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

조선시대의 민중의(民衆醫)

  • 글: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3-01-02 09: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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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
    얼마 전 외국 제약회사가 압력을 넣어 보건복지부 장관이 그만두었느니 아니니 하며 세상이 시끄러웠다. 속내가 어떠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이 머리 속을 맴돈다.

    약은 사람의 병을 고치자고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약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병을 고치게 된 지 벌써 오래다.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치료제의 값이 너무 비싸 사람이 죽어나가고, 우리나라에서 혈액암의 특효약 글리벡이 너무 비싸 환자들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딱한 사연을 들은 지 오래다. 서구의 제약회사가 개발비를 뽑고, 이윤을 남기려고 하는 짓이다. 희귀병에 걸린 사람은 제약회사에서 약을 개발한다 하더라도 시장성이 없기 때문에 약값이 비싸 결국 포기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결국 치료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 죽는 것이다. 오로지 화폐를 향해 질주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을 잘못이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뭔가 개운치가 않다. 사람의 목숨이 먼저인가? 돈이 먼저인가?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았을 때 과연 우리는 이 소박한 질문에 쉽게 답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병들지 않는 인간은 없다

    의·약업은 인간의 다른 직종과 견주어 정말 특수하다. 의·약업은 병을 치료하는 직종이다. 병들지 않는 인간은 없다. 의학적 소견으로 건강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해도 앞으로 병이 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죽음이란 병으로 향해 가는 존재인 이상, 의·약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이 점에서 의업의 특수성이 있는 것이다. 병든 인간, 그리고 병이 들 수 있는 인간이기에 의사 앞에서는 누구나 약자가 된다. 나 역시 책권이나 읽은 인간이고, 학생들 앞에서 공연히 목소리에 힘을 주고 훈시(?)하지만, 의사 앞에서는 육신을 전적으로 맡긴 초라한 ‘환자’일 뿐이다.

    나는 조선시대 문헌을 뒤적이면서 의원에 관한 기록을 다소 보았다.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거니와 요즘 세상에도 같이 읽어봄직한 것 같아 소개한다.



    조선초기의 복잡한 의료기관은 성종 대의 ‘경국대전’에서 체계적으로 정비된다. 먼저 궁중에는 TV 사극에서 숱하게 본 내의원(內醫院)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기관은 임금의 약을 조제하는 기관이니, 왕을 제외한 일반 백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전의감(典醫監)이란 곳도 있는데, 이곳은 대궐 내에 필요한 약재의 공급이나 또는 약재의 하사를 관장하는 곳이다. 역시 왕실에 관계된 의약기관인 것이다.

    내의원과 전의감의 의료기술 혜택을 볼 수 있는 대상은 왕과 왕비, 세자 등 왕실 가족이나 고급관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통 백성들은 병이 나면 어떻게 치료를 받았던 것인가?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란 곳이 있다. 이 두 관청은 이름부터 재미있다. 혜민서는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고, 활인서는 사람을 살리는 관청이다. 두 기관은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경국대전’을 보면, 혜민서는 “서민의 질병을 구료(救療)”하는 기관이고, 활인서는 “도성의 병난 사람을 구료”하는 기관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차이가 선명히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혜민서가 주로 일반 백성의 질병을 담당하는 관청이라면, 활인서는 주로 무의탁 병자를 수용하고 전염병이 돌 때면 임시로 병막(病幕)을 지어 환자의 간호를 담당했다. 그리고 환자가 죽으면 묻어주는 일도 활인서의 몫이었다.

    이것이 대표적인 의료기관이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이런 기관이 서울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 이런 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두종의 ‘한국의학사’에 ‘지방의료기관’이란 항목이 있기는 하다. 태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기간에 지방에 의원(醫院) 의학원(醫學院)을 두고 의원(醫員)을 파견했다고 하지만 이 기관들은 뒷날 종적이 묘연하다. 사실 조선시대 지방에는 서울의 혜민서와 활인서 등에 필적하는 공식적 의료기관이 부재했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의원이 천시당한 사회

    조선시대의 의학을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이상의 의료기관을 들고, 또 세종 시대에 엮어진 의학서적(‘향약집성방’과 ‘향약채취월령’과 ‘의방유취’)을 언급한다. 그리고 여기에 허준의 ‘동의보감’과 이제마(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을 꼽으면서 찬란한 의료사(醫療史), 의학사(醫學史)를 말하지만, 나는 사실 이 점에 대해 좀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서울에 있던 의료기관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지방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민중은 의료 혜택에서 제외돼 있었다. 더욱이 의학서적은 한문으로 쓰여 있어 누구나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중이 어떻게 질병과 싸워나갔는가 하는 문제는 의료기관과 의학서적의 발달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차원에서 민중을 위해 의료활동을 했던 민중의(民衆醫)에 주목한다.

    아무리 좋은 처방과 약이 있으면 무얼 하는가? 의원이 있어야 약을 쓴다. 그런데도 의원에 관한 이야기는 드물다. 양반 중심의 조선사회는 의원을 천시하였다. 의원이 아무리 똑똑한들, 아무리 학문이 있어본들 양반 아래다. 한심한 일이지만 사실인 걸 어쩌랴. 조선후기 지식인 이규상(李奎象)은 이렇게 말한다.

    “대저 역학(譯學)이나 의학(醫學)에 모두 학(學)이란 말이 붙는 것은 글을 알아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글을 알면 지식이 생기는 법이니, 사역원(司譯院)이나 내의원(內醫院)에 속하는 사람 중에 지식이 있는 사람이 많다. … 의학과 역학은 참으로 인재의 큰 창고인데, 사대부들은 역관 벼슬을 멀리하기 때문에 그 방면의 사람을 들을 수 없으니 매우 한탄스러운 일이다(민족문학사연구소 한문분과 역, ‘18세기 조선 인물지’, 창작과비평사, 1997, 190면).”

    입신양명의 조선시대적 의미는 별다른 것이 아니다. 벼슬하는 것, 곧 직업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벼슬하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라 하고서 일부 양반만 좋은 벼슬을 할 수 있고, 양반이 아닌 다른 사람은 배제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한심한 일이다. 의학과 역학(외국어)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고, 국가의 외교를 다루는 중차대한 일이다. 하지만 이를 담당하는 의관과 역관은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권력의 정상부에는 결코 올라갈 수 없다. 의관과 역관이 아무리 똑똑해도 영의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니 무슨 열의가 있어 의학이나 역학을 공부하고 발전시키겠는가? 지금도 학벌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의원을 우습게 아는 양반들의 의식 때문에 의원에 관한 기록은 그리 흔하지 않다. 도대체 중국의 화타나 편작, 서양의 히포크라테스처럼 내놓을 만한 의원이 누가 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이 ‘동의보감’의 편자 허준(許浚)이 있지 않냐 할 것이다. 하지만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이건, TV드라마 ‘허준’이건 그 ‘허준’이라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허준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허준은 상상력의 소산인 것이다. 나는 유희춘(柳希春, 1513~77)의 일기인 ‘미암일기초’와, 이규상의 ‘병세재언록’, 그리고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서 간단한 기록을 보았을 뿐이다. 왕조실록에도 허준에 관해 선조와 광해군에 걸쳐 100회 이상의 기록이 나오지만, 그것은 궁중 어의(御醫)로서의 활동일 뿐이다. 우리는 소설이나 TV의 허준을 거기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허준은 왜 이토록 유명해 졌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동의보감’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이 중국에 갔을 때 북경의 유리창에서 팔리는 조선의 서적으로 ‘동의보감’이 유일하더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의 서적은 중국에서도 인정받은 국제적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만 명을 살리면 내 일이 끝날 것”

    우리는 사실 허준 개인에 대해 별반 아는 것이 없다. 그러니 알지도 못하는 허준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무슨 졸가리가 있는 이야기를 해보자.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에 ‘침은조생광일전(鍼隱趙生光一傳)’이란 전(傳)이 있다. 침은이라고 했으니, 침술을 주로 하는 침의였던 것이다. 작품은 짤막하지만 내용은 사뭇 인상적이다.

    조선시대에는 의원을 맡는 집안이 따로 있다. 원래 전문적 의원은 중인에 속한다. 양반이 의술을 익히는 경우가 있지만 양반 출신 의원을 의원으로 치지는 않는다. 중인은 의원·역관·계사(計士)·일관(日官)·화원(畵員)·사자관(寫字官) 등등 그 범위가 넓지만, 의원·역관·계사·음양관은 잡과(雜科)라 해서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들어서기 때문에 중인 중에서도 지체가 높은 편이고, 또 그 중에서도 의원과 역관을 가장 높이 치는 법이다.

    그런데 조광일이란 사람은 그런 의원 가문도 아니다. 홍양호의 말에 의하면 그의 의술은 옛부터 전해오는 처방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니, 제대로 된 의원 가문에서 자라났거나 의서(醫書)를 광범위하게 본 그런 의원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가? 원래 정해진 의서란 없다. 병만 나으면 그만 아닌가? 그는 가죽 주머니 속에 구리침·쇠침 10개를 넣고 다녔다고 한다. 그 침으로 악창(惡瘡)을 터뜨리고 상처를 치료하였으며 어혈을 풀고 풍기(風氣)를 틔우고 절름발이와 곱추를 일으켜 세웠는데, 즉시 효험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니 명의라 불러도 괜찮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이런 의술로 유명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자기 호를 침은이라 붙일 정도로 침술에 자부심을 가진 명의였으나, 돈벌이에는 아주 손방이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어느 날 홍양호가 우연히 조광일의 오두막을 지나다 보니, 웬 노파가 “아들 놈이 병이 나 거의 죽게 되었으니 제발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을 하고 있었다. 홍양호가 보아도 돈이 안 될 환자다. 그런데 조광일은 “그럽시다” 하면서 귀찮아하는 기색이 없이 선뜻 길을 따라나서는 것이 아닌가.

    뒤에 홍양호가 물었다. “의술이란 천한 기술이고, 시정은 비천한 곳이다. 그대의 재능으로 귀하고 현달한 사람들과 사귀면 명성을 얻을 것인데, 어찌하여 시정의 보잘것없는 백성들이나 치료하고 다니는가?”

    조광일의 대답인즉 이렇다.

    “나는 세상 의원들이 제 의술을 믿고 사람들에게 교만을 떨어 서너 번 청을 한 뒤에야 몸을 움직이는 작태를 미워합니다. 또 그런 작자들은 귀인의 집이 아니면 부잣집에나 갑니다. 가난하고 권세 없는 집이라면 백 번을 청해도 한 번도 일어서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어진 사람의 마음이겠습니까? 나는 이런 인간들이 싫습니다. 불쌍하고 딱한 사람은 저 시정의 궁박한 백성들입니다. 내가 침을 잡고 사람들 속에 돌아다닌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살려낸 사람은 아무리 못 잡아도 수천 명은 될 것입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니, 다시 십 년이 지난다면, 아마도 만 명은 살려낼 수 있을 것이고, 만 명을 살려내면 내 일도 끝이 날 것입니다.”

    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
    어떤가. 감동스럽지 않은가? 이 한미한 의원의 말에 의업의 정도(正道)가 있지 않은가? 필자는 요로결석으로 한동안 고생을 하였다. 서울의 유명한 대학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그 거룩하신 비뇨기과 과장님께서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환부를 깊이 찌른다. 너무나 고통스럽다. 고통을 참는 소리가 이빨 사이로 스며나오자, “아파? 아프긴 뭐가 아파?” 대놓고 반말이다. 사람대접이 아니다. 통증으로(결석의 통증은 대단하다) 밤을 꼬박 새는 고통을 겪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이런 식의 막말이라니, 나는 병원을 나오면서 다시는 이 병원을 찾지 않으리라 하였다. 환자는 인정없는 의사, 매몰찬 간호사, 관료적인 병원의 시스템, 복잡한 조사와 거대한 의료기기가 주는 공포감에서 이미 절반은 죽는다. 어디 조광일 같은 헌신적 의원은 없는가?

    비슷한 시기에 정래교(鄭來僑)가 지은 ‘백광현전(白光炫傳)’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작자 정래교도 흥미로운 사람이다. 양반은 아니고 중인에 속하는 인물인데, 중인 중에서도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시인이었으나, 신분의 장벽에 막혀 평생을 불우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가 의원의 전(傳)을 지은 것도 자의식의 반영일 것으로 생각된다. ‘백광현전’에 의하면 백광현은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사람이다. 한의학은 원래 외과 수술이 발전하지 않은 의학이다. 종기의 치료도 외과적 방법에 의한 치료술이 드물었던 바, 그는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종기 치료사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왔던 것이다.

    백광현은 원래 말의 병을 고치는 마의(馬醫)였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원도 별 볼일이 없는데, 마의라니 지체가 형편없이 낮았던 것이다. 마의로서 그는 말의 병을 오로지 침을 써서 고쳤고 의서는 보지 않았다. 정통적인 의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침으로 말의 병을 다스리는 기술이 진보하자, 사람의 종기에도 시술해 보았더니 효험이 있었다. 그는 이내 사람의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전업했고, 수많은 종기의 증상을 보면서 의술이 더욱 정심해졌다. 요즘 말로 하자면 임상경험이 풍부해졌던 것이다.

    하필이면 종기인가? 지금은 종기가 나는 경우도 적고 병 취급도 않지만, 해방 전까지도 종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큰 병이었다. 종기에 관한 한 불후의 명약인 ‘이명래고약’이 없었더라면 저승에 갔을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종기의 역사는 장구하다. 2000년 전 사마천은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종기에 관한 인상적인 이야기를 남겼다. 장군 오기가 졸병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주자, 그 소식을 들은 졸병의 어머니가 펑펑 운다. 옆에 있던 사람이 장군이 종기를 빨아서 치료해 주었으니 영광이 아니냐, 왜 우느냐 하니, 어미 말인즉 저 아이의 아버지도 오기 장군이 종기를 빨아주자 감격한 나머지 전쟁터에서 돌아설 줄 모르고 싸우다가 죽었노라고, 그러니 저 아이도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종기를 한번 빨아주고 부하의 목숨을 손에 넣다니, 끔찍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시라. 오늘 누가 당신의 종기를 빨아주는가?

    과격한 종기 치료술

    종기는 요즘 들어 흔한 병이 아니지만, 필자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큰 병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하다. 조선시대에 효종과 정조는 종기로 목숨을 잃었다. 제왕의 권력도 조그만 종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종기가 이토록 큰 병이다 보니, 조선전기에는 종기만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치종청(治腫廳)’이란 관청까지 있었다. 종기는 참으로 심각한 병이었던 것이다.

    백광현의 종기 치료 장면을 보자.

    독기가 강하고 뿌리가 있는 종기는 옛 처방에 치료법이 없었다. 광현은 그런 종기를 보면 반드시 큰 침을 써서 종기를 찢어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침을 너무 사납게 써서 간혹 사람들이 죽기도 했지만, 효험을 보아 살아난 사람이 또 많았기 때문에 병자들이 날마다 그의 집으로 몰렸다. 광현 역시 자신의 의술을 자부하여 환자의 치료에 더욱 힘을 쏟았다. 이로 인해 명성을 크게 떨쳐 그를 신의(神醫)라고 불렀다.

    과격한 치료술이다. 침을 써서 절개해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았다고 했는데, 아마도 칼 같은 것으로 종기의 뿌리까지 절개했을 것이다. 외과적 방법인 것이다. 정래교는 “종기를 절개해 치료하는 방법은 백태의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니, 그는 종기의 외과적 치료의 신기원을 열었던 것이다.

    정래교는 백광현을 백태의(白太醫)라고 부르고 있다. 태의는 곧 어의(御醫)다. 민간의 무면허 의사 백광현이 어떻게 내의원 의관이 되었는지 그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내의원 의관이란 원래 의과 출신들이 차지하는 법이고, 또 의과란 대개 의원을 세습하는 가문 의과중인들이 독점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간의 의원이 의술이 탁월할 경우 내의원 의원이 되는 길도 열려 있다. 내의원에 소속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대로 의원을 하는 집안에서 의과를 통과해 내의원 어의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본원인(本院人)이라 한다. 둘째는 의약동참(醫藥同參)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대부부터 미천한 사람까지 의술만 좋으면 모두 보임될 수 있는 것이다. 백광현은 아마 후자의 길을 밟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과방목(醫科榜目)에 그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숙종 21년 12월9일 숙종은 백광현을 각기병을 앓는 영돈녕부사 윤지완(尹趾完)에게 보내는데, 이날 실록은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하여 많은 기효(奇效)가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神醫)라 일컬었다”라 하고 있다. 아마도 종기를 치료하는 능력 때문에 내의원에 들어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백광현이 내의원 의원이 된 것은 현종 때다. ‘현종개수실록’ 11년 8월16일에 현종의 병이 회복된 것을 기념하여 내의원 의관들에게 가자(加資)를 하는데, 백광현이 거기에 처음 보인다. 그는 공이 있을 때마다 품계가 올랐고 마침내는 현감까지 지낸다. 숙종 10년 5월2일에 왕은 그를 강령 현감(康翎縣監)에 임명했다가 이어 포천 현감(抱川縣監)으로 바꾸어 임명했다.

    의원이 현감이 된 것은 대단한 출세다. 사람이 이쯤 출세하면 교만해지게 마련이다. 민중을 치료하는 것으로 의업을 시작했던 백광현은 귀한 몸이 된 뒤에도 초발심을 잊지 않았다.

    그는 병자를 보면 귀천과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았다. 누가 부르면 즉시 달려갔고, 가면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기량을 다 쏟아 환자의 상태가 나아진 것을 보고서야 그쳤다. 나이가 많고 귀하신 몸이 되었다고 게으른 적이 없었으니, 기술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원래 타고난 성품이 그랬던 것이다.

    임금의 병을 고치는 귀하신 분이 되었다 하여 민중에 대한 헌신적 의료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민중의(民衆醫)로서의 모습이 약여하지 않은가? 무릇 의원이란 이래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종기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백광현이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개발했다면, 고약으로 유명한 종의도 있다. 피재길(皮載吉)이란 사람이 바로 그인데, 역시 홍양호가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이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정조는 1793년(정조 17년)에 머리에 작은 종기가 났다. 침을 쓰고 약을 썼지만 종기는 점차 얼굴과 턱 등으로 번져나갔다. 무더운 여름철이었다. 기거동작(起居動作)이 편할 리가 없다. 방치하면 죽음에 이르는 것이 종기다. 내의원에서 별별 방도를 다 썼으나 종기는 번져갔다. 이토록 위급한 순간에 누군가 피재길의 이름을 아뢴다.

    피재길은 원래 의원 가문 출신이다. 중인의 족보를 모은 ‘성원록(姓源錄)’이란 책이 있는데, 여기에 의원 가문으로서 홍천(洪川) 피씨의 가계가 나온다. 하지만 피재길의 이름은 없다(다른 載자 항렬의 인물들은 물론 있다). 이건 다분히 그의 가정적 이력과 관련이 있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죽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의술을 전수받지 못했고, 의서는 아예 읽은 적이 없었다. 까막눈이었던 것이다.

    어렵사리 의원노릇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 생전에 보고 들었던 처방을 그에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처방이란 것은 딴 게 아니라 고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배운 의술로 오만 가지 종기에 듣는 고약을 팔며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근본 없는 의원인 탓에 의원이란 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약은 잘 들었다. 양반가에서도 이 근본 없는 의원을 불러 고약의 효험을 보곤 했다고 하니, 그는 애초 양반가가 아니라 민중의 세계를 떠돌던 민중 의원이었던 것이다.

    떠돌이 약장수의 벼락출세

    정조는 피재길을 불렀다. 길거리의 떠돌이 고약장수가 지엄한 분을 뵙다니, 땀이 쏟아지고 온몸이 벌벌 떨린다. 말문이 막힌다. 정조는 이 약장수를 안심시킨다. “두려워말고 네 의술을 다 발휘해 보도록 하라.” 약장수는 “신에게 한 가지 써볼 만한 처방이 있습니다” 하고 물러나와 웅담을 주재료로 한 고약을 만들어 올린다.

    이것이 이른바 웅담고다. 환자(정조)가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하자, “하루면 통증이 가라앉고 사흘이 지나면 나을 것”이라고 답한다. 과연 말과 같아 사흘이 지나자 깨끗이 나았다. 명의가 따로 없다. 묵은 병을 고쳐주는 것보다 고마운 일이 있으랴? 왕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을 붙이고 조금 지나 전날의 통증을 씻은 듯 잊었다. 지금 세상에 이런 알려지지 않은 비방이 있을 줄 생각지도 못하였다. 의원은 명의라 할 만하고 약은 신방(神方)이라 할 만하다. 그의 노고에 보답할 방도를 의논해 보라.”

    내의원 의원들은 그를 내의원 침의(鍼醫)에 차정하고 6품의 품계를 내려 줄 것을 아뢰니, 정조는 당연히 허락하였다. 이어 나주감목관(羅州監牧官)이 되었다. 떠돌이 약장수의 벼락출세가 아닌가? ‘정조실록’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상의 병환이 평상시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 의원인 피재길(皮載吉)이 단방(單方)의 고약을 올렸는데 즉시 신기한 효력을 내었기 때문이었다. 재길을 약원(藥院)의 침의(鍼醫)에 임명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7년 7월 16일)

    정조는 그로부터 7년 뒤(정조 24년 6월)에 종기로 죽는다. 피재길 역시 정조의 치료에 참여했지만, 이번에는 효험이 없었다. 왕이 죽고 나면 치료를 담당했던 의원을 귀양 보내는 전례에 따라 피재길은 무산부(茂山府)로 귀양을 갔다가 순조 3년 2월에 석방되었다.

    피재길이 정조의 종기 치료에 쓴 웅담고는 마침내 천금의 처방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다고 하니, 어떤가? 요즘 세상이라면 특허신청부터 하고 값을 턱없이 올려받아 돈벼락을 맞을 궁리부터 하지 않았을까? 다른 의원이 웅담고를 만들어 쓰면 환자야 죽든 말든 고소부터 하지 않았을까? 피재길 이야기를 하니 이명래고약이 생각난다. 이명래의 고약으로 살아난 사람이 그 얼마였던가?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짐작하실 것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지만, 정조의 치료에 참여했던 민간 의원이 또 있다.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壺山外記)’에 실린 이동(李同)이란 사람이다. 그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었으나 역시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 사람은 정조의 치질을 치료한 적이 있는데, ‘환부’를 부복해 들여다보느라 대머리가 되어 상투를 짤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존의 항문을 정확하게 들여다본 것은 이동이 역사상 최초일 것이다. 이런 수고 덕에 정조의 치질이 완치되었고, 정조는 탕건을 하사하고, 아울러 호조 돈 10만 전을 내렸다. 이동도 아마 민간에서 얻은 명성으로 동참의원이 되었을 것이다.

    수만 백성 살린‘숨은 허준’ 많았다
    이동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그가 썼다는 약재다. 그는 침과 뜸을 기본으로 썼지만, 약만은 독특했다. 그의 처방이란 손톱, 머리카락, 오줌, 똥, 때 같은 것이었다. 풀이나 나무, 벌레, 물고기 따위를 처방한 적도 있는데, 도무지 돈을 쓸 필요가 없는 하찮은 것이었다. 그의 주장인즉 이렇다.

    “제 한 몸에 본디 좋은 약재를 갖추고 있거늘 무엇 때문에 다른 물건을 쓴단 말인가?”

    약이 될 것 같지 않은 약재의 사용 이면에는 저렴한 비용으로 민중을 구료한다는 절실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 이동은 의과에 합격한, 정통 코스를 밟은 의원이 아니었다. 그 역시 백광현이나 피재길처럼 민간의 의원으로 출발하여 왕실에까지 알려진 경우로 짐작된다. 나는 이동의 이상한(?) 약재에서 민간요법에 숨어 있는 오묘한 약리보다는 조선시대의 공식 의료시스템에서 제외되어 있던 민중들의 처절한 삶의 의지를 본다.

    전염병의 홀로코스트

    종기도 목숨을 거두어가는 시절이었으니, 전염병이라면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다. 정조가 사망하기 1년 전인 23년에 전염병이 돌았던 적이 있다. 이해 전국의 사망자는 모두 12만8000여 명이었다(‘정조실록’ 23년 1월13일).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대량의 사망자는 지금 드물게 남아 있는 통계를 보아도 전염병 때문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천연두·장티푸스·콜레라는 전염병의 삼두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세 전염병의 거두는 번갈아 등장하여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다.

    1821년에서 1822년 사이에 유행했던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평양에 수만 명, 서울에 13만 명이다. 전국으로 따지면 수십만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1859년에서 1860년에도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때의 사망자는 40만 명이었다. 서양 중세의 흑사병(페스트)만 무서웠던 것이 아니다.

    특히 정조 23년의 전염병에는 정치인들의 죽음이 눈에 띈다. 1월7일에는 김종수(金鍾秀)가, 18일 채제공(蔡濟恭)과 서호수(徐浩修)가 죽었다. 김종수는 노론의 영수,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였다.

    서호수는 소론가로 이 시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서명응(徐命膺)의 아들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에 의해 각 당파의 거두들이 죽었고, 약 7개월 뒤에 정조가 종기 때문에 죽었다. 당쟁의 지도가 일순 바뀐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는 미생물이 만드는 것인가? 어쨌거나 전염병은 조선후기 민간인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전염병이 미생물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알려진 것은, 파스퇴르가 탄저균을 발견하고부터다. 미생물과 전염병 사이의 메커니즘이 알려진 것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였으니, 발본적 치료법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전염병이 돌면 정부는 바빴다. 아니 바쁜 척이라도 해야 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이란 여제(?祭)를 지내는 것이었다. 국가의 의료기관,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에서 약제를 공급하는가 하면, 병막을 짓고 병자를 모아 간호했다. 이따금 전염병이 돌았던 곳에 세금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책은 없었다. 전염병이 저절로 그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 와중에 정부가 아닌 민간인이 전염병의 구제에 뛰어드는 경우가 있다. 정조 15년과 16년 사이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을 때 황해도 재령(載寧)의 김경엽(金景燁)이란 사람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는데, 이 사람은 매번 가난한 백성을 구제했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준 것이 거의 1000명에 가까웠기에 표창을 받은 것이었다(‘정조실록’ 16년 2월28일).

    명의의 전설이 탄생하는 배경

    전염병이 돌면 의원에 관한 전설이 생긴다. 죽음을 앞에 둔 환자와 가족의 마음은 약해진다. 그 허약해진 심리의 대지에서 우연과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싹튼다. 난치병과 불치병을 격퇴하는 명의(名醫)의 전설은 이래서 시작된다. 적지않은 문헌과 구전은 전설상의 의원과 의술을 전하고 있다. 미신성, 비합리성을 동반하고 말이다.

    유상(柳?)이란 의원이 있다. 숙종 때 사람이다. 이 사람은 숙종의 천연두를 치료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왕은 범인과 달라 천연두에 걸리면 곤란해진다. 살아나도 얼굴이 곰보가 되면 곤란하기 때문에 병을 방치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숙종은 재위 9년(계해년, 1683년)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유상의 약으로 수월하게 치료가 되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유상은 숙종 25년 세자(뒷날의 경종)의 천연두에도 능력을 발휘하여 벼슬이 올라갔다. 유상은 양반이 아니고 감사의 얼자(孼子)였으니 의술로 꽤나 출세를 한 것이다.

    임금의 천연두를 고친 유상의 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숙종실록’에는 기록이 없지만, 민간에는 기록이 있다. ‘청구야담(靑邱野談)’을 보자. 유상이 젊어 경상도 감사의 책실(冊室)로 따라갔다가 할 일도 없고 해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오던 길에 어떤 집에 들러 하루를 묵는데 주인이 잠시 출타한 틈에 우연히 그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의서를 뒤적여 보게 되었다. 주인이 돌아와 허락도 없이 남의 서책을 본다고 책망을 들었음은 물론이다.

    날이 새자 주인은 유상더러 빨리 출발하고 중간에서 쉬지 말라고 채근을 한다. 유상이 탄 나귀조차 바람처럼 달려 지금의 성남 판교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판교에는 별감 10여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임금이 천연두를 앓고 있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유의원을 불러오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면서 유의원인가를 묻고 빨리 대궐로 가자 한다. 유상이 남대문을 통과해 구리개를 지나는데, 어떤 노파가 마마를 앓고 난 아이를 업고 있었다. 무슨 약을 썼냐고 물었더니, 거진 죽게 되었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시체탕(枾?湯)을 쓰라고 하여 나았다는 것이다.

    유상의 머릿속에 번쩍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지난 밤에 언뜻 본 의서에도 시체탕에 관한 말이 있었던 것이다. 입궐하여 임금의 증세를 보니, 어제 본 어린아이의 증세와 같지 않은가? 시체탕을 썼더니 바로 효험을 보았다. 시체탕이 무어냐고? 사람 죽은 시체가 아니라 감꼭지 시체를 말린 것을 달인 물이다.

    시체탕 이야기는 그야말로 신비스러움으로 착색된 이야기다. ‘전설의 고향’에는 나올지 몰라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청구야담’에는 한 가지 얘기가 더 있다. 유상이 입궐하여 진찰을 하고 저미고(猪尾膏)란 약재를 쓰기로 하자, 숙종의 어머니 명성대비(明聖大妃)가 준제(峻劑·약성이 강한 약)라며 쓸 수 없다고 펄쩍 뛰었다. 아무리 청해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유상은 소매 속에 몰래 약을 넣고 들어가 쓰니, 병세가 누그러졌고 이내 회복되었다고 한다. 어느 쪽이 맞는 이야기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후자가 좀더 사실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전염병에 관한 의원 이야기는 제법 여럿 남아 전한다. 정조대의 문인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은 ‘예의홍익만전(例醫洪翼曼傳)’이란 전을 남겼다. 주인공 홍익만은 특별하게도 전염병 전문의인데 그의 인간됨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는 가슴 속에 경계를 두지 않아 성품이 툭 트였고 사람의 위급함을 보면 비록 평소 모르는 사이라도 오직 그 급한 처지를 구원하려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품이었기에 그는 임술년(1742, 영조18)과 계해년(1743, 영조19) 전염병이 돌았을 때 치료하여 살린 사람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홍익만이 어느 날 밤길을 가다가 길을 잃었는데 일흔쯤 된 노인이 나타나 자신이 이 고장 사람이라 소개했다. 그러고는 추운 날에 피곤하실 터이니 자신의 집으로 가서 박주(薄酒)일망정 한 잔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을 건넸다. 익만이 노인을 따라 한참을 갔더니 노인은 홀연 보이지 않고, 움집에 시신 네댓이 가로 세로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그를 인도했던 노인이었다. 그리고 노인이 말했던 것처럼 술 한 병이 시렁 위에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신 뒤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고 떠났다.

    이 이야기도 전염병이 돌던 상황을 배경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전염병으로 죽은 노인이 술을 미끼로 자신을 묻어줄 사람을 이끈다는 비합리적인 설정이지만, 전염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홍익만이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을 두려움 없이 묻어주었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홍익만이 민중을 위한 의원이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홍익만 역시 정통 의원 출신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홍국신(洪國藎)으로 숙종 때 비변사 서리였다. 당대의 세도가이던 허적(許積)의 명으로 문서를 기초하는데 글자를 한 자 잘못 쓰니 허적이 지적하여 꾸짖었다. 홍국신은 붓을 던지고 그렇게 글을 잘 지을 수 있다면 왜 서리가 되었겠냐고 대드니 허적이 어쩌지 못하고 용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홍국신은 원래 허적의 인간됨을 미워했던 것이다.

    홍익만은 홍국신의 아들이다. 서리 집안 출신인 것이다. 의원과 서리는 아예 계통이 다른 집안이다. 아마도 홍익만 역시 어떤 계기로 하여 의학을 익혔을 것이다. 그가 정통적 의원 집안 출신이었다면 이런 민중의로서의 의식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의학 부정한 정약용

    홍익만의 이야기에는 전염병을 직접 치료하는 부분이 없다. 하지만 다산의 경우라면 약간 다르다. 정약용은 이헌길(李獻吉)이란 사람을 다룬 ‘몽수전(蒙?傳)’이란 작품을 남기고 있다. 물론 의원으로 뛰어났던 인물이다. 이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하기로 하고 먼저 다산의 의학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다산은 그야말로 백과전서파라 의학에도 적지않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 대충 꼽아보면 ‘의설(醫說)’ ‘종두설(種痘說)’ ‘맥론(脈論)’ 등의 논문이 있고, ‘마과회통(麻科會通)’과 같은 천연두 치료법을 다룬 저술이 있다. 이들 중 상당한 부분은 한의학을 부정하고 있다. 한의원에 가면 손목의 맥을 살피는 진맥부터 하는데, 다산은 이 진맥을 부정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맥을 가지고 오장육부를 진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약간 인용해 보면 이렇다.

    “하늘이 사람을 낼 적에 어찌 반드시 오장과 육부로 하여금 그 모습을 손목 위에 환히 벌여놓게 하여 사람에게 이를 진맥하게 하겠는가?”

    ‘육기론(六氣論)’에서는 오행설까지 부정해버렸다. 이쯤 되면 한의학의 기초가 무너지지 않겠는가? 다산의 의학은 상당 부분 서양의학의 영향을 받고 있다. ‘종두설’과 ‘마과회통’은 제너(Edward Jenner)의 종두법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근시론’에서는 종래 한의학의 음양오행으로 근시 원시를 설명하던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안구의 평돌(平突)에 의해서 근시 원시가 결정된다고 밝히고 있다.

    초등학교 동창생 중에 한의사가 있다. 십 년 전에 몸이 좋지 않아 찾아갔더니 진맥을 한 뒤 약을 지어놓겠노라 하면서 앞으로 술 담배를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진하게 하다 보니 어느덧 늦은 오후다. 가야겠다고 하니 병원문을 닫는다. 같이 나가서 한잔 하잔다.

    “야, 너 나보고 술먹지 말랬잖아!”

    “의사하고 먹는 술은 괜찮아!”

    어쨌거나 그날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흠뻑 취했다. 그런데 이 친구 술자리에서 다산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실학자라서 대단한 줄 알지만 의학 쪽은 형편없이 무식한 사람이라고. 다산의 위의 이야기를 보면 그 친구가 화를 낸 이유를 알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몽수전’의 주인공 이헌길은 정종(定宗)의 후손이고, 이철환(李喆煥)의 제자이다. 이철환은 성호 이익의 손자뻘이다. 그러니 성호학파에 속한 인물이고, 다산과도 관계가 아주 없지 않다. 다산은 어렸을 적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이헌길의 치료로 천연두를 순하게 앓았다. 오른쪽 눈썹 위에 가볍게 마마 흔적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누어졌다. 다산은 자신이 10세 이전에 ‘저작’한 시문을 모아서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 했으니, 마마의 흔적으로 인한 것이다.

    ‘몽수전’에서 다산은 이헌길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으레 하는 말일 수 있지만 뒷날 그의 행적을 보면 빈말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생김새는 미남은 아니었던 듯 다산의 기억에 의하면 이헌길은 광대뼈가 튀어 나온 데다가 코주부였다고 한다.

    이헌길은 원래 의원 가문 출신이 아니다. 그는 남몰래 ‘두진방(杜疹方)’을 보고 깊이 연구한 바 있었다. 영조 51년(1775)에 일이 있어 서울에 갔더니,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천연두가 돌았던 것이다. 이헌길은 그들이 불쌍하였으나 상중이라 어찌할 수가 없어 묵묵히 돌아섰다. 상중이라면 이런 궂은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다 홀연 깨달았다.

    “나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을 가지고 있는데도 예법에 구애되어 모른 체하고 떠나간다는 것은 불인(不仁)한 것이다.”

    이 장면은 흡사 ‘마태오복음’의 한 부분과 같지 않은가?

    예수께서 다른 데로 가셔서 그곳 회당에 들어가셨다. 거기에 마침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어도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하고 넌지시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럴 때에 그 양을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그 불구자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다른 손과 같이 성해졌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예수를 없애버릴까 하고 모의하였다.(‘마태오복음’ 12장)

    어느 사회나 율법주의자들은 있는 법이다. 예(禮)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가, 사람이 예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헌길의 내부에 예수와 부처가 있었던 것이다. 어디 이헌길만 그러랴? 모든 사람의 속에는 예수와 부처가 있지 않은가? 찾지 않아서일 뿐이지.

    이헌길이 의술을 펼치자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열흘 만에 명성이 나서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문을 메우고 길을 메울 정도였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려들었는지 알아보면 이렇다.

    몽수가 문을 나가서 다른 집으로 가면 수많은 남녀가 앞뒤에서 옹호하였는데, 그 모여 가는 형상이 마치 벌레가 움직이는 것과 같았으므로 그가 가는 곳에는 뿌연 먼지가 하늘을 가리어, 사람들은 바라만 보고도 이몽수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니 유혹이 없을 수 없다. 정약용은 ‘하루는 못된 무리의 꾐으로 어느 궁벽한 곳에 가서 문을 잠그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돈을 받고 치료를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사방을 뒤져 그의 거처를 찾아내었다. 사태가 심각했다. “어떤 사람은 사나운 기색을 띠고 면전에서 욕을 하고 심한 자는 몽수를 때리려고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이 애써 말린 덕에 봉변을 면할 수 있었다. 이헌길은 사과를 하고 재빨리 처방을 알려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었음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돈이 부족해 죽는 사람들

    조선시대에도 국가가 만든 공식적인 의료기관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 질병을 이겨내기란 턱도 없었다. 민중은 의료혜택에서 거의 제외돼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을 보완한 것이 바로 민중의가 아닌가 한다.

    현대의 인간은 질병 치료술의 부족으로 죽는 것이 아니다. 지구 전체를 두고 생각한다면 오염된 물로 인해 죽는 숫자가 가장 많다고 한다. 제3세계의 국민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다면 사망률은 절반 이하로 떨어질 것이다. 서구사회에서는 몇 푼 하지 않는 값싼 백신이 부족해 죽는 사람이 허다하다. 무언가 잘못되어 있지 않은가?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확실한 의료기술의 혜택을 누구나 입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요즘 사람들은 의술의 부족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돈의 부족으로 죽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술은 누구를 위해 있어야 하는가? 나는 홍양호의 ‘조광일전’을 보면서 이 짤막한 전기(傳記)에서 제기한 문제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음을 본다.

    사족으로 몇 마디 더. TV 드라마 ‘허준’을 보고 나는 늘 궁금했다. 유의태의 집은 마치 현대의 병원처럼 묘사됐다. 병자들이 누워 있는 곳도 있고 진료를 하는 곳도 있다. 병부잡이라 해서 병자를 인도하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예쁜 간호원도 있었다. 약을 짓는 탕약실도 따로 있었다. 또 진료할 때 의원들의 복색도 평복과는 달라 가운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조선시대 산청(山淸)과 같은 오지 시골에서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또 서울의 혜민서를 마치 병원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은 PD의 상상력의 소산인가? 아니면 무슨 근거라도 있는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앞으로 찬찬히 따져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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