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아동 성폭행 피해가족들의 그 후

남자만 보면 숨는 민지, 이름 바꿔달라고 매달리는 윤아

  • 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3-06-24 13:2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아동 성폭행 피해가족들의 그 후
    “범인은 잡혔어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고 있어요.”

    지난 5월 딸 하늘이(가명·10)를 성폭행한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40일 동안 경기도 일대를 뒤진 김모(47)씨의 사연이 보도돼 화제가 됐다. 많은 이들은 ‘S빌라’ ‘B마트 광고전단지’란 단서만 갖고 기어이 범행장소를 찾아낸 모정에 감동했고, 마침내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에 안도했다. 그러나 김씨 가족은 여전히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5월28일 아동성폭력피해자가족모임(대표·송영옥) 회원들과 함께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았다. 피해 가족들은 ‘피해아동이 여러 차례 진술을 반복해야 하는 현행 법 체제가 아동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진정서를 냈다. 홀로 범인의 흔적을 찾아헤매느라 얼굴엔 잔뜩 기미가 끼고 입마저 왼쪽으로 약간 돌아간 김씨는 진정서 접수를 마치고 서둘러 서울 강남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하늘이의 심리검사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얼마 전 하늘이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어요. 여자아이가 성폭행당했다는 뉴스가 나오니까 하늘이가 이래요. ‘또 하나 터졌네. 엄마, 저거 별거 아냐.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아주 흔해.’ 하늘이는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고 말씨도 험악해져요.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담당의사는 “하늘이는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고 불안한 상태라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지만, 본인이 치료를 완강히 거부하니 좀더 지켜보다가 문제가 커지면 다시 오라”고 권했다. 심리검사를 위해 두 차례 병원을 찾았던 하늘이는 “병원에서 그런 얘기 하는 거 너무 창피하다”며 울부짖었다. 병원 문을 나선 김씨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김씨는 아이가 사라진 3월19일부터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하늘이는 성폭행을 당한 뒤 다니던 보습학원을 그만뒀다. 요즘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에 처박혀 컴퓨터에만 매달린다. 시험을 치면 늘 90점 이상 받을 만큼 공부를 잘했던 하늘이는 며칠 전 8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와서는 “이게 뭐야, 이럴 순 없어…” 하며 속상해했다. 그러나 김씨는 그 일 이후 하늘이가 공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며칠 전에는 느닷없이 검도를 배우겠노라고 선언했다.

    “남편이 ‘왜 아저씨를 따라갔냐’고 다그치니까 아이가 힘들어합니다. 남편과 제 사이도 나빠졌어요. 남편이 부부관계를 요구할 때마다 자꾸 하늘이가 생각나서…. 하늘이는 점점 말수가 줄어가는데, 전 요즘 아무나 붙잡고 쓸데없는 얘기를 늘어놓는 버릇이 생겼어요. 범인은 우리 가족을 모두 죽인 거나 다름없어요.”

    후유증 평생 지속되기도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성범죄 사건 중 피해자가 만 12세 이하인 사건은 599건에 이른다. 피해자가 만 6세 이하인 사건도 105건이나 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실제로 발생하는 아동 성폭행 사건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해 전국 104개 성폭력상담소의 집계 결과 4만8112건의 성폭행 상담 중 피해자가 13세 이하인 경우는 5598건으로 11.6%에 달했다. 어린이 스스로 입을 다물거나 부모가 성폭행 사실을 공개하기 꺼리는 정서를 감안한다면, 대한민국에서 아동 성폭행은 교통사고처럼 언제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상사’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아동 성폭행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봐야 하는 것은 사건 자체의 흉악할 뿐 아니라 피해 어린이가 두고두고 고통스러운 후유증을 겪기 때문이다.

    피해 어린이들은 대개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다. 전문가들은 “성폭행에 노출된 기간과 강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불안, 공포, 위축, 퇴행, 성의식 장애 같은 증세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후유증은 ‘사고’ 후 몇 개월 이내에 사라질 수도 있지만, 심한 경우 몇 년간 혹은 평생 지속된다.

    윤아(가명·9)는 성폭행을 당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공포와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고 지낸다. 2001년 가을, 초등학교 1학년이던 윤아는 같은 동네 6학년 남자아이 9명으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맞벌이하는 부모와 학원에 간 오빠가 집을 비운 사이에 놀이터에서 만난 남자아이들이 윤아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칼을 들이대고 위협했던 것이다.

    경찰에서 울다 실신해가며 사건을 진술한 윤아는 “이사 가자”고 부모를 졸랐다. 이듬해 2월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하자마자 윤아는 “내 이름 싫어. 바꿔줘”라며 매달렸다. 가족들은 윤아가 새 이름표를 달고 새 학교로 전학하고 집안 가구까지 모조리 바꿨으니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올 초 윤아의 증세는 다시 심해졌다.

    “2월 들어 밤에 자다 깨서 ‘귀신을 봤다’고 울거나 이불에 오줌을 싸는 일이 많아졌어요. 그러더니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것 같다’며 또 이사를 가자고 졸랐어요. 아마도 3월에 다시 학교에 갈 게 두려웠나 봅니다. 그래서 급하게 이곳으로 이사했습니다.”

    경기도의 한 소도시로 이사 온 윤아는 또래 아이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잠도 엄마와 둘이서만 자야 하고, 엄마가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와야 한다. 친구도 거의 사귀지 않는다. 방과 후엔 집에 돌아와 책을 읽고 컴퓨터 게임을 하다 잠드는 게 생활의 전부다. 오빠가 어쩌다 예전 이름으로 부르면 “난 ○○가 아니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덤벼든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에게 주먹질을 해대기도 한다. 아빠는 오죽 충격이 컸으면 그럴까 싶어 죄다 받아준다.

    “지방으로 이사 오고 나니 근처에 전문의가 없어 정신과 치료도 그만뒀습니다. 이러다 사춘기가 되고, 성인이 되어서 자기 몸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까봐, 그래서 쉽사리 가출을 하거나 원조교제에 빠져들까봐 걱정입니다. 어떻게 키워야 할지 정말 막막해요.”

    위축, 퇴행, 우울증, 성의식 장애…

    2년 전 발생한 조카딸의 성폭행 사건 재판을 수습하고 있는 김모(43)씨는 “조카와 여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털어놨다. 여동생 모녀는 지금도 불쑥불쑥 불안감과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김씨의 조카 민지(가명·6)는 2년 전 부모가 이혼절차를 밟느라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다가 큰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민지는 아버지는 ‘아저씨’라고, 큰아버지는 ‘나쁜 놈’이라고 부른다. 길을 걷다가도 저만치에 건장한 남자가 보이면 얼른 외할머니 뒤로 숨는다.

    민지 엄마는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치밀어 오르는 화기를 식힐 수 없어 잠을 자지 못한다. 얼마 전에는 1년 남짓 사용해온 전화번호를 바꿨다. “이상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는 게 이유였다.

    “할머니와 TV를 보는데 드라마에서 슬픈 장면이 나와 할머니가 눈시울을 적시니까 민지가 그랬대요. ‘할머니, 민지도 불쌍한데…’라고. 할머니가 ‘왜 민지가 불쌍해?’ 하고 물으니 ‘큰아빠가 찌찌 찢어서…’라고 해요. 그런 아일 지켜보는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2000년 5월 제주대 의대 곽영숙 교수(소아정신과)가 50명의 성폭행 피해 자를 연구한 뒤 발표한 논문(‘성학대를 받은 소아청소년의 정신의학적 후유증에 관한 연구’)은 성폭행 후유증을 잘 보여준다.

    곽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가장 두드러진 증세는 우울증이며, 특히 어린이 피해자들에게선 야뇨증과 격리 불안, 퇴행, 학교 거부증 등이 나타났다. 또한 어린이들은 1년이 지났을 때 오히려 우울증이 더 심해지고 성 행동에도 심각한 문제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었다. 어릴 때 성폭행을 경험하고 청소년이나 성인이 됐을 경우 충동 조절의 어려움, 죄책감, 난교, 가출 등의 문제를 보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성폭행을 경험한 아이에게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문제행동은 위축감이다. 전문의들은 성폭행 피해 아동이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학업 수행에도 장애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고 전한다.

    성폭행을 겪은 나이가 어릴수록 그 피해는 크다. 곽교수는 “성학대를 받은 나이가 어릴수록 성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 성폭행에 따른 정신적 상태에 큰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며 “사춘기의 신체 변화 등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위험이 크다”고 진단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의붓아버지로부터 약 두 달 동안 성추행을 당한 한 어린이는 실제로 성의식 장애를 보였다. 이 아이는 상담과정에서 “처음에는 새아빠가 욕을 하면서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내쫓는다’고 해서 무섭고 싫었다. 그렇지만 조금 지나니까 괜찮았다. 새아빠를 보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함께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이 아이는 부모와 떨어져 쉼터에서 생활하는 동안 상담원과 보모를 자기 뜻대로 이용하려 하고, 하자는 대로 해주지 않는 상담원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팬티 장난’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울음을 터뜨리며 위축됐고 밤에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렸다.

    후유증을 앓는 것은 아이만이 아니다. 때로는 부모가 아이보다 더 심각한 후유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에서 아동 성폭행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정명희씨는 “부모가 아이보다 더 크게 충격받은 경우를 많이 봤다”고 전했다.

    “지방 소도시에서 한 아이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성추행을 당했어요. 부모는 회사에 휴가를 내어 아이를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데려왔습니다. 하지만 정신과 진단 결과 아이에겐 특별한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나이가 어리고 일회성의 ‘사고’였을 경우 아이는 길을 걷다 넘어진 것을 금세 잊듯 쉽게 잊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보다 더 충격을 받고 화를 내면 오히려 아이를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 수 있어요.”

    2000년 경기도 용인의 모 아파트 단지에서 놀이방을 운영하던 60대 남자가 유아들을 성추행해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도 부모들에게 심각한 후유증을 일으켰다. 당시 피해 아동 40여 명과 부모들을 상담했던 한양대 의대 안동현 교수(소아정신과)는 “아이는 잊어가는데 부모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안교수를 비롯한 전문의들은 부모들을 상대로 아이를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에 관해 두 차례 강의를 했다.

    “많은 부모들이 굉장히 놀라고 당혹해하더군요. 그들 가운데 일부는 성에 대한 혐오감이 생겨 부부관계를 기피하거나 서로 ‘내탓 네탓’ 공방을 벌이다 부부 사이가 나빠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아이를 필요 이상으로 과보호하거나 심하게 추궁하는 부모도 있었어요. 이럴 경우 아이는 오히려 안정을 찾기 어렵게 됩니다. 부모가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대처하는 게 중요해요.”

    성폭행 피해 아동들이 제대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1999년 집안에 침입한 괴한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주영이(가명·15)도 이런저런 형편으로 치료를 포기한 경우.

    “큰 대학병원 정신과에 다녔어요. 병원 가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예약을 하고 가도 병원 복도에서 한두 시간씩 기다리는 게 예사였어요. 주영이가 그때 6학년이었는데, 주변에서 ‘저렇게 어린애가 뭐가 잘못돼서 정신병원까지 왔을까’ 싶은 듯 쳐다보는 시선이 나도 아이도 너무 싫었어요. 더구나 주영이는 병원에 가려면 학교를 빠져야 했는데 친구들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결석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스트레스였죠. 한 시간 상담에 6만∼7만원씩 하는 치료비도 부담스럽고…. 결국 대여섯 번쯤 다니다 그만뒀어요.”

    앞서 언급한 윤아는 1년 정도 정신과 치료를 받았는데, 그 정도면 아주 오래 치료를 받은 축에 든다. 제주대 곽영숙 교수는 “조사했던 50명 중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전혀 없다고 응답한 피해자가 33명이나 됐다”고 전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은 피해자들 중에서도 1회성 상담에 그친 비율이 64%에 달했다. 6개월∼1년 정도 치료받은 어린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정신과 치료는 ‘그림의 떡’

    서울 강남에서 정신과 의원을 운영하는 소아정신과 전문의 김창기씨는 “‘정신과’에 대해 갖는 선입견과 치료 필요성에 대한 부모의 인식 부족 때문에 중간에 치료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개는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등 법적 문제가 종결되면 아이 치료도 끝났다고 생각한다는 것. 그러나 김씨는 “몸에 난 상처와 달리 정신적 상처는 눈으로 볼 수가 없으니 아이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며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부모가 모르는 사이에 후유증은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전문적인 정신과 치료를 원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치료를 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도 집 주변에서 소아정신과 전문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지난해 12월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성민이(가명·7)는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의정부시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전문의가 해외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기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성민이 엄마는 “아이에게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얼마 전에 알았다”며 “급하게 알아보니 의정부에서 성폭행당한 아이를 잘 상담해준다는 의사는 그분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성민이는 요즘도 문득문득 멍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 엄마와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옷도 혼자서 못 입고 바지에 오줌을 싸는 등 아기가 된 것 같은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아동 성폭행 피해가족들의 그 후

    아이들이 앓는 후유증은 부모에겐 더 무거운 짐이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은 아동성폭행 피해 부모들

    대한소아정신과청소년의학회(회장·안동현)에 회원으로 가입한 정신과 전문의는 300여 명. 이들 가운데 외국 유학을 다녀오거나 국내 의료기관에서 수련을 거친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105명이다. 이중 서울과 경기도 신도시 일원에 근무하는 전문의는 66명으로 전체의 63%에 달한다. 또한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전문의는 52명으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상당수 성폭행 피해 어린이들이 정신과 치료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이에 대해 안동현 교수는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짧은 기간에 양성할 수 없다. 그 보다는 가정의학과, 산부인과, 소아과, 정신과 등 관련 분야 의사들에게 성폭행 피해 아동 대처 방법을 교육시키는 게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해결책”이라고 충고한다.

    한 시간 진료에 5만∼7만원씩 드는 치료비도 피해 가족들에겐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윤아의 아버지는 “윤아 일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고 했다. 윤아가 성폭행당한 것을 안 직후 아내가 직장을 그만둔 데다, 윤아가 원하는 대로 두 차례 이사하고 가구를 모조리 바꾸느라 큰돈이 들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면서 윤아 아버지도 서울 여의도에 있던 직장을 그만둔 상태다. 서울 시내에 있는 병원까지 다녀오면 치료비며 교통비 등으로 10만원 이상을 써야 한다.

    하늘이네도 사정이 비슷하다. 지체장애자인 남편 대신 공장에 다니며 월 90만원을 버는 김씨는 범인을 잡으러 나서느라 지난 3월 공장을 그만뒀다. 택시를 잡아타고 경기도 일대의 ‘S빌라’를 찾아다니느라 500만원의 빚도 졌다. 김씨는 “하늘이가 병원 치료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치료비 때문에 완치될 때까지 보낼 자신이 없다”고 털어놨다.

    39만원짜리 정부

    현재 정부가 성폭행 피해자에게 제공하는 지원금은 1인당 최대 39만9000원이다. 정부는 ‘치료비에 대해 전액 지원한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이는 그야말로 ‘원칙’일 뿐이다. 올해 국가가 이 부분에 배정한 예산은 3억5900만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다. 지난해 3억5200만원의 예산 중 28%인 9850만원만 집행됐고 나머지는 국고로 환수됐다.

    집행률이 이처럼 낮은 것은 복잡한 지급절차 때문. 여성부가 각 시도 자치단체에 예산을 배정하면 자치단체는 지역 소속 성폭력상담소에 예산을 배정한다. 성폭행 피해자는 의료기관에서 진료를 받은 뒤 진료비 영수증을 성폭력상담소에 제출해야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그나마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 111개 성폭력 상담소 중 62개 상담소만이 정부로부터 치료비를 배정받았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국성폭력상담소(소장·이미경)의 경우 1년간 치료비를 지원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45명이다. 지난해 이 상담소가 처리한 성폭행 상담건수가 2961건이고 강간 상담만 해도 942건임을 고려할 때 연간 45명분의 지원금은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이미경 소장은 “이 때문에 치료가 시급하거나 경제사정이 어려운 피해자에게 우선적으로 의료비를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여성부 김기환 인권복지과장은 “전액 지원의 범위를 신체적 상처가 아문 정도로 봐야 할지, 정신과 치료 완료 시점까지로 봐야 할지 내부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상담소를 통한 의료비 지원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많아 의료기관에서 직접 예산을 집행하는 방식 등을 고려 중”이라고 덧붙였다.

    성폭행 피해 부모들은 “아이가 성폭행당한 걸 알게 되면 마음 추스리는 것도 힘겨운데, 그런 아이를 데리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녀야 한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우선 성폭행 상해진단서를 발급해주는 병원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고소를 위해서 경찰과 검찰, 법원, 변호사 사무실 등을 전전해야 한다. 또 소아정신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을 찾아 드나들어야 한다. 성폭력상담소의 문도 두드려야 얼마 안 되는 치료비나마 지원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피해자와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피해 아동의 치료와 교육, 법적 대응 등을 한꺼번에 지원하는 기관 설립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서울 구로구에 자리한 ‘한국성폭력위기센터’는 성폭력 피해자 진료와 상담, 법적 대응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센터와 연계된 병원과 법률가들을 소개시켜줄 뿐, 모든 대응이 종합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 신의진씨는 교육치료센터(Therapeutic preschool)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신씨는 “성폭력 피해 아동들은 친구를 사귀지 못하거나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며 “교육과 치료를 겸하는 기관에서 이들에게 정신적 상처를 치료해주면서 동시에 과도한 성적 자극으로 인해 왜곡된 정신적 발달을 교정해줘야 한다”고 조언한다.

    5월28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접수시킨 아동성폭행피해가족모임은 앞으로 ‘피해자 권리 찾기’에 나서기로 했다. 송영옥 대표는 “부모들은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지만, 결국 범죄의 피해자일 뿐”이라며 “초보 수준의 사회적 지원체제에 맞서 피해자로서의 권리를 찾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피해 가족들은 진정서에 ‘범죄피해자구조법을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확대 적용해달라’는 내용을 포함시켰고, 최근 입법청원을 위한 법률 개정안을 마련했다. 범죄피해자구조법은 범죄로 인한 사망자의 유족이나 신체적 중장해를 입은 피해자를 국가가 구조할 목적으로 1987년 제정됐다.

    그러나 현행 범죄피해자구조법은 ‘생명을 잃거나 신체적 상해를 입은 자’로 그 대상을 한정해 신체적 상처보다 정신적 상처가 큰 성폭행 피해자는 이 법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성폭행 피해자들이 받은 정신적 피해가 신체적 피해만큼 심각할 뿐 아니라 장기간 지속되므로 이들에게까지 구조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고 있다. 충북대 박강우 교수(법학)는 “성폭행은 성적 자유를 유린했다는 측면에서 신체에 대한 폭력과 동일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봐야 한다”며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지원이 전무한 현실에서 범죄피해자구조법을 개정하는 것은 그나마 활용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

    범죄피해자구조법은 유족에게 최대 1000만원, 신체적 상해를 입은 피해자에게 300만∼600만원을 지급한다. 그러나 검찰에서도 이 구조금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나와 최근 법무부에 유족 구조금을 3000만원으로, 장해 구조금을 900만∼1800만원으로 확대하자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실제로 현행 금액 기준은 1991년에 결정된 이래 12년간 변동이 없었고 이마저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범죄피해자구조금을 지급받는 피해자는 매년 줄어드는 추세다. 지난해에는 50명에게 4억7200만원을 지급했는데, 이는 98명에게 8억2300만원을 지급한 1999년 실적의 절반 수준이다.

    이에 대해 대검찰청 공판송무과 곽경남 계장은 “범죄피해자구조법에 대한 국민 인식이 낮은 편”이라며 “최근 대검찰청은 각 지방 검찰청에 범죄피해자구조금에 대해 적극 홍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다시 상처받는 현실

    취재중에 접한 새나(가명·5) 아버지는 며칠 후 캐나다로 떠날 예정이었다. 4년 전 이혼하고 혼자 새나를 키워온 그는 새나가 성추행을 당한 일을 계기로, 캐나다에 몇 개월간 머물려던 계획을 바꿔 아예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

    새나는 아버지와 함께 매일 저녁을 먹는 식당 주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새나 아버지는 “다른 아동 성폭행 사건들의 처리과정을 보니 일을 벌여봤자 아이만 크게 다칠 것 같다”며 “일단 고소는 했지만, 더 이상 대응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새나에게 고국은 결국 ‘피해자가 한번 더 피해를 보는 곳’으로 기억되게 된 셈이다.

    성폭행에 대한 법적 제재 수단과 성폭행 피해자들의 의식은 날로 개선되고 있다. 성폭력범죄 관련 법규가 제정되고, 피해자들도 그저 덮어두기보다는 관련 기관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최근 겸찰은 피해 부모들이 3년 전부터 줄곧 요구했던 바를 받아들여 “아동성폭행 전담검사제를 실시해 여러 차례 진술해야했던 관행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회적 제도는 아직까지 피해자들이 다시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초보적인 수준이다. 어린이가 여러 차례 피해진술을 해도 법정에서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후유증 치유 책임은 전적으로 피해 부모에게 전가하는 실정이다. 연세대 심희기 교수(법학)는 “국민의식이 성장해 법률 등이 제정됐다기보다는 국제사회의 압력에 의해 만들어진 만큼, 피해자들을 실제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하는 방향으로 정착되지 못했다”고 성폭행 피해 구조 관련제도를 비판한다.

    아직 자아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나이에 성폭행을 당한 어린이들이 사회적 배려 속에서 아픈 기억을 점차 잊게 해주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요원하기만 한 일일까. 성폭행 피해 아동들의 미래를 위해 보다 성숙되고 세심한 배려를 고민해야 할 때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