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정재민의 리·걸·에·세·이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 정재민|전 판사·소설가

    입력2017-08-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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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아들과 딸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둘이서 누가 먼저 젓가락으로 메뉴판을 들어올리느냐는 시합에서 동생이 오빠를 이긴 모양이었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 중인 딸 옆에서 아들은 울상을 지으며 “반칙이야”를 외쳤다. 딸이 게임 시작 전에 메뉴판을 가운데 지점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깝게 뒀다는 것이었다. 딸은 메뉴판이 가운데 있었다고 항변했고 급기야 아들이 날더러 반칙이 있었는지 판정을 내려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순간 직업병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 그 자리가 법정으로 변해버렸다. 아들이 고소인, 딸이 피고인, 아내가 증인, 내가 재판장. 판사를 그만뒀는데도 집에선 아직 판사 노릇을 해야 하다니. 난처했다. 아들 말이 맞다 하면 딸이 삐치고, 딸 손을 들어주면 아들이 서운해할 게 뻔했다.

    무엇보다도 판사 때 빈번하게 그러했듯이 진상은 나도 잘 모른다. 당시 나는 동태찌개에 코를 박고 흡입하느라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다. 아이들에 의해 목격자로 지목된 아내는 당시 메뉴판을 힐끔 보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메뉴를 보려고 본 것이지 메뉴판의 위치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어린 딸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보면 거짓말을 대놓고 할 용기는 없는 아이라 실토를 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식으로 ‘신문’을 하고 싶진 않았다. 판결 대신 밥을 다 먹으면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하자 둘 다 “꺄!” 소리를 지르며 언제 다투었냐는 듯 그저 싱글벙글이다.

    실제 재판에서는 판사가 입장이 난처하고 진상을 잘 모르겠다고 해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고 어물쩍 넘어갈 수 없다. 누가 어떤 법적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법적책임을 따지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 사실관계를 확정해야 한다. 그 당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소상히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의 머리를 한 번 때렸는지 두 번 때렸는지, 누가 지하철에서 누구의 엉덩이를 만졌는지 안 만졌는지, 누가 누구로부터 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누가 누구를 어떤 이유로 해고한 것인지 따위를 확정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법률가들은 ‘사실확정(Fact Finding)’이라 한다.





    법리 논쟁보다 어려운 사실확정

    판사가 되기 전에는 판사의 일이 대부분 법 위반을 판단하는 일인 줄 알았다. 이런 짓은 위법해, 이런 짓은 괜찮아, 그건 청구할 수 있어, 그럴 권리는 없어,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판사가 되고 보니 실제 재판에서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법리 논쟁이 아니라 사실확정이었다. 재판의 핵심이라고 앞선 연재에서 소개했던 증거조사 절차도 사실확정을 위한 것이다.

    법리가 문제가 될 때에는 먼저 법조문을 찾아서 적용해보고, 법조문이 애매하면 판례를 찾아보고, 판례가 없으면 교과서나 논문을 찾아보고, 국내 자료가 없으면 외국 자료를 찾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똑똑하다고 소문난 동료 판사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해결되었다. 그래도 답이 불확실할 때에는 그냥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택하면 된다. 그쯤 되면 어차피 하나의 정답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확정에는 정답이 있다. 그런 사실이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게다가 당사자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제아무리 똑똑한 판사라 해도 사실관계를 당사자보다 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판사가 판결문에 실상과 다른 사실인정을 하면 거짓말을 한 사람은 몰래 웃고 참말을 한 사람은 억울해서 피눈물이 난다.

    판사가 되기 전에는 증거조사를 통해 차분하게 따져보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드라마 속 셜록 홈스나 CSI(범죄현장과학수사팀)처럼 명쾌한 논리적 추리가 가능한 줄 알았다. 순진한 착각이자 오만이었다. 증거조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기록을 여러 번 본다고 해서, 내가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는 도피성 위안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진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증거조사를 통한 사실확정을 퍼즐 맞추기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적절한 비유라 생각한다. 다만 실전의 퍼즐은 조각조각이 꼭 들어맞는 그림퍼즐이 아니다. 실전의 퍼즐 맞추기는 누군가 던진 벽돌에 와장창 깨어진 유리창을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을 들고 복구하는 작업과 같다. 유리 조각의 절반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남은 조각은 그야말로 산산조각나서 복구 자체가 어렵고, 그럴듯한 조각을 집어 들어봤자 그것이 있던 제자리가 어딘지 알기 어렵고,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손을 베이는 피해자가 나온다.


    퍼즐 맞추기의 어려움

    현실의 법정에서 명확한 사실확정이 어려운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현실에서는 증거가 부족하다. 증거가 충분하면 법정까지 왔겠는가. 법정까지 왔더라도 당사자가 다투겠는가. 게다가 드라마에서 자주 다루는 살인사건보다는 경미한 사건이 더 어렵다. 살인사건에는 시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반면 툭 친 폭력, 엉덩이를 슥 만지고 지나가는 추행과 같은 경우는 녹화 동영상이 없는 이상 입증이 어렵다. 사기죄, 협박죄, 강요죄, 직권남용죄 등은 대개 말로 이루어지고 그 말이라는 것도 사용하는 어휘뿐만 아니라 말투나 표정, 뉘앙스가 결정적인데 그 당시 녹음해놓지 않은 이상 입증하기 어렵다.

    객관적 증거물이 없으면 증인의 증언을 증거로 삼아야 한다. 증언은 믿기 어렵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말은 신빙성이 높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의 말은 신빙성이 낮겠지만 판사가 그 증인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일상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법정이라는 무대에 서서 판사라는 관객을 철저히 의식하는, 그것도 난생처음 보는 사람(증인)의 신뢰도 판단은 연극 무대에서 처음 본 연극배우가 실제로는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것만큼 어렵다. 게다가 증언한다는 것은 과거 어느 시점의 상황을 인식하고, 기억하고, 말로 표현하는 것인데 이 각각의 단계에서 진실이 걸러지거나 변형될 수 있다. 인간의 인식은 얼마나 주관적이고, 기억은 얼마나 빨리 상하며, 언어는 얼마나 단조로운가.

    유독 잊히지 않는 강제추행사건도 그런 사건이었다. 피고인과 피해자가 모두 연세가 많은 분으로 작은 동네에서 수십 년간 각자 장사를 하면서 살아온 사이였다. 그런데 피고인이 어느 날 밤에 술에 취한 채 피해자의 가게에 들어와서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피해자의 가슴을 한 번 만지고 갔다는 게 피해자의 고소 내용이었다.

    당사자들의 말은 서로 달랐다. 피고인은 “결코 피해자의 가슴을 만진 사실이 없다”며 “억울해서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펄쩍 뛰었다. 그럴 때마다 피해자 역시 펄쩍 뛰면서 “나야말로 피고인이 무죄를 받으면 자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면 이번엔 피고인의 아내와 가족이 “죄 없는 사람을 무고하지 말고 그냥 지금 죽으라”며 펄쩍 뛰었다.

    나야말로 펄쩍 뛸 지경이었다. 폐쇄회로(CC)TV가 있을 리 없는 어느 작은 가게에서, 아무 목격자도 없이 단둘이 있는 현장에서, 그것도 순식간에 발생했다는 추행의 유무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무죄 판결을 하자니 피해자가 자살은 몰라도 곧 숨이 넘어갈 것 같고, 유죄 판결을 하자니 피고인이 진짜로 자살이라도 할 것 같았다.



    입증책임이란 동아줄

    다행스럽게도 이처럼 결정장애에 빠진 가여운 판사를 구출해주는 법리가 있다. 입증책임이다. 판사가 아무리 고민해도 확신이 들지 않는 경우에는 입증책임을 지는 쪽에게 불리하게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입증책임을 누가 져야 한다고 법이 명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어떤 사실이 있다고 주장해서 이익을 얻는 쪽이 입증책임을 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여러 법리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경우에는 누가 입증책임을 져야 하는지 애매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형사소송에서만큼은 모든 입증책임을 검사가 진다. 국내외 형사소송을 지배하는 대원칙으로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법언이 있다. 애매하면 무죄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결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앞서 말한 강제추행죄 사건에서 나도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에 따라서 무죄를 선고했다. 선고 직후에 피해자 아주머니는 법정에서 “이게 무슨 법치주의냐, 똥치주의지!”라고 고성을 지르면서 격렬히 항의하다가 경위의 제지를 받고 겨우 물러났다. 현실은 만만치 않은 법이다.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은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피고인을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과 연동돼 있다. 무죄추정 원칙은 프랑스 혁명 직후에 제정된 권리선언에 처음 규정된 것이다. 이는 타인을 섣불리 유죄로 단정해서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한 경험이 있었기에 제정된 것이다. 마녀사냥이 대표적이다. 무고한 여성들을 마녀라고 낙인찍고는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가하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마녀가 아님을 증명하라고 억지를 쓰는 야만과 광기의 시대에 대한 계몽주의적 반성에서 탄생한 원칙이다.

    헌법이 부여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깨고 피고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판사에게 다른 재판에서보다 훨씬 더 강한 확신이 들어야 한다. 얼마나 강해야 하는가. 법과 판례가 제시하는 기준은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beyond the reasonable doubt)’다. 합리적 의심은 쉽게 말해 억지 부리지 않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더라도 검찰이 제기한 공소사실 외에 다른 시나리오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의심을 말한다. 가령 우리 집에서 맛있는 과자가 없어지면 딸은 다짜고짜 내가 먹었을 거라고 의심한다.

    물론 내가 가장 식성이 좋고 전과(?)가 많으니 딸 처지에서는 그럴듯한 추론이지만 그럼에도 엄마나 오빠가 먹었을 합리적 개연성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적 의심이 가능한 이상 딸이 아빠를 범인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날 집에 엄마와 오빠가 없었고 아빠만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가 범인이 아닐 수 있는 시나리오는 어느 날 토끼 한 마리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과자를 먹고 갔거나 도둑이 들어와서 과자 하나만 가져갔다는 비합리적인 가능성뿐이다. 이때는 아빠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

    오늘날 소셜미디어에서 이뤄지는 대중 여론 재판에서도 무죄추정의 원칙과 합리적 의심을 넘는 입증의 정도가 적용되면 좋겠다. 대중이 격분해서 특정인과 심지어 그 일과는 무관한 가족들의 인격까지 막강한 화력으로 짓밟는 것을 보면 그 특정인이 아무리 큰 잘못을 했다 해도 정의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인생 최악의 순간만을 포착한 기사 몇 줄, 말실수 한두 마디로 그 사람 인생의 평균도 그 수준이라고 섣불리 단정하는 것은 아닐까. 여론 재판의 유혹에 빠질 때마다 이 문구를 떠올려보자.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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