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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엔 궁녀, 보름엔 황후와 ‘雲雨之情’

자금성에서 엿본 중국 황제의 사생활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그믐밤엔 궁녀, 보름엔 황후와 ‘雲雨之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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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엔 궁녀, 보름엔 황후와 ‘雲雨之情’

삼희당.건륭제가 ‘세가지 보물’을 모셨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자금성의 건축물 가운데 제일 먼저 축조된 태화전은 권위의 화신 바로 그것이다. 용마루와 처마의 선이 워낙 무거워서다. 우리네 그것은 가운데가 낮고 양쪽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마치 새가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비해 태화전의 그것은 일직선을 그린다. 세상에 무슨 큰일이 일어나도 꼼짝하지 않겠다는 자세인 듯하다. 이같은 중량감은 절대성의 표상에 다름 아니다. 태화전 뒤의 중화전은 황제의 휴식공간으로 쓰였고, 그 뒤에 위치한 보화전은 황제가 직접 임석하여 과거(이를 전시[殿試]라 했다)를 치르던 곳이다.

원래 명 왕조가 외조를 조영(造營)할 때는 전각의 이름이 지금 같지 않았다. 태화전은 황극전(皇極殿), 중화전은 중극전(中極殿), 보화전은 건극전(建極殿)이었는데, 1644년 순치제가 즉위한 다음해 청조가 이곳을 차지하면서부터 그렇게 바뀌었다. 청조가 이토록 ‘화(和)’를 중시한 사실을 통해 그들이 가졌던 고민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은 소수민족인 처지에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것이다.

외조는 좌우로 날개를 거느리고 있다. 동쪽의 문화전(文華殿)과 문연각(文淵閣), 서쪽의 무영전(武英殿)이 그것이다. 3대 궁전의 종(從) 배열에다 이렇게 좌우 대칭구조를 갖춤으로써 권위와 함께 균형을 도모했던 것이다. 명나라 때 동궁으로 쓰인 문화전은 청대에 들어선 경서를 강의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즉 황제의 교육공간이었다.

이곳에선 한 달에 세 차례 경연(經筵)이 열렸는데, 여기에는 황제와 대신들이 참석했다. 재미있는 것은 경연장에선 반드시 다연(茶宴)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건청궁에서도 다연이 행해졌지만 차다운 차를 마신 곳은 바로 이 문화전이었다.

경연은 문집, 경서, 역사의 순으로 진행됐다. 경연이 끝나면 황제는 참석자 모두에게 차를 대접했다. 그것은 목을 축이는 실용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교육을 장려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담고 있었다. 차는 그들에게 일상이자 도(道)였기 때문이다.



다연은 건륭제 때 극치를 이뤘다. 그가 문화전에 들어서면 대신들은 절을 올렸다. 황제가 자리에 앉으면 만주족과 한족 출신의 학자 네 명이 먼저 사서(四書)를 읽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해 황제가 뜻을 새겼다. 이때 대신들은 무릎을 꿇고 경청했다. 이러한 방식은 오경의 경연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중국 최고의 차, 룽징차(龍井茶)

음다(飮茶)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건륭제는 대단한 차 애호가였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그는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은 이제 제위를 물려주려 하노라.”

신하된 처지에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들 수는 없는 일. 대신들은 화들짝 놀라 입을 모았다.

“하루라도 황제가 계시지 않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건륭제가 응수했다.

“하루라도 차를 마시지 않는다면 황제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를 그토록 즐겼기 때문일까. 그는 시작(詩作)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그 자신 일생동안 4만여 수의 시를 지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1년에 한 차례, 정월 초순 하루 길일을 택해 대신과 학자, 왕실 가족들을 건청궁으로 불러 차를 대접하며 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 자리엔 1000명 정도가 참석했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장관(壯觀)은 재위 마지막 해인 1795년에 열린 다연이었다. 그 날엔 8000명이 초빙됐는데, 5000명은 자리가 없어 끝날 때까지 서 있었다고 한다.

황실에서 내놓는 차는 차의 나라 중국에서도 최고로 치는 룽징차(龍井茶). 여기에 우유를 섞어 마셨다. 룽징차는 룽징이라는 바위샘이 있는 마을에서 생산된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물이 비취처럼 푸르다는 항저우(杭州)의 시후(西湖) 서남쪽 룽징촌이 바로 그 산지다.

룽징차를 어차(御茶)로 만든 인물 또한 건륭제다. 황제는 강남을 순시하던 중 룽징촌 부근의 효공묘라는 절에서 잠시 쉬게 됐다. 그때 이 절의 스님이 황제에게 그곳의 명차를 올렸다. 황제도 차에는 일가견이 있기에 차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결한 찻잔 속에는 참새의 혀처럼 가느다란 찻잎이 은은한 향기와 함께 푸르스름한 찻물을 녹여내고 있었다.

바로 한 모금을 마셨다. 아닌게 아니라 향기가 입 안에 가득했다. 맛이 기가 막혔다. 황제가 “이 차의 이름은 무엇이고, 어디서 나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스님은 “이 절에서 나는 룽징차”라고 대답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황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절 앞에 푸른색을 살짝 덧칠한 듯한 열여덟 그루의 차나무가 막 싹을 돋웠는지 푸른 물방울 같은 찻잎을 매달고 있었다. 주위의 산을 일견하니 마치 사자처럼 보였다. 나무의 수도 길하다는 열여덟 그루. 황제는 즉시 차나무를 어차로 지정하고는 황실에 바치라고 명했다. 그때부터 룽징차는 황제가 마시는 차가 되어 중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됐다. 룽징차 가운데서도 특별히 사자봉 근처에서 나는 차를 최고로 쳤다.

건륭제를 비롯한 청조의 황제들은 다연을 한(漢) 문화와의 소통창구로 활용했다. 다시 말해 유교문화를 함께 즐김으로써 한족과 자연스레 일체감을 갖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문화 진흥이라는 효과로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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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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