 학습을 받거나, 법률가 청중을 상대로 작품을 써야 했던 사정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셰익스피어 당시 영국이 법을 매우 강조하는 사회였다는 점이다. 그 때 나온 희곡의 3분의 1이 법정 장면을 포함하고 있으며, 셰익스피어의 경우 그 비율은 3분의 2를 넘어선다. 셰익스피어가 근현대에서도 널리 읽히는이유 중에는 근현대 또한 법의 지배를 강조하는 시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국은 차치하고, 미국의 판결문에서 셰익스피어를 인용한 것만 800여 개에 이른다.

그 중 법학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작품은 ‘베니스의 상인’이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은 베니스 귀족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만일 기한 내에 갚지 않으면 1파운드의 살을 베어내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이로 인해 법정 공방이 벌어지자 안토니오의 친구 바사니오의 연인인 포샤는 판사로 가장해, 정확히 살 1파운드를 떼어내되 한 방울의 피도 흘려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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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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