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삶의 당의정 혹은 카타르시스

영혼으로 만나는 세상

  • 글: 김학민 오페라·뮤지컬 연출가 / 음악평론가 hakminkk@korea.com

    입력2003-01-22 1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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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당의정 혹은 카타르시스

    극단 ‘신시’가 공연한 ‘키스 미 케이트’

    뮤지컬을 감상하는 것은 신나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뮤지컬의 구조와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공연의 생생한 현장과 무대 뒤에 얽혀 있는 온갖 이야기들, 어느 작품이 언제 무슨 상을 받았고, 어디 가면 무슨 공연을 볼 수 있고, 어느 공연에 누가 나와서 좋았느니 나빴느니 하는 이야기도 필요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뮤지컬의 모든 것을 손금 보듯 훤히 꿰뚫고 있어야만 뮤지컬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뮤지컬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히 극장에 찾아가 직접 뮤지컬을 보는 것일 게다. 그러한 이유로 이 글에서는 세세한 설명들 대신 뮤지컬 작품들 속으로 들어가보고자 한다. 역사에 남은 공전의 히트작들이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만으로도 독자들이 재미있게 뮤지컬을 즐길 수 있는 기초공사는 충분하리라 믿는다.

    북 뮤지컬 : 탄탄한 구성과 극적 재미

    보드빌이나 벌레스크, 레뷔, 뮤지컬 코미디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초기 쇼 뮤지컬들은 아예 줄거리 없이 버라이어티쇼로 진행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줄거리가 있다 해도 화려한 춤과 노래를 엮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러한 초기 뮤지컬을 벗어나 대본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정하기 시작한 이들이 리처드 로저스(작곡가)와 해머스타인 2세(작사가). 스타 배우들의 춤과 노래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초기의 쇼 뮤지컬에서 진일보한 이러한 양식을 흔히 북 뮤지컬이라 일컫는다. 한마디로 ‘북(book)’ 즉 대본을 중시한 뮤지컬이라는 뜻.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이 남긴 뮤지컬의 고전 ‘오클라호마’(1943)는 북 뮤지컬의 본격적인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작품이다. ‘오클라호마’에서 첫 곡으로 나오는 ‘오 아름다운 이 아침(Oh, what a beautiful morning)’은 노래가 그 자체로 부각되지 않고 인물의 성격과 극의 상황을 부각시키는 데 사용한 좋은 예다. 대개 뮤지컬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코러스로 시작하지만,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은 일부러 시골 전원의 한가한 분위기에 적합하도록 조용한 솔로곡을 택했다.



    노래 없이 춤만 추는 장면 또한 북 뮤지컬의 면모를 제대로 발휘한다. 1막 마지막에 삽입된 춤 장면인 ‘로리의 결심’은 여주인공 로리의 악몽을 묘사한다. 꿈의 내용은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접근하는 근육질의 남자 주드와 애인 컬리가 서로 결투를 벌이다가, 결국 주드가 컬리를 죽이고 로리를 댄스파티로 데려간다는 것. 안무가 아그네스 드 미으는 발레를 통해 여주인공의 두려움과 근육질 사나이 주드의 위협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드림 발레’의 전형을 확립해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 장면이 이처럼 강렬한 느낌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의 전체 구조 속에서 아주 적절한 극적 긴장과 사실적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탄탄한 구성이야말로 이 작품이 북 뮤지컬의 신호탄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오클라호마’ 이후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은 ‘왕과 나’(1951) ‘회전목마’(1945) ‘남태평양’(1949) ‘플라워 드럼 송’(1958) ‘사운드 오브 뮤직’(1959) 등 일련의 고전 뮤지컬들을 통해 북 뮤지컬의 전통을 확립했고,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전통에 따라 뮤지컬들을 창조해냈다. 레웨와 러너의 ‘브리가돈’(1947)과 ‘마이 페어 레이디’(1956), 콜 포터의 ‘키스 미 케이트’(1948), 프랭크 뢰서의 ‘아가씨와 건달들’(1950), 복과 하닉의 ‘지붕 위의 바이올린’(1964) 등은 제각기 다루고 있는 내용과 분위기, 주제는 다르지만, 대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노래와 춤을 극 안에 통합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같은 노선을 걷고 있다.

    북 뮤지컬은 대본의 구성뿐 아니라 내용도 중시했다. 예전의 뮤지컬들이 우아한 귀족 얘기나 저질 코미디로 만들어진 데 비해, 북 뮤지컬은 소박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실적 소재를 다루었다. 이것은 곧 북 뮤지컬이 갖고 있는 ‘진지함’이라는 특징으로 연결된다. 북 뮤지컬의 대표작들은 삶의 소박한 진실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것을 가사와 음악, 인물, 상황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뮤지컬의 임무라 생각한 작품들이다.

    삶의 진실과 사랑의 진정성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는 특징 때문에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진 북 뮤지컬의 고전들, 언뜻 구식으로 보이는 작품들이 오늘날 브로드웨이에서 끊임없이 리바이벌되고 있다. ‘오클라호마’의 경우 1991년 런던 로열 내셔널 극장에서, 2002년 3월부터 브로드웨이 51번가 거슈윈 극장에서 리바이벌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00년 3월 영국 팔라디엄 극장에서 리바이벌된 ‘왕과 나’는 ‘캣츠’에서 여주인공 그루자벨라 역으로 ‘메모리’를 불러 일약 스타가 된 엘레인 페이지를 기용해 대단한 인기를 모으다가 2002년 1월에 영국 투어에 들어갔다.

    2002년 9월에 브로드웨이 버지니아 극장에서 오픈한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의 ‘플라워 드럼 송’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지는 중국인 교포 1세와 그곳에서 태어나 미국화된 2세 사이의 세대간 갈등을 그리고 있다. ‘근대화를 통해 동양문화가 겪는 갈등’이라는 주제의식은 스테판 손하임의 ‘태평양 서곡’(1976), 쇤버그의 ‘미스 사이공’(1991)으로 이어진다.

    북 뮤지컬의 전통은 이후 다른 뮤지컬 장르들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독특한 방식으로 춤을 강조하는 댄스 뮤지컬이나 줄거리 대신 전하는 내용을 강조하는 컨셉트 뮤지컬, 줄거리는 있지만 이를 노래 없이 춤이나 해프닝만으로 전하는 비언어 뮤지컬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댄스 뮤지컬 : 화려한 춤과 노래의 향연

    삶의 당의정 혹은 카타르시스

    ‘토요일 밤의 열기’(위)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댄스 뮤지컬은 말 그대로 ‘춤’이라는 요소를 강조한 뮤지컬이다. 사실 어느 뮤지컬이건 춤은 노래와 더불어 중요하게 사용하는 요소지만, 그 춤이 작품 안에서 사용되는 ‘방식’은 참으로 다양하다.

    오래 전에 유행하던 각종 쇼 뮤지컬들은 댄스 뮤지컬의 초기 예다. 이 중 보드빌은 곡예와 마술 등을 포함해 어린이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가족 오락극이고, 벌레스크는 스트립쇼와 같은 여자 무희의 선정적인 춤과 정치 풍자를 강조한 성인극이다. 엑스트라바간자는 벌레스크의 수준을 높인 점잖은 성인극이고, 레뷔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합쳐놓은 가장 고급스러운 형태로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하나의 테마로 묶어 놓은 고상한 쇼 뮤지컬이다.

    비록 형태와 성격은 다양하지만 이들 쇼 뮤지컬 작품들의 공통점은 코러스와 스타 배우가 노래와 함께 선보이는 댄스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레뷔 공연을 영화화한 ‘지글펠트 폴리스’나 뮤지컬 영화 ‘집시’의 보드빌과 벌레스크 장면은 당시 쇼 뮤지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다 할 줄거리 대신 재미있고 현란한 볼거리에 치중했던 초기 쇼 뮤지컬의 전통은 아직도 많은 뮤지컬 작품에 그대로 남아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캣츠’(1981)에서는, 다시 태어나 또 한번의 삶을 살 기회를 얻으려고 모여든 고양이들의 잔치를 배경으로 끊임없이 고양이들의 춤과 노래가 이어진다. 역시 웨버의 작품인 ‘별빛 특급열차’(1987)에서도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헬멧을 쓴 배우들이 열차를 의인화하면서 신나는 노래와 춤을 선사한다. 존 트라볼타와 올리비아 뉴튼존이 만든 영화로 더 유명한 ‘토요일 밤의 열기’(1999), 엘비스 프레슬리 등이 유행시켰던 로큰롤 노래들을 춤으로 엮어 만든 ‘스모키 조스 카페’(1995), 전설적 재즈 안무가 밥 파시의 무용 장면들만 모아 만든 ‘파시’(1999), 1933년의 뮤지컬 영화를 가지고 고어 챔피언이 안무·연출한 탭댄스 뮤지컬 ‘42번가’(1980) 등이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아일랜드의 전통 리듬에 맞추어 집단 댄스를 보여주는 ‘리버 댄스’(1996)는 아예 노래를 없애고 오로지 사회자의 멘트를 통해 일련의 대형 춤들을 엮어 만들었다.

    이러한 작품에서 줄거리나 인물의 성격, 상황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적당한 줄거리의 흐름 속에서 춤과 노래가 얼마나 신나게 펼쳐지는가 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뮤지컬들을 일컬어 과거 쇼 뮤지컬의 전통을 따라 ‘뮤지컬 레뷔’ 혹은 ‘엑스트라바간자 뮤지컬’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식적이고 오락적인 쇼 뮤지컬이나 엑스트라바간자 뮤지컬과는 달리, 춤이 줄거리를 전개시키고 인물의 성격을 만들어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57)는 이러한 본격적인 댄스 뮤지컬의 드문 예다. 여기서 춤은 말이나 노래를 대신해서 줄거리를 전개하고 등장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표현하는 아주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으로 떠오른다.

    주목할 것은 이 작품이 사실적 장면을 양식화된 춤동작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결투 장면이 그 좋은 예다. 춤을 통해 표현한다고 해서 사실성이 저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표현 강도가 엄청나게 증폭된다. 이것이야말로 댄스 뮤지컬의 매력이다. 만일 여기에 노래와 오케스트라 반주가 가세할 경우 그 감동은 더욱 더 커질 것이다.

    이처럼 매력적인 댄스 뮤지컬을 처음 만든 사람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연출 겸 안무를 맡았던 전설적인 안무가 제롬 로빈스다. 이전까지 뮤지컬에서 안무가의 역할은 재미있는 춤 장면을 몇 개 만드는 정도의 아주 부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제롬 로빈스는 안무뿐 아니라 연출까지 맡음으로써 춤이 차지하는 비중은 물론 인물의 성격 등 작품 전체를 고려해야 하는 커다란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시작된 이른바 ‘연출 겸 안무가’의 개념은 이후 댄스 뮤지컬을 주도한 고어 챔피언(42번가), 보브 파시(캬바레 영화본, 시카고, 영화 올 댓 재즈), 마이클 베네(코러스 라인) 등을 통해 이어졌다. 이들의 활약으로 춤은 노래와 대사, 연기, 줄거리 등 뮤지컬의 모든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심축의 개념으로 부각됐다.

    컨셉트 뮤지컬 : 진지한 고민과 사색이 필요하다면

    삶의 당의정 혹은 카타르시스

    2000년 국내 초연된 컨셉트 뮤지컬의 대표작 ‘시카고’

    컨셉트 뮤지컬은 말 그대로 작품의 컨셉트를 중시하는 뮤지컬이다. 컨셉트란 작품을 통해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 다시 말해 주제나 메시지 등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세대간의 갈등이라든지 섹스나 마약 등에 의한 도덕적 위기, 서양문명에 대한 동양의 문화적 충격,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 등 심각하고 무거운 문제들을 작품을 통해 부각시키려 한 뮤지컬을 가리켜 컨셉트 뮤지컬이라 부른다.

    북 뮤지컬에서는 줄거리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관객은 줄거리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면서 극 속에 몰입하게 되고, 극장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주인공과 희로애락을 함께한다. 그러나 컨셉트 뮤지컬은 관객을 극에 빠져들게 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은 지금 무대 위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이 실제가 아니라 연극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지금 작품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관객이 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온 후에도 이제까지 목격한 극이 나타내려 한 바가 무엇이었는지 곱씹도록 하는 것이 컨셉트 뮤지컬의 의도다.

    대개 뮤지컬에는 멋진 주인공들이 나와 애절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나누며 중간에 펼쳐지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는다는 구조가 공식과도 같았다. 가슴 뭉클한 감동과 몰입의 근저에는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다’는 식의 낙관주의가 깔려 있다. 관객 또한 잠시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현실을 잊고 위안을 느끼기 위해 극장을 찾는 것이고, 대개의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은 이러한 관객의 ‘회피주의 심리’에 충실하다.

    컨셉트 뮤지컬은 이러한 현실도피적 뮤지컬에 염증을 느낀 일부 창작자들이 진지하게 노력한 결과물이다. 컨셉트 뮤지컬에서는 주인공들이 사랑을 나누다 위기를 맞는 줄거리라 해도 이들의 낭만적 사랑을 부각시키지 않고, 결말 부분에서도 행복하게 둘이 맺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차가운 현실이나 피치 못할 상황, 주인공의 우둔함 같은 이유로 인해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

    컨셉트 뮤지컬이라는 개념을 처음 끌어들인 해럴드 프린스는 이런 ‘진지한 창작자들’ 중 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는 비교적 최근작인 ‘오페라의 유령’ 연출자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이전까지 해온 작업은 유령의 낭만적 사랑을 클래식하게 그린 이 뮤지컬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가 뮤지컬 ‘캬바레’에서 보여준 실험은 손하임의 작품인 ‘컴퍼니’와 ‘폴리스’ 등의 연출로 이어진다.

    보브 파시가 안무, 연출을 맡은 ‘피핀’(1972)에서는 사회자가 나와 관객에게 주인공 피핀을 소개하는 한편, 등장 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피핀이 전쟁과 혁명, 사랑 등 세상을 다양하게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춤과 노래 장면들을 통해 보여주려 하는 것은 세상의 냉정한 현실과 그 속에 고립되어 있는 개인의 쓸쓸한 모습이다.

    역시 파시가 안무와 연출을 맡은 ‘시카고’(1975)도 헐거운 줄거리 안에서 컨셉트를 강조한 작품으로, ‘피핀’과 마찬가지로 보드빌쇼의 형식을 빌려 배우들이 일련의 노래와 춤 장면을 보여준다. 사회자가 관객에게 던지는 첫 멘트 그대로 ‘시카고’는 “살인과 탐욕, 부패와 폭력, 간음과 모함의 이야기”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바는 한마디로 ‘살인자가 스타로 각광 받게 되는 웃지 못할 사회현실 고발’이다. 여배우의 치정살인에 얽힌 감옥과 변호사의 부패한 모습, 언론의 진실 왜곡과 이를 이용해 스타가 만들어지는 아이러니는 작품의 배경이 된 1920년대 실제 모습이다. 당시 미국에서 보드빌 쇼는 최고의 유행가도를 달리는 쇼 무대 사업이었고 이를 둘러싸고 수많은 범죄가 일어났지만, 법 제도와 언론은 이러한 현상을 오히려 조장하는 역할을 했다. 1975년 이 작품이 초연될 때까지 이처럼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심각하게 비판한 작품은 브레히트와 쿠르트 바일의 ‘서푼짜리 오페라’ 밖에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컨셉트 뮤지컬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작품은 그 밖에도 많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1964)은 러시아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겪는 박해와 가난, 전통의 붕괴에 대한 위협을 부각시켰고, 브로드웨이 사상 최고의 흥행과 센세이션을 기록한 ‘코러스 라인’(1975)은 브로드웨이 댄서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오디션을 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일자리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두려움과 희망, 좌절감을 표현한다. 저항문화의 상징으로 부각된 최초의 록 뮤지컬 ‘헤어’(1968)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젊은 뉴욕 히피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통해 인간의 자유에 대해 생각케 한다.

    미국 뮤지컬의 자존심이자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심지 있는 창작 세계를 펼쳐나가는 작곡가 스테판 손하임은 일련의 작품을 통해 컨셉트 뮤지컬의 지평을 확장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작사가로 출발한 그는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기존 뮤지컬에서 시도하지 않은 다양한 기법과 형식을 개발해내 뮤지컬의 예술적 위상을 한 차원 높였다. ‘컴퍼니’(1970)와 ‘스위니 토드’(1979), ‘리틀 나이트 뮤직’(1973), ‘폴리스’(1971), ‘퍼시픽 서곡’(1976) 등은 명 연출가 해롤드 프린스와 손잡고 만든 작품이고, ‘조지와 함께하는 공원 속 일요일’(1984)과 ‘인투 더 우즈’(1987)는 연출가 제임스 라파인과 함께한 작품들이다.

    ‘인투 더 우즈’는 독일 그림형제의 동화책에 실려 있는 신데렐라, 라푼젤, 잭과 콩나무, 빨간 두건의 소녀 등의 이야기를 재현하고 다시 해체함으로써, 삶이란 이제까지 동화들이 제시해온 것처럼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실을 표현한다. 이 작품은 예술성과 실험성 추구로 인해 대중적이지 못한 손하임의 뮤지컬 중 가장 대중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며, 최근 브로드웨이에서 리바이벌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손하임은 이 작품을 통해 새로운 현실적 동화를 창조함으로써, 동화 속 주인공들이 던지는 교훈적 가사나 동화적 환상, 현실도피 대신 인생의 씁쓸한 진리를 냉정하리만큼 현실적으로 끄집어낸다. 이 작품이 던지고 있는 ‘이들이 정말 이후에도 행복했을까(happily ever after)’라는 질문은 춤과 환상으로 점철된 웨버의 뮤지컬 ‘캣츠’가 담고 있는 ‘현재여 영원하라(now and forever)’ 식의 천진한 행복과는 너무나 다르다.

    삶의 당의정 혹은 카타르시스

    뮤지컬의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운데)와 그의 작품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위), ‘오페라의 유령’

    ‘귀를 찢을 듯 요란한 전자기타와 드럼 소리, 이에 뒤질세라 마이크를 통해 소리를 질러대는 배우들. 찢어진 청바지와 장발의 주인공들은 무대에서 마약을 하거나 때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다.’

    최초의 록 뮤지컬로 역사에 남게 된 맥다모의 미국 작품 ‘헤어’(1968)의 한 장면이다. 이 작품이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히피들의 반항과 프리 섹스 등 소재도 충격적이었지만 앰프로 소리를 확대해 요란하게 울려나오는 로큰롤 음악의 효과 때문이었다. ‘헤어’는 같은 시기의 영국 뮤지컬 ‘토미’(1969)와 더불어 젊은이를 위한 새로운 뮤지컬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마이크 없이 생음악을 연주하던 전통 뮤지컬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록 뮤지컬이 ‘헤어’ 등 몇 작품으로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기에는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당시 뮤지컬을 만들던 사람들의 인식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뮤지컬 작곡계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리처드 로저스는 ‘헤어’의 공연을 보러 가서 1막만 보고 극장 문을 나섰다. 뮤지컬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나이든 관객만큼이나 예전부터 익숙하게 들어오던 점잖고 고전적인 노래에 머물기를 원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로큰롤 노래의 단순성에 있었다. 로큰롤은 짧고 단순한 악절과 몇 개의 간단한 코드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단순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적인 선율에 가사를 붙이다 보니 복잡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뮤지컬에서는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인물들의 복잡미묘한 마음상태를 노랫말로 풀어야 하는데, 이러한 작업이 로큰롤 음악으로는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숙제를 풀어낸 이가 오늘날 뮤지컬의 황제로 칭송받고 있는 영국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다. ‘조셉과 어메이징 테크니컬러 드림코트’(1969),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1971), ‘에비타’(1978) 등의 초기 작품들을 통해 웨버는 로큰롤을 사용하되 부드러운 팝이나 브로드웨이에서 사용해오던 다양한 양식의 음악들을 함께 사용하는 전략을 선보였다.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을 유다의 눈으로 서술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살펴보자. 이 작품에서 순전한 로큰롤 양식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유다와 빌라도 등 몇몇 인물뿐이다. 유다에게 로큰롤을 부르게 한 것은 그의 히스테릭하고 잔인한 성격에 적합했기 때문이고, 빌라도는 예수에게 서른아홉 대의 채찍을 내려치며 씩씩거리는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이 록 음악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반면 예수를 이해하며 돌봐주는 마리 막달레나는 거친 로큰롤 음악 대신 블루스풍의 부드러운 ‘자 이제 괜찮아요(Everything all right)’를 부른다.

    웨버는 이처럼 인물의 성격과 상황에 맞게 로큰롤과 다른 음악들을 섞어 사용함으로써, 이후 ‘팝-록 뮤지컬’ 혹은 ‘브로드웨이-록 뮤지컬’ 등으로 부를만한 록 뮤지컬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었다.

    웨버의 모범을 따라 만들어진 록 뮤지컬들은 모두 순수한 록 뮤지컬이라기보다는 록과 다른 대중음악들이 섞인 팝-록 뮤지컬이다. ‘지저스…’의 인기에 힘입어 성경에서 소재를 얻은 뮤지컬들 중 하나인 슈바르츠의 ‘가스펠’(1971), 옛 공포영화를 흉내낸 컬트 뮤지컬 ‘록키 호러쇼’(1973), 샤를마뉴 대제의 아들 피핀의 인생역정을 그린 슈바르츠의 ‘피핀’(1972), 올리비아 뉴튼존과 존 트라볼타의 영화로 더 유명해진 ‘그리스’(1972) 등이 모두 1970년대 등장한 팝-록 뮤지컬들이다. ‘캣츠’(1981), ‘의형제’(1983), ‘공포의 꽃가게’(1982), ‘송 앤 댄스’(1985), ‘리턴 투더 포비든 플래닛’(1991), ‘스모키 조스 카페’(1995) 등 1980~ 90년대 록 뮤지컬들도 대부분 팝과 록을 혼합한 형태의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즘 록 뮤지컬이라 불리는 작품들 중 초기 록 뮤지컬의 신선함을 간직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순수한 록 음악만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음악들과 혼합해서 만들기 때문이 아니다. 록 음악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가의 문제이고 한편으로 어떤 록 음악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느냐의 문제다.

    삶의 당의정 혹은 카타르시스

    대표적인 블록버스터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을 위한 최종 리허설 날 에이즈로 사망해 더욱 화제를 모았던 오프 브로드웨이의 천재 작곡가 조너선 라슨의 ‘렌트’(1996)와 ‘틱틱붐’(1991)은 자유와 저항, 실험이라는 초기 록 뮤지컬의 신선한 정신을 계승한 보기 드문 예다. ‘렌트’(1996)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번안한 작품. 19세기 파리 예술가들 대신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동성애자와 젊은 에이즈 환자들을 다룸으로써, 자유와 사랑을 위해 방황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살아 숨쉬는 이야기를 창조해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이렇다 할만한 스펙터클도 없이 전세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더 큰 이유는 요즘 젊은이들이 공감할만한 진짜 살아있는 대중음악, 기존의 로큰롤을 업데이트한 음악을 재료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렌트’에 사용한 음악은 엄밀히 말해 얼터너티브 록과 힙합 등을 한데 합쳐놓은 최첨단 록 음악이다. 과거 엘비스 프레슬리류의 로큰롤 음악이 1960~70년대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열광시켰던 것처럼, 2000년대의 젊은이들은 ‘렌트’에 사용한 이 시대의 록 음악에 열광하고 있다. 동시대의 살아있는 대중음악을 포용해야 진짜 살아 숨쉬는 무대가 된다는 소박한 진리를 우리는 ‘렌트’를 통해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살아있는 소재와 살아있는 음악이 함께함으로써 이 작품은 자유와 저항, 실험이라는 초기 록 뮤지컬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반드시 록 뮤지컬이 아니어도 새로 나오는 거의 모든 뮤지컬들이 적지 않게 로큰롤 어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뮤지컬이 앰프에 의해 전자적으로 증폭된 음향과 MR이라 부르는 미리 녹음된 소리를 부분적으로라도 사용한다는 사실에서 록 뮤지컬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헤어’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이후 록 뮤지컬의 대두로 무대에서 녹음이나 마이크의 사용 없이 순전히 생음악만으로 노래를 부르던 시대는 지나갔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가령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이나 쇤버그의 ‘레미제라블’과 ‘미스 사이공’, 디즈니사의 ‘라이언킹’ ‘미녀와 야수’, 프랑스의 새로운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파리의 노트르담의 꼽추’ 등 요즘 전세계적으로 인기 절정을 걷는 뮤지컬들은 팝-록 뮤지컬의 영역에 깊숙이 발을 딛고 있다.

    블록버스터 뮤지컬 : 무대를 압도하는 현란한 볼거리

    ‘어두컴컴한 호수에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촛불이 둥둥 떠다닌다. 안개 자욱한 수면 위로 바람에 나부끼는 촛불들, 그 사이로 작은 배 한 척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미끄러져 나온다. 노를 젖는 가면 속 남자의 거역 못할 시선을 느끼며, 여자는 쓰러진 채 홀린 듯 사방을 둘러본다.’

    ‘오페라의 유령’(1986)에서 유령이 크리스틴을 납치해 지하 은신처로 데려오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감독 해럴드 프린스는 동원할 수 있는 최첨단 컴퓨터 테크닉과 수많은 인력, 돈을 모두 쏟아부었다. 수백 개의 촛불이 호수 위로 솟아오르는 효과를 위해 무대 바닥에 수많은 크고 작은 트랩 도어들을 설치해 실제 촛불들이 위로 솟아나오게 했고, 배에는 전동 모터를 달아 리모트 컨트롤로 멀리서 조정할 수 있게 했다.

    신비하고 웅장한 효과를 내기 위해 이 작품에는 이 외에도 다양한 무대장치와 의상이 동원됐다. 극장 천장에서 무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거대한 샹들리에, 화려한 가장무도회 장면을 위해 무대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계단, 빅토리아 시대를 고증한 고풍스러우면서 화려한 의상들까지. 특히 여주인공 크리스틴의 의상은 웬만한 여자의 몸무게만큼 무거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이처럼 화려한 의상과 무대장치, 최첨단 기술이 함께한 뮤지컬을 흔히 ‘블록버스터 뮤지컬’이라 부른다. 미국의 대형 비디오 대여 체인점의 이름인 블록버스터는 수천억원을 들여 만든 엄청난 규모의 매머드급 할리우드 영화를 일컫는 말이지만, 이제는 영화에 맞먹을 규모로 만들어진 대형 뮤지컬도 블록버스터의 대열에 끼게 된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그린 ‘미스 사이공’(1991)에서는 미국 병사들의 퇴각을 극화하기 위해 실물 크기의 헬리콥터가 공중에서 내려오고, 수십명의 베트남 술집 여인들이 미군들과 놀아나는 춤 장면을 위해 불빛 찬란한 화려한 홍등가를 연출했다. ‘레미제라블’(영어판 1985)에서는 거대한 바리케이드가 무대를 가득 메우면서 자유를 위해 싸우다 죽어가는 프랑스 민중의 모습을 극화한다.

    가족뮤지컬의 대명사가 된 ‘라이언 킹’(1997)에서는 줄리 테이머가 만든 환상적 의상과 소품들로 치장한 수많은 동물들이 무대 위를 지나다니면서 아프리카 토속 댄스를 보여주어, 부모의 손을 잡고 극장을 찾은 어린이들의 혼을 빼놓는다.

    블록버스터 뮤지컬은 영화도 뮤지컬도 없던 시절 귀족들의 호사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퍼부어 만들었던 이른바 19세기 그랜드 오페라와 유사하다. 그랜드 오페라가 그랬듯이 블록버스터 뮤지컬은 무대장치나 의상, 춤 등 눈에 보이는 스펙터클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엄청난 규모를 과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랜드 뮤지컬’이라 불러도 좋을 이러한 전통을 이끈 사람은 다름 아닌 앤드류 로이드 웨버다. 실제로 그는 ‘오페라의 유령’을 작곡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오페라의 수준에 준하는 엄청난 규모의 뮤지컬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이 작품의 수록곡 대부분이 오페라적으로 훈련된 성악가가 아니면 도저히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고난도 테크닉과 음악성을 요구한다.

    웨버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1)와 ‘에비타’(1978), ‘캣츠’(1981)도 음악의 스케일로 볼 때 만만치 않다. 이들은 모두 그랜드 오페라처럼 극이 시작해서 막이 내리기까지 두 시간 이상을 대사 없이 음악으로 일관하는 이른바 ‘송 스루(song through) 뮤지컬’이다. 대사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을 모두 음악으로 처리하려면 노래 부르는 배우도 힘이 들지만, 작곡가에게도 엄청난 테크닉이 있어야 한다. 흔히 아리아라 부르는 노래는 감정에만 충실하게 예쁜 선율을 만들면 되지만, 대사 부분에 해당하는 레치타티보 음악은 빠르게 돌아가는 극의 상황을 전달하는 동시에 음악적으로도 흥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랜드 오페라의 음악적 스케일을 획득한 ‘송 쓰루 뮤지컬’로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 작품은 ‘레미제라블’이다. 작곡가 클로드 쇤버그는 현대 클래식 음악의 창시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후손답게 음악적으로 완벽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작곡가 쇤버그는 눈물 나도록 가슴 뭉클한 음악을 만들어놓고 이를 ‘팝 오페라’라 불렀다. 웅장한 그랜드 오페라의 규모와 부드러운 팝송의 친밀함을 한데 섞어놓았다는 뜻의 이 용어는, 돈 냄새가 너무 많이 나는 블록버스터 뮤지컬보다 왠지 더 친숙하게 다가온다.

    블록버스터의 새 장, 프랑스 뮤지컬

    그 밖에도 최근 공연된 작품 가운데는 블록버스터 뮤지컬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이 수없이 많다. ‘별빛 특급열차’(1984), ‘명성황후’(1995년), ‘마틴 게어’(1996), ‘휘슬 다운 더 윈드’(1998), ‘지킬과 하이드’(1997), ‘스칼렛 핌퍼널’(1997), ‘타이타닉’(1997), ‘위치즈 오브 이스트윅’(2000) 등은 화려한 무대와 최첨단 테크닉을 동원할 뿐 아니라 대사가 아예 없거나 최소화되어,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일련의 뮤지컬은 블록버스터 뮤지컬의 새 장을 열고 있어 시선을 끈다. 이중 선두주자로 웨스트엔드까지 진출한 ‘파리의 노트르담’(1998)과 ‘로미오와 줄리엣’ ‘십계’(2000)로 이어지는 프랑스 뮤지컬들은 무엇보다 화려한 무대장치와 춤, 의상 등 볼거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화려한 이집트 궁전과 스핑크스,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은 최첨단 영상 테크닉과 만나 환상의 그림을 이루어낸다. 노트르담 사원을 상징하는 집채만한 벽과 공중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대형 종에서 연출하는 아찔한 애크로배틱은 그 자체로 쇼의 극치를 이룬다. 수십명의 남녀 무용수들을 기용해 만들어진 현란한 춤은 발레를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의 예술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화려한 조명이 입히는 색채도 보는 재미를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준다.

    프랑스인의 감수성이 느껴지는 대목은 그 밖에도 많다. 샹송 위주로 되어 있는 노래는 극장에서뿐 아니라 집에서 음반으로 들어도 훌륭하다. 때로는 음악이 극적 전개보다는 벅찬 감정만 표현한다는 인상도 주지만, 록과 팝의 달콤한 비트와 샹송의 만남은 브로드웨이 음악에 식상한 사람들에게는 분명 신선한 경험이다.

    프랑스 뮤지컬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에 포함된 약간의 대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음악으로 구성된 ‘송 스루’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음악은 시종일관 슬픔이나 기쁨, 질투 등의 정서를 아름답게 표현할 뿐 그러한 정서를 유발한 극적인 사건들은 그다지 전달하지 않는다. 전통 오페라에서 레치타티보가 담당하던 바가 상당부분 생략되었는데도 극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렇듯 프랑스 뮤지컬은 줄거리의 논리적 흐름을 관객의 상상력에 맡겨놓고, 대신 달콤한 음악과 볼거리의 화려한 잔치에 초대한다. 마치 프랑스인 작곡가 마스네의 서정 오페라 ‘마농’을 보는 듯하다.

    재미, 그 이상의 재미를 위하여

    지금까지 소개한 뮤지컬들 외에도 중요한 작품들은 수없이 많다. 노래 없이 퍼포먼스 형태로 유행하는 ‘리버 댄스’ ‘난타’ ‘UFO’와 같은 비언어 뮤지컬이나 ‘라이언킹’ ‘지킬과 하이드’와 같이 어린이를 포함한 온 가족용으로 만들어진 가족 뮤지컬, 옛 작품을 새롭게 만드는 리바이벌 뮤지컬, 이 모든 전통과 상관없이 예상치도 못하는 영역을 파고들어 전통에 도전하는 크로스오버 뮤지컬 등은 별도의 범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음악과 메시지, 극적 구성 등 뮤지컬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어느 것을 중요시한 작품이든 간에 제대로 만들어진 뮤지컬이 주는 감동은 모두 마찬가지다. 한 편의 뮤지컬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은 어떤 요소에 힘을 싣고 있는지, 작가와 연출자의 의도는 무엇인지를 곰곰 생각해보는 경험은 단순히 공연을 즐기는 것 이상의 지적 재미를 관객에게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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