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가족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의 영화를 가만 살펴보면 가족에 대한 연민과 애증이 일관되게 표현되고 있다. 이장관은 4형제 중 셋째다. 맏형 필동씨 밑에 기동(53)씨가 있고, 이어 이장관과 동생 준동(46)씨가 있다.
희한하게도 4형제 모두 순수예술과 거리가 먼 방면에서 일했다. 맏형은 연극으로 평생을 살았고, 둘째는 공연기획사를 운영했고, 막내는 영화제작사 ‘나우필름’ 대표로 있다. 대구는 특히 보수적이고, 순수예술이 강세를 띠는 곳이다.
한 지인은 “그 틈바구니에서 이들 4형제의 ‘마음 고생’은 무척 컸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 중 가장 ‘끼’가 많은 인물로는 이구동성 둘째 기동씨를 꼽는다. 모이면 배를 잡고 웃게 만드는 재치와 유머가 여느 개그맨 뺨친다고 한다. 1990년대 말까지 공연기획사를 운영한 기동씨는 ‘신명 덩어리’라는 형제들의 평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구 근교에서 농원을 경영하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를 맏형 필동씨는 “극과 극은 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형제 같으면 꿈도 못 꿀 농사일이 가장 ‘끼’가 많은 기동씨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이장관은 논리적이고, 순수하다. 기동씨는 재능이 있고, 준동씨는 ‘깡다구’가 있다. 이들을 거느리면서 늘 바쁘고 어깨가 무거웠던 것이 맏형이었다”고 지인들은 얘기한다.
형제 모두 자유롭고 고집이 센 편이다. 우직하게 자기 세계를 개척해나갔다. 준동씨의 경우 고교(대륜고) 시절 이미 동아일보 광고탄압에 반대해 급우들과 함께 언론자유지지 광고를 내기도 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끼니도 거를 만큼 가난했음에도 하나같이 ‘돈 안 되는 일’만 골라 했다는 점이다. 옛 시절을 되돌아볼 때 가난은 이들 형제의 가장 아픈 지점이다. 형제 중 제때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다닌 이가 없었다. 필동씨는 모친으로부터 “좁쌀 두 개도 포개놓고 못 살 운명”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재물을 쌓아놓고 호강할 운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 형제는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형제 중에 월급봉투를 쥐어본 것도 교편을 잡은 이장관이 처음이었다. 이 점 때문이었는지 이장관이 신일고를 떠날 때 형제들이 꽤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아버지(이용락· 2000년 작고)에 대한 기억에는 그늘이 많다. 가정의 ‘온기’는 별로 없는 편이었다. 안동의 옛 선비들이 대부분 그랬듯 어머니에 대한 배려도 없었고, 더구나 실패한 지식인으로 자괴심이 대단했다. “내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동해에 뼈를 뿌렸다. 이날 형제들은 먼바다를 보며 묘한 슬픔에 몸서리를 쳤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형제간의 우애에는 유별난 구석이 있다. 명절이 기다려진다는 형제는 이들뿐일 것이다. 명절에 만나면 밤새도록 얘기하고, 웃고 떠든다. 그래서 이웃에서는 “딸 많은 집 같다”고 할 정도다. 맏형 필동씨는 “돈도 없이 그거(형제간 우애)라도 있어야지” 하고 말했다.
고루한 옛 선비 집안이면서 네 형제가 모두 ‘골수’ 문화예술인의 길을 걷는 것도 흥미롭다. 막내 준동씨는 어머니의 영향이라고 했다. 1992년 작고한 어머니(김제랑)는 남의 얘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재미있게 옮기는 재주가 있었다. 가족들이 모여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장관의 영화 속에는 이러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회귀본능, 안타까움, 연민 등이 오롯이 녹아 있다. 그것은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는 슬픈 한 가족사가 눈물나게 그려져 있다. 주인공 남자가 슬픔과 회한에 젖어 X구덩이를 비틀비틀 걸어가는 끝이 인상적이다.
그렇다고 그의 예술 작업이 온통 이러한 개인사(史)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개인사가 됐든, 어두운 현대사가 됐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무신경, 무감각에 전기 자극을 준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문제의식은 모두 개인의 분노와 고민에서 출발하는 것 아닌가. 밝은 곳에서, 대중에게,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제시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그의 재능 덕분이다.
또한 이장관은 정직한 예술가다. 위선이나 거짓, 자기 연민을 걷어내고 바닥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논리에 힘이 실리는 것도 바탕에 정직성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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