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호

언제나 진지했던 아버지의 식탁 강의

  • 글: 박근혜 국회의원

    입력2003-05-27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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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진지했던 아버지의 식탁 강의

    대형 지구본을 둘러보고 있는 박근혜 의원의 어릴적 가족들. 오른쪽부터 박서영·박근혜·육영수 여사·박지만·박대통령이다.

    나는 부모님을 많이 닮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특히 정치를 시작한 후 아버지를 닮았다는 얘기를 더 많이 듣는다. 자식이 부모를 닮았다는 이야기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정치인이 된 지금은 그 말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고, 가장 큰 지혜는 삶의 모델을 보고 배워서 얻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인생에서 중요한 세 가지 만남 중 하나가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나의 부모님은 내 삶의 모델이다. 특히 정치인이 된 지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이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집이 너무 가난해서 밥을 굶을 때가 많았고 이웃집에서 생선 굽는 냄새가 나면 몹시 먹고 싶었다던 얘기를 하시곤 했다. 그래서 가난이 무엇이고 배고픔이 어떤 건지를 잘 알고 계셨다. 나라가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국민들이 고생하는 것을 한으로 여기셨던 아버지는 우리 민족이 갱생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셨다. 나는 고달픈 몸을 이끌고 한밤중에 잠을 못 이루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할 수 있다’는 정신 절대 양보하지 않아

    그런 아버지에게 국익은 모든 가치에 최우선하는 것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든 국익과 관련해서는 절대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셨다. 안으로는 국민들이 가난과 패배의식에 젖어 있고, 밖으로는 공산주의의 침략위협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께서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자주 국방을 이루고 국민들의 패배의식을 개조해서 ‘할 수 있다’는 정신을 심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것이 아버지가 생각한 국익이었다.



    아버지는 시작한 일을 흐지부지 끝내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루고 말겠다는 의지가 정말 대단하셔서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챙기셨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심한 후에는 자나깨나 고속도로 생각을 하면서 길을 어느 쪽으로 내는 것이 좋을까를 결정하기 위해 직접 헬리콥터를 타고 몇 번이나 현장을 순시하셨다.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의 구조는 어떻게 할까 종이에다 여러 가지 방향으로 직접 그려보시기도 했다.

    제주도에 농장을 지어 귤을 재배하는 일을 계획하실 때는 1년 수익이 얼마나 될까를 전문가들과 일일이 계산하셨고 나무를 어떻게 심어야 할지까지 생각하셨다. 공업단지를 지정할 때도 반드시 직접 사전답사와 현장확인을 하신 후 결정하셨다. 그렇게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옆에서 보고 들으면서, 나 역시 어떤 일을 할 때는 끝까지 점검하고 확인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수리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당시에는 가뭄으로 국민들이 고통받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는 자나깨나 가뭄걱정을 하셨다. 식사할 때도 ‘오늘은 비가 와야 할텐데…’ 하며 걱정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나도 걱정이 돼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오늘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그럴 때면 우리 가족의 간절한 바람 자체가 ‘비가 오는 것’이 되었다. 아버지의 노심초사 때문에 우리 모두가 나라 걱정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가뭄으로 갈라진 국토를 순례하다가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너무나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역사 관련 연재물 직접 스크랩

    아버지는 역사를 좋아하셔서 역사책을 많이 읽으셨다. 신문이나 잡지에 난 역사관련 연재물을 직접 스크랩하거나 밑줄을 긋고 노트를 해가면서 열심히 보셨다. 주무시기 전에는 당시에 유명했던 역사 강의를 듣고 잠자리에 드셨는데, 나와 함께 역사 현장을 방문할 때에는 역사적인 인물들과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국민들이 우리 역사와 문화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아버지는 많은 유적지를 정비하셨고 국난극복의 훌륭한 전통과 민족문화를 더욱 계승·발전시키려고 노력하셨다. 반면 우리 역사에서 사대주의와 당쟁, 게으름과 개척정신의 결여 같은 부정적 유산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셨다. 아버지는 이를 우리가 반드시 철폐해야 할 나쁜 유산이라고 강조하셨다. 이렇게 역사와 국가적인 이슈에 대해 아버지와 토론을 벌이면서 당시 민감한 나이였던 나는 아버지의 말씀과 정신을 생생히 뇌리에 박게 되었다.

    아버지는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좋아하셨다. 말만 앞세우는 것을 싫어하셨다. 과학자·기술자·기능공들이 국가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을 중시하는 사회 기풍을 만들려고 노력하셨다. 각종 연구소들은 그때 설립되었다.

    아버지의 그러한 태도는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던 나의 진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수출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없나 고민하셨던 아버지는 전자산업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이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할 계획을 짜고 계셨다. 자연 나는 아버지는 물론이고 김완희 박사를 비롯해서 여러분들로부터 전자공학의 중요성을 듣고 접할 기회가 자주 생겼다. 그래서 당시로는 아주 드물게 여성으로서 전자공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1974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나는 연구원이나 교수가 되어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지 않았을까?

    어머니께서 총탄에 돌아가신 것은 이후 나의 삶과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프랑스에 유학을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데 아버지가 공항에 마중 나와 계셨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말할 수 없이 클 텐데, 딸을 생각해서 공항까지 손수 마중 나오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아버지는 내가 프랑스로 유학 가 있을 때 청와대 뜨락에 핀 철쭉과 라일락·목련을 손수 사진 찍고 일일이 설명을 달아서 편지로 보내주셨다. 그리고 나한테서 편지가 왔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편지를 보시려고 몇 계단씩 뛰어서 2층으로 올라오곤 하셨다는 아버지….

    아버지는 경황이 없으신 중에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손수 편지에 써서 동생 편에 보내주신 분이다. 그런 아버지를 공항에서 만나뵈었을 때, 그 모습이 그렇게 작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후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를 도와드리는 일을 함으로써 나의 인생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나의 정치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당시 나는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의 나이였기에 감수성이 예민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일을 겪고 나서 숨돌릴 겨를도 없이 해야 했던 일들은 한창 흡수력이 빠른 젊은 나이의 나에게 살아있는 가르침을 주었다. 어머니의 빈자리 때문에 청와대가 쓸쓸하고 황량하게 보이지 않도록 채우기 위해서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아침에 아버지가 식사하실 때에는 신문을 읽어드렸고, 각종 현안들에 대해서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을 많이 했다. 차를 타고 국토를 둘러볼 때에는 지역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특히 많이 했던 것은 역사와 안보, 우리 경제의 발전에 관한 이야기였다.

    중요한 이야기는 식탁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식사 중에 늘 나라 얘기를 하셨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과의 문제, 나라 전체가 잘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자연 나 역시 모든 관심사가 국익과 나라 걱정에 쏠리게 되었다.

    그후 오랜 시간이 흘러 정치를 시작한 후 나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국익 최우선’이 아니라 정치인 자신의 이익이나 관심사, 정치인이 속한 정당의 이익과 집권을 위해서 결정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정말 속상하고 한탄스러워 분노가 일었다.

    도대체 정치를 하는 근본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일일이 따지고 드느냐’ ‘저쪽 편드는 거 아니냐’고도 한다. 하지만 내가 그냥 배지 달고 왔다갔다하면서 편안하게 정치를 한다면, 그것은 평생 나라 걱정을 하시며 국익을 생각하셨던 아버지에 대한 불효일 것이다.

    탁월했던 정리정돈 솜씨

    아버지는 정리정돈을 잘하셨다. 의자에 앉아 계실 때도 자세를 흐트리는 일이 없이 늘 곧게 앉아 계셨다. 신문이나 잡지를 본 후에는 대충 놓지 않고 늘 반듯하게 접어서 놓곤 하셨다. 물건뿐만 아니라 생각을 정리·정돈하는 것도 습관처럼 하셨다. 아버지는 ‘나라 일을 하다 보면 언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서 미리 미리 대비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그 많은 일을 일일이 챙기실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생각과 주변을 평소에 정리·정돈해놓으신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근검절약이 몸에 배서 청와대에서도 불필요한 전등은 모두 끄셨다. 더운 날씨는 부채로 이겼으며 종이를 아끼기 위해 이면지를 쓰도록 하셨다. 이런 아버지를 보며 자란 나는 학창시절 ‘나는 어떤 면을 고쳐야 하는가? 나의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를 노트에 적어두고 고칠 때까지 노력하곤 했다.

    ‘인생의 반(半)은 습관을 만드는 시기고, 나머지 반은 자기가 만든 습관에 따라서 사는 때’라고 생각한다. 어렵지만 하나하나 좋은 습관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자기를 바르게 하는 것의 시작이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여러 가지 좋은 습관을 배운 것 같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부모님이 차례로 돌아가셨을 때이다. 어머니가 불의에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가장 부러워한 것은 평범한 삶이다. 언젠가 TV에서 한 터키 소녀가 ‘평생 목화밭에서 목화를 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며 미소 짓는 것을 보았는데, 그 소녀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언제나 진지했던 아버지의 식탁 강의

    지금은 철거된 구 청와대 본관 뜨락에 선 박정희-박근혜 부녀. 박근혜씨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면서 아버지의 고민을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그녀처럼 평범하게 남들과 같은 순탄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도 간절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마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흉탄에 돌아가셨을 때, 나는 세상에 내가 설 수 있는 지반이 사라져버린 듯한 격심한 고통을 느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을 알지 못했을 텐데’라는 생각도 들었고, 우리 남매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아무리 어려워도 운명에 굴복해서는 안 돼’ 하는 생각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부모님의 목소리일까.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바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어떤 부끄러움도 남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감정이 튼튼한 기둥이 되어서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

    그 후로 나는 내게 남겨진 일들을 하나하나씩 해나갔다. 어머니가 하시던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를 운영하고 수필집을 냈다. 어떻게 해도 달랠 수 없었던 마음의 아픔을 글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많은 위안과 안정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거센 파도가 와도 끄덕하지 않는 바위를 바라보면서 나도 먼 곳을 바라보면서 흔들림 없이 내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생을 바르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정치 입문 계기 된 IMF 경제위기

    그렇게 살던 나에게 아버지가 다시 떠오르고,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강하게 다가온 것은 IMF사태를 겪으면서였다. 선거철이었던 그 즈음 정치를 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청와대 시절에 보아왔던 막중하고 밑도 끝도 없는 ‘무한 책임’과 공인이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뜻 나설 수 없었다.

    그러다 수많은 회사들이 도산하고, 하루아침에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자가 되고, 가정이 붕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갑자기 나라를 위해서 밤낮 없이 걱정하시고 뛰어다니시던 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힘없이 쓰러뜨릴 수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에 울컥하고 눈물이 솟구쳤다. 당시 나는 오랫동안 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훌훌 벗어버리고,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나는 ‘나만 편하자고 꼭 필요한 이 때에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라는 생각을 했다.

    ‘일할 수 있는 그때에 나는 소홀했다’는 자책이 들 것 같았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불효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정치에 입문했다.

    정치를 시작한 이후에 아버지를 생각하는 때가 많아졌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문제에 접근할 때가 많아진 것이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나라당의 개혁을 주장했을 때, 여러 가지로 매우 힘들었지만 투지 있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도농(都農) 복합지역인 나의 지역구가 발전하려면 대단위 농산물 물류센터가 들어서는 것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실사를 하고 예산을 얻어내는 데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거 하나 하기도 쉽지 않은데 아버지는 국가 전체를 개조하는 일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용기를 갖고 끝까지 추진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그 감격과 보람이란…. 아버지도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으셨을까?

    부모에 대한 도리, 국민에 대한 약속

    우리는 절대빈곤의 시대를 지나, 근대화와 민주화 시대를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다.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국민들 마음은 여전히 편안하지 않다. 사회적 갈등이 점점 커지고 있고, 환경문제·물 문제·의료 문제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된 부문은 여전히 불안하다. 그리고 대통령이나 장관이 바뀌어도 국가운영의 틀은 여전히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다.

    우리는 대통령이나 장관이 바뀌어도 나라의 틀이 흔들리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과거 우리는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해 치열히 고민했다. 그리고 고속도로와 포항제철·새마을운동·중동 진출·전자산업·중화학공업과 같은 돌파구를 만들어 고민을 해결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는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떠한 성장엔진을 가져야 할 것인가?



    시대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아버지 세대는 피나는 노력을 했고 목숨을 바쳤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해서 후세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물려줘야 한다.

    아버지 시대에는 이룬 것도 있고, 못다 이룬 것도 있다. 또한 산업화과정에서 피해를 보신 분들이 있고, 일부 부작용도 있었다. 이제 나와 우리 세대가 할 일은 선대가 이룬 것은 더욱 발전시키고, 못 이룬 것을 이루며, 부작용을 치유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버지 때 못 이룬 이 나라의 민주정치를 꽃피우기 위해 원칙과 일관성을 갖고 노력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부모님에 대한 도리요, 동시에 국민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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