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청중의 힘이 음악사 바꿨다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도

  • 글: 김용환 한세대 교수·음악학 kimyh@hansei.ac.kr

    입력2003-01-22 1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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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빈)고전주의, 낭만주의, 20세기 음악 등 각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를 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들 용어는 일반 역사(중세·현대), 미술사(르네상스·바로크) 및 문학사(고전주의·낭만주의)에서 차용했으며, 시기적으로는 대략 중세(450~1450), 르네상스(15~16세기), 바로크(17세기 및 18세기 초), 고전주의(1780~1803 또는 1810), 낭만파(19세기)를 포함한다. 20세기 음악을 현대음악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용어와 그 시기는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것일 뿐이다. 현대 음악학은 기존의 시대 구분 및 용어가 각 시기의 음악적 특징 및 시대정신을 적절하게 대변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시기의 설정 역시 학자들마다 이견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자면 “20세기에 매우 다양한 음악적 경향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대표적 시대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면 이것은 19세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또한 18세기 음악이 ‘(빈)고전주의’로 집중되는 것 역시 당시의 실제 음악 상황을 무시한 결과라고 학자들은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미술사에서 차용한 ‘르네상스’와 ‘바로크’라는 용어 역시 음악사의 시대용어로 적합지 않다고 하면서 다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물론 이에 대한 전문적이고 상세한 논의는 이 글의 목적과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서양음악에 보다 진지한 관심을 가진 독자들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기존의 시대구분이 고착된 것으로 단정짓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언급해보았다.

    음악가 먹여 살린 궁정·교회·시청

    오늘날 우리는 입장권만 구입하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음악회장을 방문할 수 있다. 이러한 공공연주회는 서양음악사의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그 이전에는 어떤 기회에 음악을 들을 수 있었을까?



    18세기 중엽 이전의 절대주의 왕정시대에서 음악 행위는 일반적으로 세 기관에 의해 주도되었다. 궁중, 교회 그리고 시립악대가 바로 그것이다. 음악가는 이들 세 기관 중 하나에 소속된 ‘고용인’이었다. 이중에서 교회에 소속된 음악가는 궁중 또는 시립악대에 이중으로 소속되기도 하였다.

    궁중에 소속된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가 가장 높았으며, 궁중은 당시 음악생활의 구심점을 형성하며 음악문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궁중에서 개최되는 연주회는 극히 제한적이고 폐쇄적이었다. 이 연주회에 참가할 수 있는 청중은 사회적으로 그 지위를 인정받은 자 중에서 선택된 자들이었다. 일반 시민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연주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궁중에서 개최된 음악회에서 군주나 귀족들은 아마추어 음악가로서 자신의 연주기량을 발휘하였다. 청중은 그 음악회에 참석한 연주자들 자신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궁중의 대외적 행사를 위한 연주회는 궁중에 소속된 음악가들의 작곡과 연주에 의해 수행되었다. 각 궁중의 통치자는 대부분 관현악단과 가극단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것을 자신의 위세에 대한 척도로 과시하곤 했다. 그들은 자신에 소속된 음악가에게 작곡을 지시하고 프로그램을 구성하게 했다. 고용인으로서 작곡가나 연주가는 궁정 통치자의 주문에 따라 작곡하고 연주해야만 했다. 예술인의 창작에 대한 자유의지는 통용되지 않았다.

    교회에 소속된 음악가들 역시 통제를 받았다. 교회를 시청에서 주관하였기 때문에 시청의 통제를 받은 것이다. 칸토르(Kantor·교회 부속 합창대의 지휘자)는 시 소속 교회의 모든 예배를 위한 음악을 책임지며 정기적으로 칸타타, 수난곡 등을 작곡해야만 했다. 바하와 텔레만이 그러했다.

    사회적 지휘가 가장 낮았던 시청 소속 음악가들은 시의 모든 행사에 동원되었다. 예를 들어 시의회가 폐회될 때나 하루중 일정 시간을 알리기 위해 시청이나 성의 탑에서 나팔을 불었으며, 관례적인 축제나 결혼식 또는 장례식 등을 위해 작곡과 연주를 수행하였다.

    이렇듯 모든 작곡 및 연주 행위가 적어도 18세기 중엽까지는 어느 특정 기관에 의해 좌우되었다. 궁정, 교회, 시청은 공공의 음악생활을 담당하는 주체였으며 칸토르, 시의 음악감독 또는 궁중의 악장이 무엇을 작곡하고 무엇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었다. 전문음악인들은 이와 같은 직업 영역을 떠나서는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음악인들과 음악은 이러한 사회구조에서 나름대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청중의 힘이 음악사 바꿨다

    19세기를 지나면서 마침내 음악은 ‘정신적 산물’의 차원으로 고양됐다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나 시 당국의 대표적인 행사 외에 좀더 규모가 큰 음악회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서히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는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강화되기 시작한 시민들(중산층)의 정치적·사회적 지위와 그 축을 같이한다. 중산층 계급의 사회·정치적 지위 고양은 경제적·이데올로기적 변화와 이에 따른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문화적 생활을 향유하려는 중산층들의 욕구는 갈수록 커졌으며 그들은 감성적 생활과 정서를 폭넓게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이 가장 적절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시민들의 자의식 변화는 17세기에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번지기 시작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은 그후 프랑스로 번졌으며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독일로 확대되었다. 계몽주의 사상은 문화 영역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교육 및 법률 등 모든 부문에 침투하였다. 이에 반비례하여 교회와 궁정의 영향력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변혁기에 음악이 더는 교회나 궁중이라는 특정 기관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고 영향력이 강해진 시민들은 문화적 향수를 위하여 열심히 음악을 연주하였고, 연주회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 변화를 가능케 했던 것은 첫째, 독일어권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이다. ‘콜레기움 무지쿰’은 처음에는 폐쇄적인 영역에서 개최되었으나 곧바로 일반 시민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 공공연주회로 발전했다. 두번째서는 사적인 ‘음악연주모임(Musikkr nze, Musikgesellschaft)’을 들 수 있다. 이 그룹 역시 처음에는 특정인들만 대상으로 하였으나, 후에는 ‘콜레기움 무지쿰’과 마찬가지로 수용 영역이 확대되어 공공연주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 두 연주단체는 수십년의 변화과정을 거쳐 음악을 사랑하는 일반 시민을 위한 공공연주회로 발전하며, ‘근대적인 연주회’의 초기 형태로 그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18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자리잡은 공공연주회는 19세기에 들어 더욱 활성화된다. 공공연주회에 참석한 청중의 음악적 취향은 매우 다양하였다. 청중은 입장권을 구매한 대가로 자신들이 선호하는 음악을 듣고자 했다. 각 연주회를 개최하는 비르투오소 또는 중개업자들은 이러한 청중의 다양한 취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케스트라 단원, 솔로주자의 개런티, 연주회장 대관료, 선전비, 세금 등 연주회에 드는 모든 경비를 스스로 부담해야 했으며, 따라서 연주회의 흥행 여부가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연주회를 개최하는 비르투오소는 각 작품을 탁월하게 연주해야 함은 물론 짧고 많은 곡들로 변화를 주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해야만 했다. 이러한 프로그램 구성은 장르별 변화는 물론이고 음향적인 변화도 고려해야 했다. 즉 기악음악과 성악음악을 교대로 선보여야 했다는 말이다.

    물론 18세기말부터는 일부 연주회 프로그램 구성에서 장르와 양식을 통일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예외에 해당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연주회는 청중의 다양한 취향을 염두에 두고 프로그램을 구성하였다. 이와 같은 조건들을 충족시키다 보니까 연주회 프로그램의 양이 지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방대해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당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던 페르디난트 리즈(Ferdinand Ries·1784∼1838)는 1837년 ‘신음악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런던의 한 음악회에서 36곡의 작품이 연주되었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음악회는 통상적으로 1부 및 2부로 구분되고, 각 부에서는 교향곡, 협주곡, 아리아, 듀엣, 즉흥연주, 독주곡 등이 반복적으로 연주되었다. 파리나 런던에서 개최되는 연주회에서는 수많은 비르투오소들이 동시에 출연하여 마치 올림픽 경기를 방불케 하는 상황도 연출되었다. 연주회 프로그램이 이처럼 방대하다 보니 연주회 시간도 보통 3∼4시간에 이르렀다. 청중은 지금의 연주회에서처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술 마시고 담배 피며 담소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곡이 연주되는 순서가 오면 자리로 돌아가 음악을 감상하곤 하였다.

    프로그램으로 선택되는 작품은 대부분 새롭게 작곡된 것이었다. 청중은 이미 알려진 곡보다 새로운 곡을 선호하였다. 새로운 작품이 많을 경우에는 작품이 출간되기 전에 필사본 상태에서 초연되었다. 당시 청중은 그 작품이 인쇄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새로운 작품을 맛보려는 욕구가 매우 강렬했던 것이다.

    그런데 프로그램 구성에서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 임의성이다. 즉 청중의 다양한 취향을 고려하여 한 음악회에서 가능한 한 많은 작곡가의 작품을 선보이기 위하여 -오늘날의 연주 관행처럼- 한 작품의 전 악장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한 악장씩 연주하거나 또는 각 악장을 임의로 짜맞추어 구성하는 관행이 그것이다. 예를 들자면, 당대의 저명 피아니스트 크라머(J. B. Cramer·1771~1858)는 런던에서 개최된 연주회에서 자신의 다단조 피아노협주곡 1·2악장을 연주한 후에 모차르트 작품 중 같은 조성의 피아노협주곡(KV. 491) 3악장을 연이어 연주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프로그램을 임의로 짜맞추는 것은 당시의 연주 관습으로 볼 때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드문 경우도 물론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청중의 다양한 욕구를 그렇게 함으로써 충족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이처럼 다양하고 임의로 구성된 음악회 프로그램은 19세기 중엽 이후 변화를 겪게 된다. 오늘날 음악회 프로그램의 일반적 유형인 서곡-기악협주곡-(휴식)-교향곡이라는 틀이 마련된 것이다. 19세기 전반기의 연주회 프로그램이 다양한 장르의 각양각색의 작품을 선보이는 ‘만물상적 프로그램’인 반면 19세기 중엽 이후는 교향곡이 프로그램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그런데 교향곡은 베토벤 이후 그리고 특히 19세기 중엽 이후 작품의 길이와 규모가 점점 방대해지고, 이에 따라 음악회에서 연주되는 작품 수는 상대적으로 감소되면서 전체 음악회 시간도 줄어들게 된다. 즉 19세기 중엽 이전의 연주회가 3~4시간이 소요되었으나 20세기 들어서면서 음악회 시간이 1시간 반, 길어야 2시간을 넘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청중의 집중력 한계에서 비롯된다. 즉 교향곡이 점점 방대해지면서 작품의 내적 구성 역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피아노 중독’과 순회 비르투오소들

    베토벤 이후 등장하는 주요 작곡가들의 인생사를 좇아가는 독자들은 그 이전과는 판이하게 변화된 작곡가들의 새로운 직업 영역을 경험하게 된다. 즉 18세기까지는 ‘궁정음악가’라는 지위가 음악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음악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다양한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케루비니와 스폰티니는 각각 콘서바토리의 원장과 시의 음악감독직을 역임하며 공무원으로 활동하였고, 로시니는 작곡료만으로도 부유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최초의 작곡가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파가니니, 쇼팽, 클라라 슈만 및 리스트 같은 ‘순회하는 비르투오소’들을 만나게 된다.

    음악생활은 공공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도 급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예약 연주회가 여러 도시에서 조직적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의 중산층 가정에 피아노가 보급되면서 너도나도 피아노를 배우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피아노 중독증’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이웃들은 ‘가정에서 피아노를 칠 때는 반드시 창문을 닫도록’하는 규정을 시당국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오페라하우스가 중소도시에도 건립되었고, 노래를 좋아하는 시민들은 합창단에 가입하여 음악생활을 즐겼다. 또 그들은 피아노를 배우고 모여서 실내악을 연주하였다. 이들을 고객으로 하는 음악출판업이 활기를 띠었고, 작곡가들은 아마추어 음악인들을 겨냥하여 가볍고 흥미로운 음악이나 이미 잘 알려진 오페라 아리아 혹은 민요를 주제로 한 변주곡이나 편곡을 만들었다.

    이 같은 발전상은 작곡가의 의식에 변화를 주었다. 그들의 공손한 (때로는 비굴한) 자세는 사라졌으며 몇몇 작곡가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윤택해졌다. 로시니, 베르디, 바그너와 같은 오페라 작곡가만 경제적 부를 축적한 것이 아니라 기악음악 작곡가들 역시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브람스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여기에 시민적 풍요로움이 있다”고 하면서 자필 악보와 출판 악보로 가득 채워진 서재를 보여주곤 하였다.

    이렇게 변화된 경제적 여건만이 음악가들에 대한 이미지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음악미학 역시 여기에 일조를 했다. 보편적 예술철학의 한 부분으로서의 음악미학은 예술적 행위를 하나의 정신적 행위로 소개하고 예술작품을 정신적 산물로 주의를 기울이게 함으로써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렸던 것이다. 바야흐로 예술가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계자로서 그 지위가 향상된 것이다. 음악가는 궁정작곡가의 지위에서 인류의 천재로, ‘음표제작’ 행위는 ‘예술작품’으로 자리바꿈한 것이다.

    청중의 힘이 음악사 바꿨다

    베르디 오페라 ‘오델로’를 공연중인 영국 로열오페라단

    서양음악이 취미라는 사람들 대부분은 처음 교향곡을 접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다. 현악주자들이 일사불란하게 활을 구사하는 시각적 효과와 음악회장 전체를 꽉 채우는 음향적 풍부함으로 인한 청각적 효과가 감동을 선사했기 때문에 교향곡에 끌렸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성악 분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무대장면, 감동적인 아리아 등에 이끌려 오페라를 좋아하게 된다.

    이러한 단계를 거듭하다가 사람들은 서서히 규모가 작은 장르에 눈을 돌리게 된다. 마치 지성인들이 담소하는 것과 같은 현악사중주 등 실내악의 묘미에 빠지고, 커피 향과 와인 맛을 음미하듯 리트와 서정적 성격소품 같은 은밀하고 내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음악에 심취하곤 한다. 이런 각각의 장르들은 서양음악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름대로의 배경을 가지고 탄생하였고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오페라와 교향곡 및 예술가곡(Lied)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오페라는 16세기말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고대 그리스의 극음악을 연구하던 모임인 카메라타에서 우연하게 만들어진 장르이며, 이후 17세기말 로마의 ‘문학 아카데미’에서 오페라 (대본)개혁이 시도된다. 이 작업은 18세기 들어 제노에 의해 계승되고 메타스타시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 1720, 1730년경에 확립된 이 유형을 음악사에서는 ‘메타스타시오식 오페라’라 일컫는다.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이 1730년에서 1780년까지의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진지한 오페라 또는 정가극)’ 역사를 결정지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은 예외없이 3막으로 되어 있으며, 각 막은 10 내지 15 장면으로 구성되었다. 극의 소재는 거의 역사적·신화적 이야기에서 구해왔다. 등장인물은 대부분 6명이었다. 두 명의 남녀 주인공(프리마 우오모 & 프리마 돈나), 두 명의 남녀 조연 그리고 또 한 명의 테너와 조연자가 그들이다. 이들은 정형화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주로 도량이 넓은 군주, 그들의 연인, 동료, 조언자 그리고 하인들로 등장한다. 작품의 극적 갈등은 이성과 욕망, 의무와 사랑의 대립으로 만들어진다. 줄거리가 진행되는 동안 전원이나 전장, 엄숙한 의식장면 등 갖가지 장면이 도입되고,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곤 대부분 ‘행복한 종말(lieto fine)’을 갖는다.

    줄거리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교체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극의 줄거리는 대화형식의 레치타티보에 의해 전개되고, 등장인물들은 극적 독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아를 통해 자신들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때에 따라서는 이중창이 나타나곤 하지만, 더 큰 편성의 중창은 거의 없으며, 아주 드물게 합창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진지한 내용의 ‘오페라 세리아’와 하나의 대칭축을 이루고 있던 장르로서 코믹한 내용의 ‘오페라 부파(Opera buffa·희가극)’가 있다. 오페라 세리아가 영웅적(귀족적)이거나 신화적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오페라 부파는 현실적이면서 일상적이고 서민적인 내용을 매우 익살스럽게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장르는 상호간에 대조적이면서 보충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장르라면, 레치타티보 대신 연극식 대화가 나오는 징슈필(Singspiel)은 독일을 대표하는 장르다. 본래 극의 진행 도중에 서커스와 같은 해프닝도 벌어지는 등 하층민의 오락 수단이었던 징슈필을 예술적 장르로 격상시킨 것은 1782년 ‘후궁으로부터의 유괴’를 발표한 모차르트의 공적이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또는 최초의 독일 낭만오페라로 평가되는 베버의 ‘마탄의 사수’가 바로 징슈필 장르에 속하는 작품이다.

    독일 오페라는 이후 19세기 후반 들어 바그너에 의해 음악극이 창출되면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으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독일의 음악극은 텍스트를 매우 중시하여 작곡가가 직접 작성한 후 거기에 음악을 붙이는 작업과정을 거친다. 이에 반해 이탈리아식 오페라는 텍스트보다 음악에 더 치중하는 특징을 지닌다.

    그런데 18∼19세기 동안 거의 전 유럽의 무대를 석권한 것은 이탈리아식 오페라였다. 19세기 전반기에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 등의 오페라가 주옥과 같은 아리아를 세상에 선보이면서 수많은 청중을 감동시켰는데 그 전통은 19세기 후반기에 베르디에 의해 계승되고 푸치니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마지막 월계관을 장식한다.

    한편, 프랑스는 이미 17세기부터 독자적인 오페라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19세기초에는 ‘그랑오페라’라는 새로운 유형의 오페라를 탄생시킨다. ‘그랜드 오페라’의 개념은 프랑스에서는 본래 ‘일괄 작곡된 오페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7월 왕정(1830∼48) 기간에 유형화된다. 즉 심각하고 슬픈 소재, 화려하고 극적인 장면, 이를 위해 음악적 수단을 동원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랜드 오페라’에서는 발레 장면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물론 오페라에 무용을 삽입하는 것이 프랑스에서는 17세기 이래 관례가 된 것이었고 ‘코믹 오페라’와 같은 다른 장르에서도 무용이 삽입되어 있지만, ‘그랜드 오페라’에서는 특히 그 역할이 중요하다. 파리에서 활동한 많은 외국 작곡가들(로시니, 베르디, 바그너)도 파리 특유의 관습에 따라 작품에 발레를 삽입할 수밖에 없었다.

    ‘오페라 서곡’에서 비롯된 교향곡

    근대적 의미의 교향곡, 즉 길이가 길고 여러 악장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작품으로서의 교향곡은 17세기말에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성행한 ‘오페라 서곡’에서 비롯되었다. ‘빠름-느림-빠름’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서곡은 대체적으로 뒤이어 진행되는 오페라와 음악적·내용적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에 연주회장에서 독립된 악곡으로 연주될 수 있었다. 18세기 전반기에 비발디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들은 이러한 서곡을 오페라하우스가 아닌 음악회장에서 연주하곤 하였다. 이 ‘오페라 서곡’은 대략 1720년부터 1740년까지 나폴리, 볼로냐, 빈에서 활동하는 제1세대 작곡가를 중심으로 발전한다. 나폴리의 페르골레시가 그중 대표적이다.

    1740년부터 1760년까지의 제2세대 작곡가들은 ‘오페라 서곡’의 형식을 더욱 확장하고 정형화한다. 한편, 이와 병행하여 근대적 교향곡의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유형이 이탈리아 작곡가 삼마르티니(1700∼75)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1730년경에 창안된 ‘연주회용 교향곡’이 바로 그것이다. ‘연주회용 교향곡’은 처음부터 독자적인 연주회를 위해 작곡되었다.

    18세기말 하이든은 교향곡의 고전적 모델을 완성시킨다. 특히 말년에 영국 무대를 위해 작곡한 12편의 교향곡은 느린 템포의 서주와 4악장 구성을 가지며 교향곡의 형식을 정형화하였다.

    이후 베토벤이 등장하면서 교향곡의 혁명적 변화가 이루어진다. 베토벤은 9편의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선보였다. 9번 교향곡에서는 합창까지 등장시켰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은 모두 베토벤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리스트와 바그너는 교향곡이 베토벤에 의해 장르로서 수명을 다했으며, 교향시와 음악극을 통해서 대치된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브람스와 브루크너, 말러,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은 여전히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제2교향곡 세대를 대변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작곡된 교향곡은 베토벤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베토벤이라는 항성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맴도는 행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두 베토벤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청중의 힘이 음악사 바꿨다

    바로크 시대 초기 오페라의 연주 모습을 그린 그림

    유럽에서 가곡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세기 중엽의 일이다. 특히 헤르더(Herder) 이후 각 민족의 민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 시기는 사상적으로 계몽주의가 득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트에 대한 이상적 형태는 민요가 되었다. 민요가 계몽주의 음악관, 즉 과장되고 복잡하며 인위적이어서는 안 되고 보통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트 작곡가는 시(텍스트)가 잘 전달되도록 간단하고 단순한 반주를 붙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반주가 너무 요란해 가사 전달을 방해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작곡가의 임무는 ‘단순함’과 ‘명료성’에 걸맞은 시를 선정하고, 시인의 문체를 따르면서 시의 정서와 운율적·리듬적 구조를 노래 부를 수 있도록 선율적으로 고양하여 널리 보급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언어와 음악의 관계에서 언어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리트의 형식도 동일한 선율이 1절, 2절 등으로 반복되는 유절형식을 선호하였다. 가곡집이 출판될 때도 시의 작가가 부각되었고, 거기에 곡을 붙인 작곡가의 이름은 아주 작은 글씨로 표기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8세기말 그리고 19세기초에 이르러 서서히 변화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여기에는 낭만주의 음악관의 태동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낭만주의자들은 기악음악을 최고의 예술로 찬미했는데 기악음악만이 ‘모호함’을 가지면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예감’을 갖게 해주고, ‘무한한 판타지’를 열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텍스트가 없어 그 정서를 전달함하는데 불완전하다고 취급되었던 기악음악이 이제는 그 모호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최고의 예술로 찬미된 것이다.

    이러한 음악관의 변화는 리트 작곡에도 영향을 끼친다. ‘낭만적 리트’의 작곡가는 시의 언어음을 단지 음악적으로 뒷받침하는 임무를 초월하여 시를 자유롭게 해석하는 위치에 선 것이다. 작곡가는 텍스트에 단순히 선율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읽고 난 후 거기에서 얻어진 느낌(혹은 영감)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간다. 작곡가는 언어적 텍스트가 미처 ‘형용할 수 없는 것’을 음악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낭만적 예술가곡의 문을 두드린 작곡가가 바로 슈베르트다. 슈베르트는 불과 17세(1814)의 나이에 작곡한 최초의 작품, ‘실 잣는 그레첸(Gretchen am Spinnrade)’ 그리고 그 이듬해에 작곡한 ‘마왕(Erlk nig)’에서, 각 텍스트가 가지는 시적 현상과 행간에 담긴 분위기를 피아노 파트의 음악을 통해 표현하였다.

    그러니까 그의 가곡에서의 피아노 파트는 단순히 시의 운율에 맞추어 선율적·화성적 뒷받침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성악 파트와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음악적 분위기(혹은 정조)를 연출한다는 말이다. 이때 피아노 파트는 텍스트가 지닌 표현과 분위기를 개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암시해내고, 전주·간주 그리고 후주를 이용하여 슈베르트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시적·상징적 암시를 펼쳐 보인다.

    이 때문에 슈베르트의 리트는 그 이전의 리트와는 그 이념이나 전개방식 등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새로운 용어의 등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용어가 - 뒷날 음악학자들이 명명한 - ‘예술가곡(Kunstlied)’이며, ‘실 잣는 그레첸’은 음악사상 최초의 ‘예술가곡’ 또는 ‘낭만적 가곡’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슈베르트의 업적은 슈만에 의해 이어진다. 그리고 볼프, 브람스,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은 19세기 후반기의 독일 리트 역사를 찬란하게 빛낸다. 물론 작곡가들마다 예술가곡을 형상하는 방법이 다르고 텍스트와 음악의 우위 여부도 작곡가마다 달랐지만 각 성부의 예술성은 견지되었다.

    전 유럽의 음악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하나의 공통 음악언어가 존재해왔다. 이 언어를 통해서 작곡가들은 청중 및 다른 나라의 음악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8세기초에는 비발디의 음악언어로, 16세기 후반에는 오를란도 디 라소의 음악언어로 교류가 가능했다. 그리고 19세기 전반기는 로시니의 음악언어가 판을 쳤으며, 때때로 베토벤의 음악언어가 일정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서양음악사에는 새로운 조류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민족주의 음악이다. 각 민족의 음악적 특성이 당시의 후기 낭만주의적 음악어법에 첨가된 것이다.

    민족주의 작곡가들의 두드러진 면모는 자기 나라의 민요 선율과 민속춤 그리고 민속춤의 리듬을 인용하거나 모방함으로써 독특하고 색다른 정취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이 특히 두드러진 지역은 -그동안 음악사 발전에서 상대적으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던- 헝가리, 체코와 같은 동유럽 국가, 러시아 그리고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나라들이다. 또한 스페인, 영국, 미국에서도 민족의식이 고취된 일부 작곡가들이 나름대로의 민족음악적 이디엄을 자신들의 작품에 반영하였다. 민족주의 음악 작곡가들은 특히 자국어의 언어적 특성을 고려한 음악적 진행과 짜임새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민족주의적 작곡가로는 스웨덴의 스벤센, 노르웨이의 그리그,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덴마크의 가데와 닐센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의 음악은 낭만주의적 화성어법에 각 민족적 색채감을 접합시켜 북유럽 특유의 서정적이면서도 무겁고 힘찬 음악을 연출해내고 있다. 특히 그리그, 시벨리우스 그리고 닐센은 20세기를 전후하여 북유럽의 민족주의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곡가들로 손꼽을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훗날 ‘러시아 5인조’라고 불리는 젊은 아마추어 작곡가 그룹이 등장하는데, 발라키레프를 정점으로 한 무소르그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 큐이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귀족 출신으로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창작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림스키코르사코프만이 훗날 직업을 바꾸어 전문음악인으로 직업을 바꾸어 활동하였다.

    한편, 체코에서는 스메타나·드보르자크·야나체크, 헝가리에서는 코다이와 바르토크, 스페인에서는 알베니스·그라나도스·파야가 탁월한 민족적 작품을 양산하면서 유럽음악을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각각 본 윌리엄스와 찰스 아이브스가 매우 독창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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