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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눈밭, 모래밭 걸어도 발자국 안 남기지요”

산중무예 ‘氣天門’ 사부 박대양

  • 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눈밭, 모래밭 걸어도 발자국 안 남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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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혜상인 스님은 어떤 면에서 뛰어난 분이셨습니까.

“제가 설악산에서 하산한 후 30여 년동안 수많은 무술가와 역술가, 도인들이나 저명한 인사들을 만나봤지만 원혜상인의 깊이와 높이를 따를 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요.

“원혜상인 스승님은 무공을 잘 안 쓰는 편이었지만, 한번 쓰면 대단한 폭발력을 지녔습니다. 스님이 솔장법이라는 무술을 쓰면 큰 나무가 벼락을 맞은 듯 재가 되었고, 쌀 한 가마니 정도는 공깃돌처럼 마음대로 다루셨어요.”

-그런 모습을 직접 목격했습니까.



“일부는 직접 보았고 일부는 전해 들었습니다. 옛날 도사들이 쓰던 축지법이나 수십 미터 절벽을 마음대로 뛰어내리거나 올라가는 경공법을 쓰신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이쯤 되면 황당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머리 속에 다시 무협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이 무럭무럭 피어 오른다.

“언젠가 한 노스님이 원혜상인 스님에게 ‘할아버지 스님’이라고 부르기에 깜짝 놀라 그 노스님에게 물었지요. ‘원혜상인 스님이 훨씬 젊으신데 어떻게 노스님이 원혜상인 스님을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느냐’고요. 그랬더니 그 노스님이 ‘원혜상인 스님은 내가 어렸을 때에도 할아버지였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원혜상인 스님은 제가 하산할 때 159세셨는데, 그 후 3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듣고 황당하다고 얘기하지 않던가요.

“종종 그런 말을 듣곤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듣는 사람은 황당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하고는 상관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전혀 뚱딴지 같은 생각에만 몰두하며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박대양씨도 스승으로부터 완벽하게 도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무예만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터득했다는 것. 스승의 풍수설이나 역학, 점성술 등은 지식이 짧아 알 바가 없지만 몸으로 수행하는 것은 거의 모두 익혔다는 것이다.

속세의 삶은 힘겹기만 하고

“제가 하산할 때는 일본과 중국의 무술이 우리나라 무술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전통무예의 씨를 뿌리고 토대를 쌓는 일은 무모할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어요. 해방 후 한국의 무술계는 일본의 당수도(혹은 가라테) 합기도 검도와 중국계인 당랑권 태극권 소림권 등이 세를 양분해서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국기로 일컬어지는 태권도는 1960년대에 만들어져 막 이름이 정착되어 가는 단계였고, 정도술 정각도 수박도 등이 순수 고유 무술로서 고군분투하고 있더라고요.”

박대양씨는 이 시절, 민족 전통을 내세우는 무예는 전혀 대접받지 못하고 대신 일본 검도의 누구에게서 직접 전수했다거나 중국인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 자랑이 되는 현실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한다. 순수 우리 무예들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는 것. 때문에 도발적으로 세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스승님이 저에게 글공부를 열심히 시키지 않으셨던 까닭에 저는 학문이 짧아요. 하지만 정신은 어느 누구보다 맑고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불선도에 관해서는 들은 풍월로도 자신이 있었고, 스승님 밑에서 익힌 무도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곤 했지요.

하지만 스승님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 혹은 중노릇 하는 것을 아침해가 떴다가 지는 것처럼 생각하라’고 가르치셨어요. 인생무상의 가르침이죠. 때문에 저는 남과 무엇을 겨룬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남의 나라 무예들이 우리 정신이나 국토를 오염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누구든 겨뤄보자는 심산을 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어요.”

이렇게 해서 그의 파란만장한 낭인생활이 시작된다. 밥만 사주면 누구와도 일합을 겨룬 것이다. 부산과 대구를 비롯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주먹깨나 쓴다는 무도계 인사들과 실력을 겨루며 한바탕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신장 154cm, 체중 40kg 안팎의 불리한 체격조건을 가진 그가 상대방을 메다꽂을 때는 누구나 탄복을 하곤 했다고 한다.

“1972년 부산 동아대에서 무도 시범이 있었습니다. 모 관장이 합기도로 전국을 장악하던 때였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내렸는데, 저는 동아대에서 시범을 보이다 ‘북한의 특수공작원 교육을 받은 사람이 분명하다’는 오해를 받아 쫓기기도 했지요. 그런가 하면 해운대 백사장에서 부산 폭력조직 칠성파와 맞설 때는 상황이 불리해 도망치는데, 제가 냅다 달리며 모래밭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것을 보고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눈밭이나 모래 위를 걸어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무협지를 보면 만날 수 있는 ‘답설무흔’ 비법인 셈이다. 이 또한 오랜 내공훈련과 기 훈련을 통해 연마할 수 있다는 것이 박대양씨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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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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