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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갈등 지도 (4)│카슈미르

중재도 협상도 소용없는 21세기 최대의 화약고

  • 글: 라윤도건양대 교수 정치학 ranuma@hanmail.net

중재도 협상도 소용없는 21세기 최대의 화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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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도 협상도 소용없는 21세기 최대의 화약고

’50여년간 분쟁이 계속된 카슈미르 주변지역 지도

카슈미르의 병합을 위해 인·파 양국의 경합이 치열할 무렵 카슈미르 민족지도자인 셰이크 압둘라는 1947년 10월20일 델리에서 열린 한 모슬렘 집회에서 청중들을 향해 지나의 ‘2개국 이론(Two Nation Theory)’에 현혹되지 말고 인도로 병합해야 한다고 호소했고 카슈미르 출신은 이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이에 초조감을 느낀 파키스탄은 마침내 그 이틀 후인 10월22일 파키스탄 북서부의 파탄족(Pathans) 무장세력을 주축으로 한 파키스탄 병력을 카슈미르 내부로 침투시켰다. 이것이 최초의 공격이었다. 이들은 주도인 스리나가르를 향해 진격했다. 이번 침투는 종전의 양상과는 달리 전면적 공격이었고 또 사전에 면밀히 계획된 것으로 카슈미르나 인도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전면공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파키스탄 정부는 이 침략자들을 ‘해방자’라 부르며 카슈미르 내 부족들의 봉기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해방자들의 행동은 모슬렘 거주민들의 슬픔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한 것”이라며 이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실상은 파키스탄측이 카슈미르를 병합시키고 페샤와르와 펀자브에서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부족들을 전쟁에 투입시킴으로써 그들의 세력도 통제하겠다는 두 가지 목적에서 공격을 취한 것이었다.

침투사건 발생 이틀 후인 10월24일 카슈미르 왕인 마하라자 하리 싱은 침략자들의 격퇴를 위해 인도에 파병을 청했다. 카슈미르인들은 일찍부터 파탄족의 침입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고 더욱이 이번 경우는 규모도 큰데다 이틀 만에 스리나가르 인근 35마일 지점까지 진격해왔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에 인도의 네루 총리는 두 가지 조건으로 카슈미르에의 파병을 승인했다. 첫째는 하리 싱의 카슈미르 인도 병합 선언, 둘째는 카슈미르인의 민족지도자로 카슈미르 최대의 비종파 정당인 ‘내셔널 컨퍼런스’ 지도자인 셰이크 압둘라의 인정이었다. 이같은 협약안에 26일 하리 싱이 서명하고 27일에는 인도측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카슈미르의 인도 병합은 합법화되었다.



이에 따라 인도는 28일 일단의 병력을 카슈미르에 공수, 본격적으로 해방군의 진격을 저지시켰다. 그러나 이들 해방군은 이미 카슈미르 북서부 상당부분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이들의 철수문제 협의를 계속했고 그해 말까지 2개월여에 걸친 협의가 결렬되자 네루는 마운트 배튼의 충고를 받아들여 1948년 1월1일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상정했다. 네루는 파키스탄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통해 침략자들의 철수를 도모했다.

유엔 안보리는 중재를 위해 1월20일 ‘유엔 인도-파키스탄 위원회(UNCIP)’를 결성했다. 이같이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파키스탄의 두 번째 공격이 그해 5월 첫 주 동안 방어진지 구축을 구실로 이어졌다. 그러나 UNCIP의 노력으로 8월13일, 양측은 즉각 휴전하고, 양측 군대가 철수하며, 카슈미르의 정치적 장래를 카슈미르인 스스로의 결정에 맡긴다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인도는 이를 찬성했으나 파키스탄은 자유 주민투표에 대한 구체적 보장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UNCIP의 거듭되는 노력으로 1949년 1월1일, 양국은 휴전에 합의했고 1월5일에는 위원회의 합의안에 찬성하여 카슈미르 사태는 잠정적인 해결을 보게 되었다. 이 결과로 7월27일에는 카슈미르에 정식으로 휴전선이 그어졌고 북서부의 파키스탄령 ‘아자드(자유) 카슈미르’와 남동부의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인도정부 사주받은 쿠데타

독립 당시 카슈미르는 지리적으로 중립적 위치였기 때문에 주민의 종교 비율에 따라 파키스탄에 속하는 것이 당연했다. 따라서 파키스탄의 모슬렘연맹은 카슈미르의 통합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더욱이 파키스탄은 모슬렘의 종교적 기반 위에 건국되는 국가인 만큼 카슈미르의 통합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인도 콩그레스당의 입장은 달랐다. 인도는 비종파적 국가로 민주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수립하는 국가인 만큼 모슬렘 다수의 카슈미르를 통합하는 것이야말로 비종파적 국가수립을 완성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한편 카슈미르 왕 하리 싱은 주민 다수가 모슬렘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편향을 보였다. 힌두 우위 정책을 펴온 하리 싱에 대한 반대세력을 이끌어오던 셰이크 모하메드 압둘라는 초기의 종파적 편향 태도를 버리면서 네루의 콩그레스당과 긴밀한 유대를 갖게 되었으며 알리 지나의 모슬렘연맹과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앞서 설명한 대로 1947년말 파키스탄이 게릴라로 위장, 카슈미르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자 하리 싱은 인도에 지원을 요청했고 네루는 카슈미르의 인도 병합과 셰이크 압둘라의 인정 등 두 가지를 조건으로 파병을 단행하였다.

인도의 지원을 받아 자치권을 획득한 압둘라는 대대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과감한 사회주의적 정책을 펴 카슈미르 주민들의 사회 경제적 여건을 개선시켰다. 1951년에는 제헌의회를 소집,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그러나 ‘내셔널 컨퍼런스’ 조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그는 지나치게 독선적이었으며 반대파를 강압적 수단으로 억압하는 등 독재적 권력을 행사해 델리 연방정부의 불만을 샀다.

연방정부의 간섭이 강화되자 압둘라는 뒤늦게 카슈미르가 인도에 병합되는 것을 반대하고 친(親)파키스탄 성향을 보이며 카슈미르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던 중 1953년 8월 카슈미르 내에서 연방정부가 사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쿠데타가 발생, 압둘라는 체포되고 박시 굴람 모하메드가 후임 총리로 새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압둘라 통치시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은 교육받은 식자층의 확대를 가져와 카슈미르 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뉴 제너레이션 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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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라윤도건양대 교수 정치학 ranu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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