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이제 지역할거 맹주정치는 끝났다”

최장수 민선 도백(道伯) 심대평 충남지사

  • 글: 황호택 hthwang@donga.com

    입력2002-12-31 1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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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지역할거 맹주정치는 끝났다”
    자민련은 지방자치단체 선거 때마다 충청권을 석권했으나 2002년 6·13 지방 선거에서는 충남에서만 겨우 체면을 세웠다. 이원종 충북지사가 한나라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아 자민련 후보를 꺾었고, 대전에서는 염홍철 한나라당 후보가 자민련 당적의 현직 시장을 눌렀다. 심대평 충남지사는 1,2기에는 자민련 간판 덕에 쉽게 선거를 치렀지만 이번에는 자민련의 입지가 약화하면서 거의 자력으로 선거를 치르다시피 했다.

    충청 출신의원들이 한나라당으로 뿔뿔이 떠난 자민련에는 뒤늦게 입당한 이인제·안동선 의원을 포함해 10명 남짓한 의원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심지사는 “자민련은 없어지는 정당이 돼서는 안 되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며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자민련을 떠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JP)에 대한 의리도 변함이 없었다.

    1995년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가 개막된 이래 전국 15개 시도 중에서 심대평 충남·이의근 경북·김혁규 경남지사가 내리 3선을 기록해 다음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됐다. 세 번 연임한 도지사들의 거취와 정치적 선택은 여러 모로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거물 국회의원이나 광역자치단체장 중에는 선거 전략용으로 ‘대통령 감 한번 키워보자’는 분위기를 띄워 ‘작은’ 선거에서 쉽게 이겨보려는 전략을 쓴다. 심지사도 지방선거 때 ‘충청이 한국을 바꾸겠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러나 정작 차기 대권 도전 의사에 대해 질문을 던지자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더니, ‘국무총리 한번 하고 싶지 않으냐’는 물음에는 “기회가 오면 하고 싶다”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심지사는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총리실에서만 12년 근무했다. 정일권·김종필·최규하 총리 밑에서 일했고, 청와대를 거치고 다시 총리실 행정조정실장으로 돌아와 노재봉·정원식 두 총리를 보좌했다.



    유서 깊은 충남 도지사관사에서 심지사를 만났다.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오면서 건축된 이 관사는 6·25 전쟁 발발과 함께 서울을 급히 빠져나온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가기 전 2박3일 동안 미국 대사와 함께 머물렀던 곳이다. 관사 뜰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그윽한 풍치를 돋우고 있었다.

    심지사 부인이 차려준 저녁상에 맛깔스런 토속 음식이 입맛을 돋우었으나 인터뷰 시간에 쫓겨 일찍 상을 물렸다. 이런 이야기를 써서 실례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심지사보다 일곱 살이나 젊은 부인(54)은 조선시대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의 모델 같다.

    ―2002년 11월11일 지방분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던데 대통령선거에 눈과 귀가 쏠려 중앙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지방분권 선언의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방자치가 실시된 지 10년이 넘었고 자치단체장을 선거로 뽑기 시작한 지 7년4개월 되었습니다. 3선 임기를 마무리하는 내가 다른 사람이 꺼리는 일을 맡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지방분권 선언을 했습니다. 선거 때 ‘충청이 한국을 바꾸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습니다. 선거가 끝난 뒤 그게 무슨 실체가 있는 것이냐, 아니면 선거용으로 한번 얘기하고 지나간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요. 자치의 틀을 충청도에서부터 바꾸어 한국을 바꾸는 첫걸음을 내디디려고 합니다.

    둘째로는 충청이 정당정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왜곡된 한국의 정치에 경종을 울릴 수도 있습니다. 당장 실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방향으로 나가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거 기간 내내 자민련을 지키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지금보다 발전된 모습의 자민련을 만들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자민련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정당구조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는 중앙정치만 있고 지방정치는 없습니다. 지방정치를 활성화해 중앙정치를 바꾸고 싶은 의욕이 있습니다.

    자치의 주역은 지역 주민입니다. 지금처럼 중앙당에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들을 일방적으로 공천하는 형태로는 중앙정치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원봉사 당원들의 손으로 선거 혁명을 이룩해 정당 구조를 바꿔보려고 합니다.”

    심지사가 JP와 처음 만난 것은 한일협정 반대데모가 한창이던 1965년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이던 심지사는 4·19 의거에 참여했고 6·3 한일협정 비준반대 데모에도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그 무렵 김종필씨가 서울대 사범대에 찾아와 한일협정 비준의 불가피성에 대해 연설을 하고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이때 김씨의 연설을 듣고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는 1966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1967년 총리실에서 사무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JP가 총리할 때(1972년) 그는 총리실 기획조정실 사무관이었다. 사무관에게는 총리에게 직접 보고할 기회가 여간해서 돌아오지 않았다.

    “경부선 복복선화에 대해서 평가교수단과 JP에게 보고하는 자리에 실국장과 함께 실무 책임자로 들어가 배석하게 됐습니다. 브리핑을 하는 교수에게 JP가 복복선의 경제성 등에 관해 구체적으로 질문했습니다. 교수와 실국장이 답변을 못해 쩔쩔 매는 있는데 JP가 나보고 답변해보라고 하더군요. JP는 실무 사무관에게 답변을 시킬 정도로 포용력이 있었습니다. 민선 지사 1기 때 자민련 공천을 받고 나서 JP에게 ‘총리할 때 사무관을 했습니다’ 하고 자수했더니 웃더군요.”

    이번 대선과 함께 30여 년 한국정치를 주무른 3김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 같다. YS는 대통령을 지냈고 DJ도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양김의 퇴장과 함께 JP의 정치적 수명이 다해가고 있지만 서산을 붉게 물들이는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어쨌거나 YS와 DJ는 대통령을 해봤는데 JP는 대통령을 못하고 퇴장하니까 자민련 사람들은 무척 서운할 것 같아요. 지역 반응은 어떻습니까.

    “JP는 내각책임제 신봉자로 권력이 집중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폈습니다. 충청도가 배출한 걸출한 정치인이 꿈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해 도민들이 서운해할 겁니다.”

    심지사는 “JP가 인구가 많은 다른 지역 출신이었으면 대통령이 됐을까요”라는 질문에는 빙그레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JP는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랐던 사람입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을 체육관에 모아놓고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지만 JP가 거부했습니다. JP의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맹주정치 시대는 끝났다

    헌정 사상 유일무이하게 국무총리를 두 번이나 했고 두 대통령의 킹 메이커를 했으며 9선 의원인 JP를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30년 넘게 끈 3김 시대의 주역 중 유일하게 대통령을 못했으니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체육관 선거에서 JP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JP가 거부했다는 설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는 물론 군부의 반대가 거셌다는 반론도 있다.

    “군부의 반대는 YS·DJ가 해금된 ‘서울의 봄’ 후에 나온 얘기입니다. 체육관 선거를 통해 승계할 수 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JP 단독으로 갈 수 있었지만 거절했습니다. 언젠가 정당하게 평가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평가는 달라질지도 몰라요. YS와 DJ는 본인과 혈육이 큰 지탄을 받고 오욕을 남겼습니다.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평가받을지도 미지수입니다. JP는 비록 대통령을 하지 못했지만 마지막 마무리만 잘할 수 있다면 명예로운 은퇴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충청인들은 JP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고질병 같은 지역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3김 같은 지역 맹주가 나와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지요. 그러나 현실 정치는 명분과 다르게 돌아가지 않습니까. 충청 지역에서 포스트 JP를 둘러싼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습니까.

    “지금 말한 대로 3김 같은 맹주 정치 시대는 지나가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지 지역의 리더는 필요합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리더가 지역에서 나오는 것은 순리입니다. 포스트 JP는 언론이 만든 말입니다. 포스트 JP와 관계없이 지역에서 구심적 역할을 하거나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형태의 리더가 출연할 거라고 봅니다.”

    “이제 지역할거 맹주정치는 끝났다”

    한국정치와 지방자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심대평 지사(왼쪽)와 황호택 논설위원

    그는 JP에 대해 타지역 사람들은 욕을 많이 하지만 언젠가는 재평가받을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나는 JP를 끝까지 잘 모시려고 합니다. 그 분은 흑백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중용의 도를 지켰습니다. 자민련에 대해 ‘대통령 후보도 못 내는 정당이 정당이냐’라고 비판하느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JP가 정당 민주화에 앞장섰으면 좋겠습니다. 미국 정당의 전국위원장은 대통령후보로 나서지 않고 대통령후보감을 찾고 돈을 거두는 자리입니다. JP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대선을 앞두고 충청권 공략에 공을 들인 한나라당에서 이원종 충북 지사와 자민련 의원들을 많이 빼갔는데요. 심지사에게도 각별한 권유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이 되는데….

    “비공식적인 제의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민련이 출범할 때 외부의 충격과 내부의 기대가 어우러져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JP의 팽(烹)과 ‘충청도 핫바지론’이 외부적인 충격이었고 충청권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없다는 내부적 기대가 있었습니다. JP라는 걸출한 정치인이 기치를 들고 나서자 충청인들이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것이 자민련의 태동이고 자민련 발전의 요인입니다.

    시대의 변화를 자민련이 주도하지 못한 잘못으로 충청권에서조차 외면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선거 때에도 자민련을 지키겠다고 공약했고 지금도 자민련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의리를 중시하는 충청도인의 정서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민련이 변화하면 다시 충청인들의 기대를 모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자민련 부총재를 겸직하고 있습니다. 충청인의 뿌리 의식, 애향심, 의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대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자민련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적지만 정당한 소수가 있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대단히 중요한 정치 변화로 생각합니다. 돈 들이지 않고 정치하는 풍토를 만들고 지방이 중심이 되어 대표를 뽑아 중앙당을 만들고, 그 대표들이 나라와 지역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자민련은 쉽게 죽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도지사가 될 때 자민련은 야당이었습니다. DJP공조 때는 공동 여당으로 도지사를 했고, 지금은 다시 야당 도지사를 하고 있습니다. 도지사에게는 당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민련을 지키겠습니다.”

    ―‘충청인이 한국을 바꾼다’는 선거구호는 여러 갈래의 해석을 낳을 수가 있어요. 임기 후에 대비해 어떤 그랜드 플랜을 짜고 있습니까.

    “엊그제 프랑스에 다녀온 지인이 포도주를 한 병 가지고 와서 나눠 마셨습니다. ‘보졸레 누보’라는 햇포도주였습니다. 프랑스에는 막걸리처럼 금방 담가서 먹는 포도주와 숙성 포도주, 두 종류가 있답니다. 새로 담근 포도주를 많이 먹었더니 머리가 아프더군요. 잘 익은 포도주가 좋아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나는 잘 익은 도지사라고 생각합니다. 선거 때 욕심을 내 한국을 바꾸겠다고 했는데 바꿀 수 없더라도 꾸준히 시도하겠습니다.

    충청도가 변화하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려고 합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충남에 농업 테크노파크를 만들었습니다. 4년 동안 충남도가 각 분야에서 앞서 나가 국가에 어떤 방향을 제시해보려고 합니다. 그런 꿈을 가지고 마무리를 잘하겠습니다.”

    ―도지사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현재의 꿈이라는 말이군요. 질문은 도지사를 마치고 뭘 할 계획이냐는 거였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후 문제는 그때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기회가 온다면….”

    미국에서는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을 하지 않고 주지사 경력만으로 출마해 바로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 많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물론 이전의 빌 클린턴, 로널드 레이건,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조순 전 서울시장, 이인제 전 경기지사 등이 대권에 도전했다 중도에 날개를 접었다.

    한국은 미국보다 작고 철저하게 중앙 중심으로 움직여 도지사들이 중앙에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여론의 주목을 받기 어렵다. 그렇다고 중앙 정치무대에 얼굴을 자주 내밀면 도정을 소홀히한다는 비난을 받기 쉽다.

    “한국에서 행정가 출신 도지사가 대통령에 도전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시대의 필요에 의해 선택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으로 집권했지만 이후에는 조국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위해 국민이 그를 선택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사회 혼란기에 사회 정의를 표방하며 대통령이 되었고, 노태우 대통령은 6·29선언 이후 민주화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통령으로 선택받았습니다. YS·DJ는 모두 민주화 운동을 통해 국정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대통령상이 조금씩 달라질 겁니다. 5년 뒤에는 우리나라도 행정 경험과 경륜을 갖춘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와, 미국처럼 도지사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체장이 권력 주변을 쫓아다니며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어서는 안 됩니다. 도정에 충실하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이든 개인이든 스스로 설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JP에게 대선 지지 후보 선택과 관련해 어떤 의견을 말했습니까.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은 우리가 서두를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서둘러야 할 쪽은 대통령 후보를 낸 쪽 아닙니까. JP가 마지막에 국가를 위해 올바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JP가 DJ의 손을 들어줄 때 ‘내가 있어야 DJ가 국정을 올바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 어떤 정치인은 DJP 연합정권에서 JP가 빠져나가면서 DJ 정권이 어려워졌다고 하더군요. 충청이 떨어져나간 4·13 총선 이후 수도권 지역의 각종 선거에서 여당이 연전연패했다는 거지요.

    “나는 DJP 연합을 할 때, DJ의 민주화와 인권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다가 JP의 국정운영 경험과 경륜이 뒷받침되면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JP가 DJ를 선택할 때 내가 모시고 갔습니다. 단순히 DJP 연합을 통해 얻을 이익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JP에게 DJ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줘야 한다고 말했지요.

    4·13 총선 때 DJP 공조를 깬다고 해 나는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이후 경제를 이만큼 끌고 왔던 가장 큰 요인은 JP가 국정 경험이 풍부한 각료들을 데리고 공동정권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을 스스로 깨고 나오는 것은 얘기가 안 됩니다. DJP 공조를 깨고 독자적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내부적인 논의나 판단이 있었겠지만 대단히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국정은 절대로 하루 아침에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랜 경륜과 경험이 뒷받침된 팀이 함께 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JP에 비판적인 김용환 의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는 소신 있는 분입니다. 나는 지켜야 할 내 도리가 있고요. 내 잣대로 선배를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김용환 의원은 JP를 내침으로써 그 자리를 물려받고 싶어하고, 심지사는 JP와 끝까지 의리를 지키면서 그 자리를 물려받으려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물려받고 물려주는 것은 안 됩니다. 민감한 이야기지만 시대의 변화와 주민의 정서를 잘 읽는 리더가 탄생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후광 효과가 있겠지요. “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은 박정희

    심지사는 비교적 굴곡이 없는 출세 코스를 달렸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 때까지만 하더라도 청와대는 출세를 보장받는 근무처였다. YS·DJ 정부에서는 청와대 근무의 위상이 추락해 잘 나가는 부처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거나 집권 초기에 들어갔다가도 임기 말이 오기 전에 빠져나오려 하는 현상이 생겼다.

    그는 총리실에서 컸지만 청와대에 들어간 뒤부터 출세 길을 달렸다. 박정희 대통령 때 청와대 행정관을 하다가 경기도 북부출장소장으로 나가 의정부시장을 했고 이어 대전시장을 지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다시 청와대로 들어가 비서관으로,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행정수석비서관으로 근무했다. 1988년에는 관선 충남지사로 발탁돼 민선 3기를 합하면 4선 도지사를 한 셈이다.

    ―청와대에서 모셔본 세 대통령 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합니까.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4년 동안 비서관 생활을 하며 지켜본 박대통령은 검소한 지도자였습니다. 매주 수요일 토요일에는 꼭 분식을 했습니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뒤에는 저녁 때 당직 비서관과 함께 된장찌개와 김치가 나오는 1식3찬을 들었습니다. 고양군 원당 양조장에서 나오는 막걸리를 좋아해 검사관이 양조장에 가서 직접 가져왔죠. 아침에는 춘하추동 똑같이 국방색 낡은 점퍼를 입고 산책했습니다.”

    충남도지사 관사는 내부 벽 이곳저곳에 균열이 생길 정도로 낡아 서무계에서 벽을 털어내고 보수공사를 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을 본받고 싶어 그대로 놓아두고 있다고 말했다.

    ―정일권·최규하 총리에 대한 평을 해보시지요.

    “정일권 총리는 누가 봐도 신사죠. 업무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이 따지지 않았던 분입니다. 최규하 총리는 서류를 올리면 한번도 그냥 사인한 적이 없습니다. 반드시 뭘 고쳐 가지고 사인을 합니다. 실무형 총리였습니다.”

    ―그래서 주사라는 별명이 생긴 걸까요.

    “(웃음) 모시던 입장에서 그런 별명을 입에 올릴 수는 없죠.”

    ―노재봉·정원식 총리는 어떻습니까.

    “노재봉 총리는 취임 초기 하루에 30여 가지를 지시하더군요. 아침 출근길에 중구에서 불법주차한 차량들을 보고 와서는 서울시장에게 단속 지시를 내려보내라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행정조정실장이 소극적이라고 생각했던지 내가 눈밖에 났습니다. 그래서 작심하고 ‘총리가 지시하면 대통령도 못 바꾼다’며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뒤로 지시가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노총리가 오래 계셨더라면 저하고 손발이 맞아 개혁을 많이 이루었을 텐데, 강경대군 사망 사건이 터져 단명 총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원식 총리는 순발력이 뛰어났습니다. 회의에서 여러 의견을 듣고 정리해서 결론을 내리는 능력이 탁월했어요.”

    ―이름이 거(巨)한 편이에요. 대평(大平)이라는 이름 때문에 사무관·서기관 시절에는 조금 부담스러웠겠어요. 할아버지가 지어주었습니까.

    “아버지가 공주군 금남편 대평리(지금은 연기군) 출신이고 금남초등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했습니다. 어머니가 공주 할머니댁에서 몸을 풀고 3개월 뒤 다시 대평리로 와 저는 대평리에서 성장했습니다. 선친께서 고향 이름에서 따 ‘대평’으로 지은 것이지요.”

    심지사의 부친은 40여 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와 교장을 하다가 민선 대전시 교육감을 지냈다.

    지역 주민의 특성을 일반화하는 오류는 매우 위험하다. 넓은 지역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살다 보면 별별 사람이 다 있는 법인데 자기가 경험한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근거로 지역 전체를 일반화해 편견을 형성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충청인에 대해서는 ‘말과 행동이 느리다’ ‘애국지사가 많이 나온 충절의 고장이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혹시 충청도에서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함께 산에서 나무를 하는데 커다란 바위가 시아버지 쪽으로 굴러 내려가는 것을 보고 며느리가 “아버님 바위 피하세유”라고 했는데 말이 끝나기 전에 시아버지가 바위 밑에 깔렸다는 조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웃음)

    “충청도 양반은 비가 쏟아져도 뛰지 않습니다. 뛰면서 철퍼덕거리고 가봐야 옷 젖는 건 마찬가지거든요. 느긋하게 비 맞고 걸어갈 수 있는 여유가 충청도인의 진정한 풍모라고 믿습니다. 느린 것은 여유 때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충청도 사람들은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충청도의 애국지사가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했습니다. 일제 때만 하더라도 유관순·윤봉길·한용운·김좌진 장군 등 애국선열을 다수 배출했습니다. 충청도 사람들은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고 충·효·예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대한민국은 서울공화국이다. 수도권이 지나치게 비대해 국토 면적의 11.8 %에 불과한 곳에 전체 인구(4700만명)의 46%인 2200만이 몰려 산다. 수도권 집중은 부동산 가격의 앙등, 공해·교통·환경파괴·물 부족 등 수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박대통령 시대부터 행정 수도 이전이 검토된 것은 바로 이런 문제를 해소하고 지역의 균형발전을 도모해보자는 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를 겪으며 수도권 억제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수도권 하나라도 제대로 경쟁력을 갖춰서 수도권에서 승부를 내야 지방에도 그 과실이 떨어진다는 논리가 경제인들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다.

    ―수도권의 각종 규제를 푸는 정책에 가장 반대하는 곳이 충청도로 알고 있어요. 수도권 규제가 심해야 공장들이 바로 경기도계를 넘어서 충청도로 오겠지요.

    “기본적으로 우리는 서울과 부산 중심의 양극으로 경제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부산도 죽고 수도권만 사는 1극 경제 중심체제로 가고 있습니다.

    어느 한 지역의 개발과 투자를 통해 세계 경쟁력을 키워나가려는 정책은 잘못입니다. 각 지역의 특성을 다양하게 살려 발전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직접비용뿐만 아니라 간접비용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수도권 교통혼잡 비용이 연간 8조원인데 단순하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비용은 전국민이 부담하는 거예요. 전국민이 부담하는 비용을 빼고 당장 편리하고 약간의 경쟁력이 있다고 수도권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많으니까 도로를 만들고, 도로가 좋으니까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제공하고, 그래서 사람이 더 몰리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눈앞의 현실만 보고 대증요법으로 정책을 개발해서는 안 됩니다. 충남만 잘살려는 지역 이기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노무현 후보가 행정수도를 대전으로 옮기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충청표를 얻기 위한 전략이겠지만…. 단일화를 위한 텔레비전 토론에서 정몽준 의원은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도 검토됐던 사안으로 수도 이전은 50년 이상을 두고 추진할 과업이라고 비판하더군요. 통일 후 수도 이전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행정수도 대전 이전 공약에 대해 충청도민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수도 이전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인가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정책의 우선 순위를 신중히 검토해야 됩니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충청도민들로서는 수도를 이전해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박대통령 시대에 가능했던 사업이지만 지금도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심지사는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충청도에 유리한 공약임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후보의 공약이다 보니 선뜻 맞장구를 치기 어려운 측면도 있을 것이다

    ―손학규 경기, 박태영 전남, 강현욱 전북 지사와 함께 서해안 시도지사 협의회를 만들었던데요. 동서로 나눈다는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요. 서쪽 지사들이 뭉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나요.

    “안상수 인천시장은 외국 출장으로 참석 못했습니다만 서해안에 연접한 경기·인천·충남·전남·전북 다섯 시도지사가 1차로 안면도에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정치적인 시각으로 동서를 나누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서해안 지역에서 서로 협력해야 될 부분이 많습니다. 황사와 연관돼 있는 중국 환경 지원 문제, 바다 오염 방지 공동 대처, 서해안 관광벨트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협력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예를 들면 수도권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안면도에는 최고급 리조트를 만들고 대천은 대중 관광 중심으로 개발하고, 변산반도는 가족 중심의 휴양지로 만든다든지, 그런 것이지요.

    충남·전북·전남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기지이고, 경기·인천·서울은 농산물의 수요처입니다. 충남·전북·전남이 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할 테니까 수도권 시도지사들이 국산 농산물 먹기를 장려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2선을 하고 그만둔 한 도지사는 “도백의 힘으로 교통표지판 하나 바꿀 수가 없다”며 지방자치의 무력함을 토로한 바 있다. 도로표지판은 경찰 소관인데 경찰은 중앙에서 임명하고 그 지시를 따르다보니 이런 말이 나왔다.

    1998년 7월 김대중 대통령이 충남도를 방문했을 때 심지사는 지방경찰제도에 관해 건의했다. 김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다음해 상반기까지 지방경찰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임기가 다되도록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지방 주민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앙정치의 부산물로 주어졌습니다. 중앙정부가 정치적 필요에 의해 지방에 떡을 하나 준 것이 지방자치라고 할 수 있지요. 일본도 국가경찰과 지방경찰이 나눠집니다. 주민의 안녕과 생활의 질서를 지키는 민생치안은 당연히 지방자치단체장의 책임이 돼야 합니다. 지방의 교통·치안 질서유지를 국가경찰이 맡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국가경찰은 외국 관련 범죄와 전국에 걸친 조직범죄, 테러 같은 범죄에 집중해야지요.

    지방경찰 제도가 실현되지 않는 데는 관료제의 특성상 권한의 분산을 싫어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지방경찰을 만들면 경찰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지 못하리라고 우려하는 것 같아요.”

    서해안고속도로 노선 변경에 기여

    서해안고속도로가 2001년 말 개통되면서 교통이 불편하던 당진·홍성·보령·서산 등의 접근성이 좋아져 주말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이들 행락 차량 때문에 주말이면 서해안고속도로는 주차장으로 바뀐다.

    당진-서산-홍성-보령-서천으로 서해안고속도로 노선이 결정된 것은 관선 심대평 충남지사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본래 계획은 아산만-예산-청양-부여 등 충남 내륙으로 관통하게 돼 있었다. 노선을 서해안 쪽에 가깝게 만들려면 서해대교 건설에 드는 막대한 재원이 걸림돌이었다. 그는 건설부 장관이 최동섭·박승·권영각씨로 바뀌는 동안 집요하게 건의하고 설득해 마침내 노선 변경을 이루어냈다. 서해대교 건설로 6800억원의 추가 재원이 소요됐지만 서해대교는 서해안의 새로운 명물이 됐고 서해안 오지의 균형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서해안고속도로 개통 이후 서부 지역에 변화가 있습니까.

    “서해대교를 통해 충청도와 호남, 수도권이 연결돼 당진·서산·보령·서천 지역 접근성이 좋아져 관광객과 기업체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충남에서 작년과 올해 신설된 기업체는 모두 그쪽에 있습니다.

    안면도에서 꽃박람회를 개최하면서 태안군은 관광객이 40% 이상 증가했습니다.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 성공은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습니다.

    노선 변경은 최종적으로 권영각 장관이 했습니다. 내가 의정부시장을 할 때 이 분은 포천에서 군단장을 지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충남도는 백제문화권 개발 사업에 2001년부터 2005년까지 2조1천여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JP가 총리를 할 때 충남도가 대표적으로 한 건 따낸 사업이다.

    ―백제가 신라에게 패망해 신라문화권에 비하면 빈약하지 않나요.

    “빈약하죠. 말살된 역사 유적 문화를 복원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로마에서는 어디를 파도 문화재가 나옵니다. 조각을 하나 발굴해 닦는 데 4~5년이 걸립니다. 이 조각을 세울 자리를 찾는 데 4~5년이 또 걸려요. 역사적 고증이 없이 급하게 복원하다 보면, 경주 보문관광단지 같은 시멘트 문화를 만들기 쉽습니다.

    백제 역사 재현단지에 철저한 고증을 통해 왕궁도 만들고 박물관도 세우려고 합니다. 역사를 꼭 복원하고 재현해야겠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계속 추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임명직 지사 때 계획을 세워 특정지역으로 지정된 것은 YS정권 때인 1994년입니다. 그리고 JP가 총리를 하던 1998년도에 2001∼05년 사업기간에 2조1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확정했습니다. 백제 역사 재현단지를 비롯한 전통문화학교 건설, 백제 역사박물관 조성 사업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만 민자유치가 부진해 40% 정도밖에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제왕적 대통령도 임기가 반 정도 지나면 레임덕이 시작된다. DJ정부에서 줄곧 권력의 핵심에서 일한 정치인에게 ‘언제부터 레임덕이 시작되더냐’고 묻자 ‘청와대 들어오고 나서 6개월 지나니까 벌써 내리막길이더라’고 말했다. 5년 단임제가 레임덕이 오는 시기를 앞당긴 측면이 있다.

    다음에는 출마하지 못하는 도지사도 레임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심지사는 “임기 안에 인사를 10번 더 할 수 있다”는 말을 도청 공무원들에게 한 적이 있다. 다분히 레임덕을 의식한 발언으로 들린다.

    “도지사는 권력이 집중돼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레임덕이 생기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그 지역 주민입니다. 이번 취임사에서 도민들에게 처음보다 더 처음같이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게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 시작하는 각오로 임기를 마무리짓겠다는 말을 어디서든 하고 다닙니다.”

    도청과 광역시청이 한 도시에 있는 광주와 대전은 도청 이전 문제로 주민간에 갈등을 겪고 있다. 민주당 광주 경선에서 한화갑씨가 노무현·이인제 후보에 이어 3등을 한 것은 도청을 무안으로 가져간 데 대한 광주와 동부 전남 사람들의 반란이라는 시각이 있다. 전남 무안은 아무래도 서남쪽에 치우쳐 있는 편이다.

    충남에서는 전체 16개 시군 가운데 12개 시군이 도청 이전 후보지 신청을 했다. 거의 모든 시군이 신청한 셈이지만 세론에 떠오르는 유력 후보지는 공주·홍성·청양이다. 과거 충남도청은 공주에 있다가 철도가 대전을 지나가게 되면서 대전으로 옮겨왔다.

    ―지방 언론에 도지사가 공주 출신이라 공주로 내정해놓고 연구조사 용역 결론을 맞추려 한다는 기사가 나왔더군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0만명 규모의 신도시를 만들려면 2조6000억원 정도의 예산이 소요됩니다. 도민들에게 IMF 경제위기를 극복할 때까지 도청 이전 문제에 대한 논의를 중단하자고 했습니다. 불필요한 갈등 요인을 만들면 경제난을 극복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었지요.

    2001년부터 다시 도청 이전 기획단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곧 3개 후보지를 선정해 도의회에 제출할 계획입니다. 어려운 사안일수록 원칙대로 해야 합니다.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충남도의 역량을 차단하는 벨트가 필요합니다. 그 차단벨트가 도청 이전 후보지가 되어야 합니다. 도민이 접근하기 편하고 역사성과 문화, 모든 측면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도청이 자리잡아야 합니다.”

    호남고속철은 천안으로 빠져야

    ―광주와 전남, 대전과 충남은 시도가 합쳐져야 오히려 지방자치의 시너지가 나온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2002년 일본은 지방자치단체 통합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지방자치단체가 지나치게 세분되면 지역 이기주의 때문에 협력하지 못하는 폐해가 있습니다.

    대전·충남·광주·전남이 분리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10년 넘게 분리돼 있던 각종 기관을 통합하자면 단순히 지역 주민의 의사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정부와 국회가 법으로 해결해야 될 문제도 있고, 이해관계가 얽힌 단체와 기관과 주민이 대승적 차원에서 합의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국정감사 때 대전·충남의 통합이 바람직하다고 답변해 일부 반발을 샀지만 저는 중앙정부에 있을 때도 대전·충남의 분할뿐만 아니라 광역시의 분리를 반대했습니다.”

    안면도는 서해안의 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섬이다. 안면도를 둘러싼 작은 섬들과 사구에 낙조가 비치는 모습은 그림엽서 풍경 같다. 1990년에는 정부가 안면도에 방사성 폐기물 처분시설을 지으려 하자 주민들이 들고일어나 진통을 겪었다. 심대평씨가 관선지사를 할 때 일이다.

    ―무기상 카쇼기가 안면도에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면서요. 어느 정도 진척됐습니까. 카지노 이야기도 나오던데요.

    “카지노는 전혀 논의된 사항이 아닙니다. 카쇼기의 알라스사가 2억500만달러를 1차 투자하겠다고 신고했습니다. 외국인 투자유치는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지난 10월초 한국알라스사가 투자설명회를 열었습니다. 대학교수와 주민 등 300여 명이 모여 설명을 듣고 의견을 밝혔습니다. 외국 유수 호텔 및 관광시설과 연계되는 최고급 관광지를 만들겠다고 해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사되기까지는 걸림돌이 많습니다.”

    ―호남고속철도 분기점을 놓고 충청지역 3개 지방자치단체가 각기 다른 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호남선이 대전에서 경부선과 갈라지기 때문에 우회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호남고속철도는 천안-공주-논산 코스를 잡았는데 요즘 충북이 오송을, 대전시가 대전 분기점을 각각 주장하더군요. 충남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호남고속철도의 주 수요자가 누구인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호남선 철도가 서대전역을 경유하는데 서대전역사를 이용하는 호남선 승객은 전체 수요의 6%에 못미칩니다. 수요자의 대부분인 전주·광주·목포 사람들이 빨리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용객의 90% 이상이 호남사람인데 타지방 사람보고 충청도의 특정 도시를 위해 돈 더 내고 시간 더 들여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기술적으로도 설계 속도가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더군다나 안보의 중심지역인 계룡대를 통과하는 노선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1997년도에 이미 천안으로 결정이 됐던 것이죠. 충북과 대전에서 이의를 제기하니까 다시 용역을 주는데 용역비가 50억원을 넘어요. 낭비예요.”

    동료 배려하는 여유 가져야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펴낸 ‘지방정부의 지도자’라는 책에는 심지사가 공무원의 청렴에 관해 쓴 글이 실려 있다.

    ‘흔히 공무원은 명예를 먹고 살아간다는 말이 있다. 돈 몇 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사회의 지탄을 받고 사법처리에 이르는 공무원을 볼 때마다 수십년 간 쌓아온 공든 탑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좋은 말씀인데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박봉에 판공비도 부족한 공직자들이 나라에서 주는 녹만 가지고 활동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공무원이나 정치인을 하면서 전혀 부정한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말은 쉽지 실천하기는 지난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운 나쁜 사람만 당하는 건 아닐까요.

    “이 사회는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창조해갑니다. 공무원에게 명예를 먹고 죽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공무원도 순간적인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밥 한끼 술 한잔 얻어먹은 걸로 발목이 잡혀 업무 처리를 왜곡시키는 공무원은 떠나야 된다는 얘기는 자주 합니다.

    공무원 사회에는 금전의 유혹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충남의 한 저명한 분이 새벽에 119구조대를 불러 충남대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는 고마워서 많이도 아니고 10만원을 넣은 봉투를 차에다 놓고 내렸답니다. 그런데 119구조대가 집을 찾아와 도로 갖다주고 갔답니다. 내가 문병 가서 들은 이야기예요.”

    ―약력을 보니까 줄곧 출세 코스를 달려왔는데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까.

    “인사상 약간씩 불이익을 받은 적이 있지만 낭떠러지로 거꾸러진 적은 없어요. 공무원이 인정을 받으려면 먼저 옆에 있는 동료를 배려하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경쟁 상대는 멀리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대전 근처 땅 투기설의 진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부모님으로부터 건강한 체질을 물려받았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그저 10~ 20분 맨손체조를 합니다. 조금 더 여유가 있으면 아령체조를 합니다. 옷을 벗어보면 몸에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아령체조 덕분이지요.”

    ―JP는 핸디캡이 얼마나 됩니까. 싱글이라고 하지만 OK와 멀리건을 후하게 받아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고….

    “JP 연세를 생각해보면 싱글이 맞습니다. 나하고 칠 때도 70대 칠 때가 있고 80대 초반을 칠 때가 있습니다. 그린에서 더러 넉넉하게 OK도 드리지만 연세가 70 후반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대단한 스코어지요. 잘 칩니다. 내가 드라이브 거리가 조금 더 나가면 ‘심지사 장타구만’ 하면서 저하고 거리 경쟁을 하려고 합니다.”

    심지사는 스스로의 인생도 성공했지만 자식 농사도 잘 지은 편이다. 부인 안명옥씨(54)와의 사이에 우정(강릉지청 검사)·우현(서울대 박사과정)·우찬(육사 졸업 후 서울대 법대 학사편입) 등 아들 셋을 두었다. 부러움을 살 만하다.

    ―언짢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신동아’에 1997년 대전 근방에 땅 투기를 했다는 기사가 나왔더군요.

    “그게 1998년 선거 때 튀어나왔던 얘기예요. 장인이 안산에 있는 조그만 땅을 집사람한테 상속해주었습니다. 도시계획 지역에 편입돼 값이 좀 올라 그것을 팔아 고향에 땅을 세 필지 샀어요. 모두 등록한 재산입니다. 화가 나서 얘기하기도 싫습니다만 집사람이 아들 셋한테 비슷한 땅 한 필지씩 나눠주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준 재산을 팔아 외국에서 흥청망청 쓰고 다니면 괜찮고 아버지의 재산을 축내지 않고 늘리려는 사람은 나쁜 놈으로 매도당하는 사회가 돼서는 안 됩니다. 투기냐, 아니냐는 단기매매와 차익을 기준으로 따져야 합니다. 국정감사에서 세 번씩이나 이 문제로 당했고 오늘 네 번째 당하지만, 언론도 당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야 됩니다. 집사람이 잠을 못 자며 괴로워한 것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상대 후보도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이어 심지사는 ‘신동아’ 10월호에 실린 장상 전 총리서리 인터뷰 기사를 거론했다.

    “한국에는 사람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풍조가 언제부터인지 생겼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사회적 기반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장상 총리서리 이야기가 맞습니다. 일제시대에 국내에서 살았던 사람은 전부 친일파고 중국에 간 사람만 애국자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입니다. 베드로도 하루 저녁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정했습니다. 그건 배교가 아닙니다.”

    아마 장상 총리서리가 친일논란이 있는 김활란 전 총리를 평가한 대목을 말하는 것 같다.

    하류만 양산하는 사회는 곤란

    ―국회의원을 3, 4선 이상 한 사람들이 도지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도지사 자리가 좋긴 좋은 것 같아요. 뭐가 그렇게 매력적일까요.

    “영국의 철학자 버나드 쇼가 어중간히 유능한 사람은 그 지위를 자랑삼고, 재능이 대단한 사람은 지위가 오히려 그 사람에게 방해가 되고, 재능이 모자란 사람은 그 지위를 더럽힌다고 했습니다. 도지사 자리를 봉사로 생각하고 하면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정말 더 많은 사람, 더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본인이 즐기면 여러 사람이 힘들고, 본인이 힘들면 여러 사람이 평가할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모법 답안이다. 이런 질문은 소주라도 한잔 걸치고 쓰지 않는 조건(오프 더 레코드)을 달아 물어봐야 솔직하고 재미있는 답변을 들을 수 있다.

    ―국무총리실에서 14년 간 근무하면서 다섯 분의 총리를 받들었는데 혹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무총리 해보고 싶지 않습니까.

    “국무총리가 결정하면 대통령도 그 결정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자리가 국무총리입니다. 도덕·능력·추진력 측면에서 충분히 검증받아 기회가 주어지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할 겁니다. 지방 행정에서 얻은 경험으로 예측 가능한 행정을 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면 결코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까.

    “세계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세계 일류가 되지 못하게 틀어막는 사회 현상이 있는데 이는 반드시 고쳐져야 합니다. 하류만 양산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정이 다 돼서 인터뷰가 끝이 나 녹음기를 껐다. 심지사가 해외 출장길에 샀다는 헤네시 XO 코냑을 한 병 내왔다. 새벽 1시까지 배석자와 함께 네 명이 바닥을 냈다.

    심지사는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많이 털어놓았다. 헤네시를 마시며 한 이야기였지만 오프 더 레코드를 걸지 않은 내용은 이 글에 녹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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