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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심화되는 한미 갈등, 시민사회 네트워크로 풀자

한국에선 반미론, 미국에선 혐한론

  • 글: 임현진 서울대 교수·정치사회학

심화되는 한미 갈등, 시민사회 네트워크로 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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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얼마나 극적으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문서는 많다. 1965년 당시 미 대통령안보담당보좌관이었던 로스토의 지시에 의해 한국관련 부서가 협력하여 작성한 ‘대한정책’ 문서와 1968년 1·21사태 이후 북한에 보복할 것을 주장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달래기 위해 특사로 내한한 밴스가 귀국 후 다시 작성한 ‘대한정책’ 문서를 비교해보면 미국의 시각변화를 읽을 수 있다. 후자의 문서는 박정희가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이제 호랑이가 된 것 같다고 진단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이승만 이후로는 감히 미국의 동의 없이 북한을 공격하고자 하는 남한 지도자가 없을 줄 알았는데 박정희가 북한에 대한 제한된 공격을 주장하자 미국이 대책마련에 들어갔던 것이다.

당시 상황은 자못 심각했다. 북한이 특수부대를 보내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사태에 대해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내세우며 한국이 어떠한 형태의 보복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바로 이틀 후 미국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로호가 북한 근해에서 북한해군에 의해 납치되자 미국은 판문점에서 한국정부를 배제한 채 북한과 쌍무협상을 벌였다.

미국이 얼마나 철저하게 한국의 입장을 무시하고 자국의 이익과 위신만을 추구했는지는 판문점 도끼사건이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문제의 미루나무를 절단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심지어 오키나와 공군기지로부터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폭격기까지 불러들여 북한을 위협했다. 한국은 영문도 모른 채 미국의 대북 군사공세에 끌려들어갔던 셈이다.

1972년 유신체제 성립 이후 한미관계는 또다시 경색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의회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한국정부의 로비사건인 ‘박동선 사건’이나 한국내 민주화운동 탄압을 둘러싼 인도적 문제 등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그 내막은 훨씬 복잡하고 격렬했다. 미국이 “아시아는 아시아인의 손으로”라는 닉슨 독트린을 내세우며 베트남에서 철수하자 박정희 정권은 자주국방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자주국방의 일환으로 핵무기와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추진했다. 이 시기 미국의 비밀문서는 미국이 한국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이미 사반세기 전 한국의 지도자가 미군철수와 미국의 핵우산 제거를 염려하여 독자적인 핵무기와 중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1961년의 5·16쿠데타나 1980년의 5·17쿠데타 당시 미국 군부는 일관되게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한국군부를 지지했다. 전자의 경우 우리 국민은 다소 의아한 심정으로 미국의 불개입을 통한 개입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달랐다. 전시도 아닌 평시에 자국 군대에 의한 국민학살을 지켜본 우리 국민은 한국에서 미군주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사실상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남한에 최초로 ‘정치적 반미’가 태동했던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전기로 반미는 배미(排美) 혹은 극미(克美) 차원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북한의 대남 공세도 한몫을 했지만, 당시는 학생집단과 노동자층을 중심으로 이른바 3민주의(민족·민주·민중)가 사회운동의 사상적 지표가 되었던 때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운동도 NL, PD, CA 등 다양한 분화를 겪으면서 반미에 초점이 모아졌다. 광주민주화운동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회세력이 결집하는 중대한 계기였다. 민주화 과정은 군사정권의 해체뿐만 아니라 극우반공주의에 찌든 냉전적 사고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후 한미갈등은 경제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농산물 및 공산품에 대한 개방압력이 그것이다. 슈퍼201조라는 자국법으로 한국의 수출을 규제하려는 미국의 보호주의에 대해 ‘경제적 반미’가 등장했다. 그러나 작년 한국의 대통령선거 전후에 나타난 대대적인 대미항의는 다분히 ‘문화적 반미’의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반미의식이 시민사회로 확장됨을 의미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미국의 텃세로 금메달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젊은 세대들은 그 해 말 미군장갑차에 의한 두 여중생 치사사건 용의자에 대해 미 군사법정이 무죄판결을 내린 것을 계기로 분노를 터뜨렸다. 빈곤과 억압 아래 자란 기성세대들과 달리 이들은 촛불시위에서 볼 수 있듯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세대다. 월드컵 응원단 붉은악마에서 결집된 그들의 집합감정은 미국과 관련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한미갈등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한국은 남북한 상호교류를 통해 남북관계 안정과 통일을 추구하는 평화적 해법을 추구했다. 이와 달리 미국은 전쟁을 불사하더라도 군사력으로 북한을 길들이고자 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북 정책에서 과거엔 한국정부가 더 호전적이었고 미국이 대화와 화해를 한국정부에 요구했으나, 지금 그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점이다. 한미관계의 역사에서 미국이 이처럼 군사적 방법을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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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임현진 서울대 교수·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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