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아름다운 해변, 드넓은 개펄, 해송(海松)의 향연

나그네 가슴 달뜨게 하는 충남 태안·서산

  • 글: 조성식 기자 사진: 김성남 기자

    입력2003-03-26 1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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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해변, 드넓은 개펄, 해송(海松)의 향연

    개펄은 태안 주민에게 생명의 양식이자 마음의 휴식처다.<br> 태안군 이원면 내리에 있는개펄에서 한 아낙이 바지락을 캐고 있다.

    충남 태안군 이원면을 가로지르는 603번 도로를 타고 이원 방조제를 둘러보고 나오던 길이었다. 차를 잠깐 세우고 도로 바로 옆에 있는 비닐하우스에 들어가봤다. 50∼60대로 보이는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열심히 굴을 까고 있었다(나중에 알게 됐지만 남자의 이름은 손병산, 나이는 예순아홉이다. 한 여자는 손씨의 부인이고 또 다른 여자는 형수다).

    손씨가 조새라고 불리는 굴 까는 기구로 굴을 찍어 기자에게 권했다. 입안에 넣자 비릿한 내음과 더불어 새콤달콤한 맛이 혓바닥을 휘어감는다. 그날 아침 바닷가에서 따온 것이라 그런지 싱싱하기가 이를 데 없다.

    “소주 한잔 하슈.”

    손씨가 슬그머니 일어나 한구석에 있던 소주병을 들고 온다. 수입을 묻자 손씨 부인은 1년에 500만∼600만원 번다고 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까면 10∼15㎏의 굴을 모을 수 있다. 한창 때인 10∼11월엔 1㎏에 9000원까지 받지만 봄이 바짝 다가선 요즘은 5000원에 넘긴다고 한다.

    “고달퍼유. 그래도 농사 짓는 것보단 낫슈.”



    서해안에서 가장 큰 개펄이 펼쳐져 있는 태안은 서울에서 승용차로 약 2시간 반 거리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다 서산나들목에서 빠져나와 32번 국도를 따라 20여㎞ 직진하면 태안 읍내에 닿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태안반도는 국내에서 유일한 국립해상공원이다. 500㎞가 넘는 해안선을 따라 30여 곳의 해수욕장과 40여 항·포구가 늘어서 있다. 사계절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해 연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밀국낙지탕은 태안의 별미로 꼽히는 음식이다. 이것을 잘하기로 소문난 곳은 원북면과 이원면. 태안읍에서 승용차로 603번 도로를 타고 15분쯤 달리면 원북이고 원북에서 다시 10분쯤 달리면 이원이다. 마을 어귀엔 콘크리트로 만든 거대한 낙지상이 서 있다. 이름하여 밀국낙지유래비. 낙지상 아랫부분에 밀국낙지탕의 유래와 맛을 소개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첫날 저녁, 이원면에 있는 이원식당을 찾아갔다. 4인용 탁자가 40개나 되는, 밀국낙지탕 전문식당이다. 밀국낙지탕의 독특한 맛은 양념과 함께 넣는 박속에서 나온다. 허연 박속은 언뜻 봐선 무와 잘 구분되지 않는데 국물을 시원하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주인 안국화(여·45)씨는 “박은 쫄깃쫄깃한 성질이 있어 끓는 물에서도 잘 퍼지지 않는다. 뻘낙지에서 우러난 붉은 물이 박속에 스며든다”고 설명했다.

    살짝 익은 낙지를 탕에서 끄집어내 먹기 좋게 가위로 듬성듬성 잘랐다. 양념장에 찍어 천천히 입 속에 넣자 뻘낙지 특유의 쫄깃쫄깃하고 연한 감촉이 파도처럼 밀려와 잇몸과 입천장을 마비시킨다. 이심전심의 눈빛을 나눈 취재진은 “아줌마! 소주 한 병”을 외쳤다.

    밀국낙지탕의 대미는 밀국이라 불리는 칼국수. 낙지를 다 먹은 후 탕에 밀국을 넣고 5분간 끓이면 시원한 국물이 밀국에 스며든다. 밀국과 함께 국물을 들이켜고 나면, 누워서 배를 두드리지 않을 수 없다.



    둘쨋날 아침, 태안의 모든 도로는 안개에 휘감겼다. 안개 숲을 헤치고 원북면과 이원면을 돌아보았다. 들판에 널브러진 짚단들이 서리를 맞아서인지 새치처럼 희뜩희뜩하다. 태안에서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 늘씬한 해송(海松)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태안에 나무는 소나무뿐’이라는 얘기가 실감난다. 안개가 걷히자 도로 양옆으로 숲을 이루고 있는 해송 사이로 햇빛이 유리조각처럼 번들거렸다.

    이원면 사창리로 들어갔다가 다시 큰길로 나와 꾸지나무골해수욕장이 있는 이원면 내리로 가 개펄을 밟아보았다. 소형 동력어선 ‘백마2호’가 털썩 주저앉아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부 두 사람이 소라껍데기가 촘촘히 달린 밧줄 더미를 배에 싣고 있다. 주꾸미를 잡는 데 쓰는 기구다. 바다에 깔아놓으면 주꾸미들이 제 집인 줄 알고 소라껍데기 안으로 들어와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지에서 들어와 이곳에 산 지 18년 됐다는 선장 윤환철(63)씨는 “보통 하루 동안 묵혀둬야 많이 잡힌다”고 설명했다.

    정오 무렵 원북면 청산리의 한 가정집에 들러 감태(파래) 말리는 것을 구경했다. 집에서 물에 젖은 감태를 나무판에 널어 햇볕에 말리는 게 전통적 방법인데, 요즘은 공장에서 건조기로 말린다고도 한다. 인천에서 이곳으로 시집왔다는 최진숙(46)씨는 “햇볕에 말리는 자연산이 더 맛있다”고 말했다.

    모래언덕으로 유명한 원북면 신두리에서는 지역주민과 당국의 갈등이 격렬한 형태로 드러나 있었다. 드넓은 모래언덕 곳곳에 붉은 글씨의 나무안내판이 박혀 있다. 군 당국이 모래언덕을 문화재로 지정해 개발을 제한하자 땅주인들이 강력히 반발, 관광객의 출입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일직선으로 죽 뻗은 신두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은 잘 닦여진 테니스코트처럼 부드럽고 단단해 그 위로 자동차가 달릴 수 있었다.

    늦은 점심으로 이 지역 별미인 굴밥을 먹은 후 만리포 해수욕장을 찾았다. 눈부신 햇살이 새처럼 바다를 쪼아먹고 있다. 파도는 곰비임비 달려와 해맑은 웃음을 터뜨린다. 몇 쌍의 남녀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 채 해변을 거닌다. 지구상에 가장 평화로운 풍경은 이런 게 아닐까.

    낙지가 많이 나서인지 태안의 지형은 낙지발을 닮았다. 도로는 태안읍 중심부의 로터리를 기점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있다. 따라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일단 태안읍내 로터리로 되돌아와 방향을 바꿔야 한다. 북쪽의 구례포와 학암포 낙조가 좋다기에 만리포에서 읍내로 되돌아와 634번 도로를 따라 차를 몰았으나 날이 흐린 탓에 허탕을 쳤다. 주변을 붉게 물들이던 해가 슬그머니 해무(海霧)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로터리로 돌아와 다시 천리포 해변으로 이동, 천리포휴게소식당에서 이 지역 별미인 갱개미 무침과 찜을 맛보았다. 갱개미는 다른 지방에서는 가오리 또는 간자미로 불리는 생선이다. 무침은 막 잡은 갱개미 살에 벌겋게 양념을 치고 배와 오이를 뒤섞은 것으로 매콤새콤한 맛이 난다. 연한 뼈가 오돌토돌 씹히는 찜은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주인 박재길씨의 딸 박민화(34)씨는 “다른 지방에서는 (갱개미를) 막걸리에 절인 후 무침을 만드는데 여기서는 생물로 무침을 만든다”며 독특한 맛을 강조했다.



    다음날 오전 남쪽으로 뻗은 603번 도로를 타고 근흥면에 있는 안흥항과 신진도를 돌아봤다. 육지와 연결된 신진도가 관광지로 개발된 후 안흥항이 퇴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태안 읍내 한 식당 주인의 얘기는 틀리지 않았다. 신진도에 가보니 포구도 크고 어선도 많고 관광선도 여러 척 매여 있다. 썰렁한 안흥항과 달리 출어를 준비하는 어부들이 부지런히 그물을 매만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해변, 드넓은 개펄, 해송(海松)의 향연
    오후엔 태안군을 떠나 서산시로 들어섰다. 서울 방면으로 32번 국도를 따라 20분 가량 달리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나들목 부근에서 647번 도로로 바꿔탄 후 다시 618번 도로로 접어들면 운산면 용현리가 나온다. 가야산 자락인 이곳엔 국보 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암벽을 파서 조각한 것으로 석굴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삼존불상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운산면에서 빠져나와 647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10분 가량 달리면 해미면이다. 조선 성종 때 지은 해미읍성을 둘러본 후 천주교 순교성지인 여숫골을 찾았다. 1866∼72년 1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생매장당한 곳이다. 16m 높이의 기념탑과 이름 모르는 순교자들의 공동묘가 만들어져 있다. 인간의 역사는 참으로 잔인한 것이다.

    해미면에서 나와 40번 국도에 올랐다가 96번 국도로 빠져 20분 가량 달리자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간월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간월도 주변 약 1만5000ha에 이르는 간척지는 인간 의지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아욱아욱 갈매기 울음 속에 해는 시나브로 이울고 바다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썰물 때만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간월암이 여인의 자태처럼 나그네의 가슴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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