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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군단의 ‘담임선생님’ 이백천의 음악인생 上

서울대, 미8군, 색소폰과 차차차

  • 글: 이백천 대중음악평론가

서울대, 미8군, 색소폰과 차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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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6·25 사변이 일어났다. 6월28일 새벽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한강교 여섯 개의 아치 중 세 개가 폭파로 강물에 박혔다. 우리집은 강의 남쪽이라 피란에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하룻밤 밭에서 밤을 새고 아침이 되니 어느새 상도동에도 인민군이 들어와 있었다. 병원에 출근하던 형과 간호원이던 누이는 직장과 함께 피란을 했지만 집에 있던 부모님과 동생 넷, 그리고 나는 고구마 감자로 연명하며 9월28일 수복 때까지 버텼다. 그리고 그해 12월5일 해군군악학교 3기생 모병시험에 합격했다. 53명의 동기생과 함께 이틀간 기차를 타고 진해 해군신병훈련소에 도착해 해군 신병 19기가 되었다. 그때 내 나이 만 17년 9개월이었다.

신병훈련소에 들어가서 처음 들은 소리는 “서울 깍쟁이들 왔나, 잘 왔다”였다. 해군은 군기가 셌다. 특히 군악병에 대해서는 훈련조교들이 “이놈들 잘 걸렸다”는 듯이 마구 휘둘렀다. 어느날 훈련소의 대형 목욕탕에서 우리들은 서로의 엉덩이를 보고 놀랐다. 모두가 푸른색이었던 것이다.

신병훈련소를 거쳐 군악학교에 가니 1기 선배들이 우리들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군기를 잡았다. 구보, 원산폭격, 몽둥이 찜질, 토끼뜀 등 모든 방법을 사용했다. 우리들 3기생은 2기생보다 학력이 높은 편이어서 질투 섞인 기합도 많았다. 청소, 악기 손질, 복장검사, 집합 속도 등 잡힐 꼬투리는 항상 널려 있었다.

5분만에 끝난 아버지의 면회

1·4 후퇴 때 식구들은 이리로 피란을 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진해 신병훈련소로 불쑥 면회를 오셨다. 훈련중 잠시 시간을 얻어 연병장 풀밭에서 면회를 했다. 아버지는 앉으시자마자 “요새 책 보냐”고 하셨다. 입대할 때 딱 두 권 지참한 책이 있었다. 일본 안파(岩波)문고 출판의 서양철학사 상하권. 마침 한 권이 훈련복 뒷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것을 꺼냈더니 웃으셨다. 부자간에 별로 더 나눌 얘기가 없었다. 형은 6사단의 군의관으로 강원도에 있었고 가족은 이리에 있으며 그곳에서 조그마한 의원을 차렸다는 말씀이셨다. 면회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가시면서 또 한마디 하셨다. “공부해라.”



신병훈련 2개월, 군악학교 교육기간 1년6개월에 해군 일등수병이 되었고 바로 부산 본부군악대에 배속됐다. 그때는 가족도 부산에 와 있어 형만 빼고는 주말에 모두 만날 수가 있었다. 입대하고 2년이 지났을 무렵 옛친구들을 만났다. 모두 대학생이었다. 등록이 어떻고 수강신청이 어떻고 학점이 어쨌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께 꼭 대학에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안 가는 것보다는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부산에 전시연합대학(서울대학)이 있었고 아버지가 그곳에 재직하고 계셨다.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아직 제대는 멀었지만 시험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서를 내기 전에 한 번 더 아버지와 상의를 했다. “의대에 넣을까요” 했더니 “의사가 뭐 좋으냐”고 하시며 “네가 좋아하는 걸 해라. 음악 좋아하니 음대를 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교수 자제에게는 재직학과에 한해서 배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문리대 영문과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3년8개월의 복무기간 동안 짧은 휴가를 받아서 시험을 치르는 등 어렵게 학점을 따고 있었다. 1954년 8월 만기제대했을 때의 나이는 스물 하나, 학교는 2학년 2학기를 맞고 있었다.

제대 후 ‘이제는 편히 대학에 다닐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연구교환교수로 독일에 가시게 되었다. 대학에서 월급이 나왔지만 의원 수입이 없어진 만큼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군악대 동기들과 악단을 결성하기로 했다. ‘에이톤(A. Tone)’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바로 미8군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 악단에는 외부에서 붙인 별명이 있었다. ‘오단장, 십감독’. 동기생들이니 모두 동격이었고 누가 더 잘나고 못날 수가 없었다. 악단장은 순번제였으며 전부 두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뤘다. 나중에 이화여고 교사를 지내고 서울대 작곡과 교수가 된 김정길말고도 편곡하는 친구가 여럿이었다. 김정태, 김형찬, 김영대, 김성진, 이문용 외에 나중에 입단한 육군군악대 출신의 허린승(외대 러시아어과), 맹원식(전 워커힐악단장), 안건마(테너색소폰, 재미 목사), 정성조(서울고, 서울음대, KBS 악단장)등 모두가 능숙한 편곡자 겸 연주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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