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 추운 어느 월요일 밤, 편한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그와 세 번째로 마주앉았다. 배짱 맞는 친구들 앞에서 그는 비로소 한껏 풀어졌다. 뱃속 깊숙이 숨어 있던 일곱 살 어린애가 반짝 눈 뜬 형국이었다. 대가니 전략이니 서도동기니 하는 말들은 쑥 들어가고 없었다. ‘저것이 진정한 ‘황구라’의 모습이란 말인가’, 입 벌리고 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런데 그의 입담 한 자락이 심상찮았다. 베를린 망명시절이었다 했다.
“그때 거기 명상하는 애들, 그러니까 탄트라 수행하고 참선하는 애들이랑 버섯을 먹었거든. 그게 아주 효과가 대단하데. 일종의 강력한 환각젠데, 쪼꼬만 거 하나 먹으니까 12시간이 넘도록 세상이 까마득해. 숨을 들이쉬면 창밖 멀리 보이는 가로수 불이 탁탁탁탁 켜지고, 또 내쉬면 그 불이 탁탁탁탁 꺼지고. 참선에 깊이 들면 머리가 열린다고 하잖아. 난 그때 이마가 열렸어. 뜨거운 것이, 하- 기막힌 경지더라구.
근데 이게 다 좋은 게 아냐. 깨는 시간이 너무 길고 너무 고통스러운 거야. 방안의 사물이, 뭐 이런 물컵이며 커튼이며 그런 것들이 막 나한테 덤벼드는데. 그 선연한 눈빛, 불타는 적개심. 정말 다 살아 있었어. 존재감이 너무 선명했다구. 참 견딜 수없이 무섭고 숨이 막히고….
그런데 세상 만사가 다 그런 거야. 갈 때 너무 뿅 갔으니 올 때는 급행료를 내라 이거지. 그러고 보면 깨는 과정도 나름대로 의미 있었어. 괜찮은 경험이었어.”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그가 북에 간 것이나 버섯 먹고 불 켜댄 것이나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둘 다 그의 피가 시키는 대로, 갈 수 있는 한 멀리 몸 던져본 것 아닌가. 하지만 되돌아오는 길은 황홀하지만은 않았으리라. 그때 그의 곁을 지킨 건 더운 피가 아닌 차디찬 자의식이었을 테니.
그는 ‘환각에서 깨어나 보니 열렸던 이마에 벌건 자국이 남았더라’고 했다. 자국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치러야 할, 문학이라는 이름의 급행료가 남아 있는 까닭이다. 그의 피와 그의 자의식이 맞부딪혀 빚어내는 매운 갈등, 황석영 문학의 본령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닐까. 부디 그의 속 어린아이가 좀 더 자로워지기를. 예순에도 들끓어 폭발하는 소설가라니, 우리도 이제 몇쯤 가져볼 만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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