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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한문 공부하다 보니 셈법이 보입디다”

‘컴퓨터보다 정확한’복리계산법 개발한 김병채 옹

  • 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한문 공부하다 보니 셈법이 보입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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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공부하다 보니 셈법이 보입디다”

한시와 족보로 가득한 김옹의 행랑채에는 뜻밖에도 각종 현대식 전자계산기가 놓여 있다.

그는 모든 숫자는 완벽에 가까울 만큼 정확하게 기억해내고 외고 있었다. 그의 교사 임명에서부터 정년까지의 각 학교 근무 연수, 전근 일자를 외고 있었다. 즉 1947년 3월30일 고창 무장 중앙국민학교 부임, 2년간 근무하다 고수국교로 전근, 8개월 근무했으며 1949년 11월6일 부안 상서국민학교 근무… 이런 식이다. 하지만 교사시절에는 무용과 음악을 잘 가르치는 교사로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나는 공업학교 출신인데 사범학교 출신보다 더 풍금이나 피아노를 잘 치요. 학예회 때는 저학년이나 고학년 무용 연습을 내가 시켰당개. 피리, 하모니카, 아코디언, 기타, 피아노, 트럼펫 다 잘 불었제. 그래서 부안국민학교에서 내가 창설한 밴드부원이 전국대회에 나가 최고상을 받기도 했거든. 지금도 전국 최고 밴드부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디, 내가 지휘한 후에도 세 번이나 최고상을 받았다고 하덩만. 그랑프리제.”

-수리에 밝은 분은 정서적인 측면이 약하다는 말을 듣는데 어떻게 그런 재능까지 겸비하셨네요.

“아그들을 잡는 밑천은 음악과 무용이 최고여. 내가 그것을 배우려고 개인지도 받음서 월사금깨나 바쳤제. 그런디 나중에는 내가 학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원장보다 더 잘하는 연주자가 되어뿌렀어.”

-교사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교사 생활을 하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적은 없어. 선생이 내 천직이라 느껴지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적은 아무래도 6·25 때라고 할 수 있지. 6·25 전후해서 산사람(빨치산)들이 우리 집을 습격해 부안 처가 쪽으로 이사를 와버렸당개.”

이때 그는 선친을 공산당에 잃을 뻔했고 자신 역시 총살 직전에 살아난 경험이 있다.

“선친이 우익인 한민당 고수면 당위원장이었소. 좌익이 동네를 접수한 후 선친을 비롯해서 동네 사람 50명 가까이 빨갱이한테 잡혀부렀소. 일부는 밤에 도망을 가버렸는디, 그 분풀이를 도망 안 간 사람들한티 하는 판이여. 선친은 점잖은 분이라 도망갈 생각을 안허고 꼼짝없이 묶여 있는디, 이자들이 죽일라고 하는 것이여, 그래서 나가 공산당 군단위 위원장인 유원종이를 찾아갔어. 나하고 고창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거든. ‘사람을 죽이면 느그덜 투쟁에 도움이 안 된다. 너희들이 궁지에 몰리고 산에서 식량이라도 떨어져봐라. 보급투쟁시 도와줄 사람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러니까 살려달라고 했제. 유원종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만. 그리고 상부하고 뭐라고 연락을 하더니만 모두 풀어주라고 하는 것이여. 내 덕에 선친은 물론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살아나부렀제. 유원종이는 나하고 사상이 달랐을 뿐 똑똑하고 냉정하면서도 깊은 정이 있는 놈인데, 전쟁이 끝난 후 영영 이별을 하게 됐어. 총살당해 버렸거든. 부인은 자살했고 집구석은 흔적도 없이 쑥대밭이 되어버렸지.”

또 그는 마을 사람 7명과 함께 총살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빨치산들이 각 마을의 동향을 살피러 경찰 복장으로 위장을 하고 고창군 고수면 송정마을로 들어왔어. 나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경찰이 왔다고 태극기를 들고 동구 밖으로 나가 이들을 환영했지. 하지만 그 길로 7명 모두 위장한 빨치산에 체포돼 즉결처분을 받게 됐어. 이때는 죽이고 죽는 것이 밥 먹는 것만큼이나 가볍고 쉬운 일이어서 꼼짝없이 죽는 줄로만 알았거든. 머리에 총구를 겨눌 때 온몸이 짜르르 감전이 된 것처럼 전율이 오면서 머리 속이 텅 비는 것을 느꼈지.”

하지만 이때 외출중이던 면단위 위원장이 돌아왔다고 한다. 천운인지 그 사람은 김병채의 바로 1년 선배이자 그와 유원종 군단위 위원장이 친구 사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7명 모두를 석방했다. 함정을 파서 양민을 희생시키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 석방 이유였다.

-김선생님도 친구의 권유로 좌익활동을 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아니여. 나는 군에서 알아주는 부르주아인디, 공산당을 하고 싶다고 해도 넣어주들 안혀. 어느 면에서 그들도 나를 이용했는지도 모르제만, 나는 이념에 상관없이 인간으로 통하면 서로 살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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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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