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내가 기르는 작물은 내 삶의 거울

  • 글: 장영란 odong174@hanmail.net

    입력2003-06-26 1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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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기르는 작물은 내 삶의 거울

    자귀나무 잎이 피어나면 집 앞은 나뭇잎으로 울타리를 두른다. 공 든 아이는 필자의 아들 김규현

    햇볕이 뜨겁게 내리쬔다. 시원한 그늘이 그리워 마루에 걸터앉는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비가 오시려나. 후텁지근하다. 나무가 이파리를 흔들다 온몸을 휘청거린다. 은사시나무는 잎을 빙글 돌리며 흔들리고, 자귀나무는 줄기까지 휘청거린다. 집 앞에 서 있는 나무들이다. 집터를 다지면서 전부터 있던 나무를 그대로 남겼더니, 잎이 무성하게 돋아나 집 앞을 감싸준다. 철마다 다른 살아 있는 울타리다.

    처음에는 무슨 나무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 그런데 어느 이른 봄 노란 꽃이 살며시 피어났다. 생강나무가 있었구나. 뒤이어 옛이야기에 나오는 깨금(개암)나무도 보인다. 아, 저게 개암나무구나. 진달래가 피어나고 그 뒤를 이어 조팝꽃이 하얗게 깔린다. 한쪽에는 키 작은 골담초가 다소곳이 핀다. 사이사이 민들레가 피고지고. 다음에는 산벚꽃이 활짝 피고 그 잎이 무성하게 자라나 집 앞을 가려주기 시작한다. 은사시나무에 잎이 돋아나 바람에 파르르 흔들린다. 바람에 나부끼는 잎은 햇볕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반짝. 참나무와 분디나무에 잎이 돋아날 때, 큰꽃으아리가 숲 그늘 속에 피어 있다. 모내기철이 돌아오면, 때죽나무꽃과 찔레꽃이 피어 온 마당을 향기로 가득 채운다. 때죽꽃이 져서 서운해할 때, 쥐똥나무 작은 꽃이 얼굴을 내민다. 가장 늦게 자귀나무에 꽃이 피면, 우리 집은 나뭇잎으로 울타리를 두른다.

    밤하늘 보며 ‘볼일’

    이렇게 쓰고 보니 나무가 많기는 참 많다. 꽤 넓은 숲 같지만 사실 키 큰 나무 한 줄이다. 큰 나무 아래 작은 나무가, 그 아래 덩굴나무와 풀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 그대로라 이리 풍성하리라. 한데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달라, 어떤 이는 거기까지 확 밀었으면 마당이 넓어지고 좋았겠다고 하기도 하고, 나무가 앞을 가로막아 전망을 망쳤다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자연 그대로라 언뜻 보면 풀과 잡목이 무성하다. 하지만 우리는 울타리 나무들이 좋다. 일년 내내 새들이 날아들어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한다. 그러다 몇몇은 처마 밑에 둥지를 틀고 살기도 한다. 자귀나무에 꽃이 피면 긴꼬리제비나비가 날아들고, 나무 그늘 사이에 취도 잔대도 개머루도 자란다.

    도시 살아 자연을 몰랐으니, 마당에 나무를 심는다고 했으면, 어떤 모습일까? 이렇게 우리 나무, 우리 꽃을 심고 가꿀 수 있었을까? 이름조차 몰랐던 나무들도 있는데…. 나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이름을 알게 되고, 해마다 새롭게 나무를 알아가기에 더욱 정이 가지. 집 앞 나무들은 자연에게 다가가는 징검다리다.



    여름이 다가오면 나무 울타리가 앞에 둘러쳐지고, 우리 집은 마당 평상까지 넓어진다. 일하다 쉬기도 하고, 손님 오면 걸터앉아 이야기 나누고. 일도 하고. 울타리 나무는 그런 우리 생활을 적당히 가려주고, 해지기 전부터 그늘을 드리워준다. 바깥 눈길을 마음 쓰지 않고 집 안에서 입던 차림으로 마당에서 지내기도 편하다. 밤에 자다 오줌 누러 그냥 마당에 나간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잠깐 넋을 잃는다. 멀리 인도까지 가지 않아도 하늘 아래서 한가하게 볼일을 볼 수 있다. 사람도 자연이 된 기분. 우주 속에 홀로 서 있는 순간.

    자연은 무엇일까? 인디언들은 땅을 ‘어머니’라 한다. 나에게 자연은 늘 새롭고, 다 헤아릴 수 없는 세계다.

    남덕유산이 보이는 이 곳은 자연이 많이 살아 있다. 논둑에 할미꽃이 지천이고 밭둑에는 하늘타리, 머루 덤불이 산다. 먹구름 사이로 하늘이 동그랗게 열리며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영화에서 보던 서광이 비추는 장면도 보았다. 여름밤이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두꺼비도 산다. 가을이면 다람쥐가 돌아다닌다. 바로 우리 집 마당에. 한편 자연은 두렵기도 하다. 눈이 오면 길이 끊길까. 숲길을 다닐 때는 뱀에 물릴까.

    몇 해 산 것은 아니지만 해마다 자연과 함께 큰 고비를 넘겨왔다. 농사 두 해째인 1999년. 고추농사를 제법 벌였다. 남들이 하듯, 2월부터 비닐집을 지어 고추모를 길러내고. 밭에 거름 듬뿍 내 심고.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아도 끄떡없게 말뚝을 박고 끈으로 엮어주었다. 드디어 풋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때 태풍이 몰려왔다. 산에 나무들이 휙휙 넘어가던 그 태풍 ‘올가’가. 비바람이 우리 동네를 휩쓸던 시간 고추밭에 있었다. 비바람에 고추가 넘어가기 시작하는데…. 줄로 엮여 있으니 하나가 넘어가면 줄줄이 넘어간다. 그걸 막으려고 해머로 말뚝을 더 깊이 박는데 비바람에 땅이 물러져 어찌 할 수가 없다. 다만 고추와 함께 비바람을 맞고 있을 뿐.

    올가가 지나간 뒤 고추밭은 처참했다. 줄줄이 엮여 넘어간 고추를 일으켜 세우려니. 가지째 꺾이고. 풋고추가 후드득 떨어져 발에 밟히고. 흙탕물에 범벅이 된 잎은 찢기고. 그때는 하늘을 원망했고 떨어진 고추를 아까워했다. 고추를 많이 달리게 하려는 사람 탓이나 스스로 돌아볼 줄 몰랐다. 올가가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해 고추를 제법 땄다. 유기재배하면 병에 속수무책이라는데 병이 크게 들지 않았다. 그래 이듬해 자신을 가지고 다시 고추농사를 크게 벌였다. 고추가 주렁주렁 열리고 빨갛게 익어갈 무렵 장마가 왔다. 비가 그치나 싶으면 또 오고. 고추가 익으면서 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멀쩡한 고추가 익어가며 병이 드는데…. 고추가 아닌 병이 주렁주렁 달린 걸 겪고 나서야, 사람 욕심을 버리고 고추를 고추답게 기르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2000년 3박4일 70시간 쉬지 않고 내리던 비. 이듬해 팔십 난 할머니도 처음 겪는다는 지독한 가뭄. 지난해 사람이 해놓은 짓거리를 모두 부셔버릴 듯 온 큰비. 겨울에도 밤새 눈이 와 비닐집이 휘어지고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산에 가보면 뿌리째 뽑혀 누운 큰 나무가 여기저기 있다. 올해는 자연이 어떤 놀라운 일을 벌이실까.

    나 역시 자연이 기르는 목숨인데…

    비바람 불고 난 뒤 들에 가면 곡식이 넘어지고 땅 모양이 바뀌기도 한다. 참 속상하고 어쩔 때는 어찌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나고 생각하니, 약하고 웃자란 놈들을 솎아주는 자연의 손길이다. 그러면서 자연은 우수한 유전자를 남겨 진화해왔으리라.

    가물어서 걱정. 비가 너무 와서 걱정. 날이 차서 걱정. 자연을 모르면서 농사는 잘하고 싶으니 걱정이 많다. 하나하나 겪으면서 사람이 할 도리를 다 하고 나머지는 자연을 믿고 맡겨야 한다는 걸 배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나! 자연을 믿고 맡기기보다 나도 모르게 자꾸 나서려 한다. 얄팍한 지식을 무기로 휘두르며…. 하다하다 안 되면 그제야 자연을 제대로 살펴보기 시작한다. 언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눈이 뜨일까?

    씨 뿌리고 가꾸어 더 좋은 씨를 얻기까지 여러 가지 일이 있다. 곁에서 자라는 풀을 뽑고, 벌레도 잡고. 씨를 서너 개 뿌려 좋은 놈만 살리고 나머지는 솎아내기도 한다. 모두 살려고 태어난 목숨이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한다고 해도 씨조차 못 건지기도 하고. 튼실한 씨를 가득 얻어 여러 군데 나누어 퍼뜨리기도 한다. 참깨 싹을 솎아주며 나를 돌아본다. 나는 어떤 싹일까? 좋은 땅에 튼실하게 뿌리내려 자라는 싹인가? 메마른 곳에 떨어져 배리배리하게 살아가는 싹인가? 나 역시, 자연이 기르는 목숨이다. 나는 어떤 씨를 퍼뜨릴까? 내 자식들은?

    어제 저녁 큰애가 “오늘 하루를 보내며 내가 네 사람이 된 것 같아. 엄마 오른팔, 동생과 엄마 사이 중재자, 나 자신, 일꾼 이렇게 넷”이라고 한다.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자기가 마음먹은 것을 스스로 힘으로 해낸 하루였단다. 큰애 하루는 이랬다. 아침에 동생이 마당에서 축구를 하다 그 공이 텃밭으로 굴러가 토마토를 쳤다. 엄마는 그걸 보고, 텃밭에 그물을 쳐야겠다고 그물을 끌고 오다 도랑에 발이 빠지고. 동생은 공을 높이 차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고 속상해하고.

    그걸 보던 큰애가 나섰다. “그럼, 이 누나가 축구장을 새로 만들어줄게.” 사실 아무 계획 없이 말했는데, 집 옆 공터가 떠올랐고. 그 주인에게 달려가 허락을 받고, 무성하게 자란 풀과 아카시아 나무를 베고, 말뚝 박아 그물 씌워 축구 골대 만들 준비하고. 내친김에 도랑을 건너는 다리도 새로 만들고. 그렇게 움직이다 들어오니, 책상에 톨킨 원서. 그동안 읽고팠지만 미루곤 했는데. 생각과 달리 술술 읽히고. 저녁에는 비 오시니 아궁이에 군불 지피면서, 오른팔을 다친 엄마의 오른팔이 되어, 배추 뽑아 절이고 들어왔단다. 공부도 일도 놀이도 맘먹은 대로 한 하루. 자기 안에 있는 힘을 충분히 살린 하루였나 보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자연은 자기 자신이리라. 나를 만든 씨, 그러니까 유전자 속에 얼마나 많은 인류의 지혜가 담겨 있을까? 내 씨를 받은 우리 아이들. 자라나 어떤 씨를 맺을까?

    내가 기르는 작물은 내 삶의 거울

    빈터를 축구장으로 만들기 위해 누나가 낫으로 풀을 베면 동생이 갈퀴로 긁어 모은다.

    나무들은 짙푸르고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난다. 사람이 날마다 지나는 길, 차들이 다니는 길도 풀이 자라 낫질을 할 정도다. 그 사이 보랏빛, 흰빛 도라지꽃이 피어난다. 더덕꽃도 핀다.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 신기한 모양이다. 종처럼 생겼는데, 꽃부리가 다섯 갈래로 갈라져 뒤로 젖혀져 있고, 그 속에 오각형의 무늬가 있다. 사람이 흉내내기 힘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태풍이 여러 차례 쏜살같이 몰려오곤 한다. 비 그치고 나면 곡식들은 부쩍부쩍 자라난다. 풀들은 번쩍번쩍 자라나고. 큰비가 온다면 미리 대비하랴, 비 설거지하랴 일거리가 쉼이 없다. 여름풀과 막바지 싸움이다. 이때가 지나면 풀들도 씨 맺을 준비를 하느라, 하루가 다르게 뻗어나가지 못한다. 또 곡식들도 웬만큼 자라 풀에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다. 그래도 생명이 살아 있는 한 풀은 끝없이 자라난다. 김매는 일이 밥 먹는 일로 몸에 익는 수밖에.

    소서(小署) 무렵이면 모내고 40일이 지난다. 나락은 포기나누기를 마치고, 통통하게 굵어지며 알차기에 들어간다. 사람으로 치면 사춘기인 셈. 한창 영양을 빨아들이며 이삭을 맺을 준비를 하는 때다. 논에 마지막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살펴보고 김도 매준다. 논에 들어가면 모 포기 하나하나가 자세히 보인다. 이때가 지나 이삭이 나온 뒤 논에 들어가면 발길에 잔뿌리가 드득드득 끊기는 걸 느낄 수 있다. 또 김을 매려 몸을 숙이면 나락 잎이 얼굴을 찌른다. 논은 사람 손을 벗어나 스스로 설 차비를 하고 있으니 마지막 손질을 하자.

    올벼는 대서 전에 이삭이 패기 시작한다. 볍씨는 일찍 이삭이 패는 올벼(조생종), 늦게 이삭이 패는 늦벼(만생종), 중간인 중생종이 있다. 올벼부터 차례차례 이삭이 올라온다. 우리 동네는 일찍 서리가 오니, 올벼를 많이 한다. 우리도 논 두 다랑이는 올벼를 한다. 여럿이 함께 물길을 쓰니, 물길이 지나가는 논은 아래 논과 함께 물을 떼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논은 이삭 여무는 기간에 긴 벼를 한다. 그러니 이삭도 차례차례 나온다. 논에 가면 이삭이 나오는가? 살핀다. 이삭 소식이 중요한 뉴스다.

    가지, 호박, 오이, 고추, 풋콩 열매가 살그머니 굵어져 주렁주렁 달린다. 여름 해 기운이 영글었으니 이걸 먹으면 해 기운을 먹는 셈이다. 가만 있어도 땀 흐르는 한여름. 씨암탉 잡아 몸보신하는 날도 있지마는, 햇살을 담뿍 받은 싱싱한 남새, 여름열매보다 더 좋은 찬 어디 있나? 햇보리를 절구에 콩콩 방아 찧어, 올콩 따서 위에 얹어 여름 밥을 지어놓고. 가지 호박 오이로 반찬을 한다. 찐 가지를 쭉쭉 찢어 무친 가지나물 맛. 갓 딴 호박을 썰면 단면에서 송송 솟아나는 맑은 진액, 오이를 따 맨손으로 잡으면 따가운 걸 내 손으로 농사하기 전에 어찌 알았으랴. 비름나물, 고추 순, 콩잎, 호박잎, 동부콩잎도 빠질 수 없고, 박잎전도 입맛을 돋운다.

    큰비, 몇날 며칠 이어지는 비가 오면 온갖 병이 나타난다. 고추에 탄저병, 토마토는 배꼽썩음병, 나락은 도열병, 호박과 박 속에는 애벌레가 자리 잡고. 약을 치지 않는 우리 농사는 병이 안 나게 예방을 해야지 한번 병이 나면 손 쓸 길이 없다. 그러려면 먼저 땅이 건강해야 하고 그 땅 힘에 맞는 곡식을 제 때 심어 튼튼히 키우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사람이 맛으로 먹는 고추와 토마토, 과일들에는 병이 오곤 한다. 그걸 막아보려 굴뚝물(목초액), 현미식초, 백초효소를 뿌려주곤 하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내가 기르는 작물은 곧 내 삶의 거울이다. 작물이 건강하면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거고, 작물에 병이 나면 내 생활부터 돌아봐야겠지.

    가만 앉았어도 땀이 흐르고 저녁에도 더워 잠들기 힘든, 큰 더위 대서(大署)다. 꽃들도 한낮을 비껴 핀다. 박꽃은 저녁 땅거미가 내리면 하얗게 피어나고, 새벽 햇살에 호박꽃 나팔꽃이 피어난다. 이 더운 기운에 대추, 밤, 호두가 영근다. 산에는 무릇꽃이 피어나고, 으름이 영글어간다. 매미 소리 온 산천을 채우고, 산길에 꿩 병아리 겁 없이 길가를 돌아다닌다.

    장마가 끝나고 햇살이 뜨거우니 만물이 신나게 자라 온 산천 검푸르다. 나락은 통통하게 알이 차 이삭이 고개를 내민다. 이삭이 나오기 시작하면 오리를 논에서 빼낸다. 오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나락이 무성하게 자랐으니 오리가 할 일은 다 마쳤다. 사람도 오리도 논에 들어가지 않는 게 도와주는 일이 된다. 그래도 나락이 탈 없이 잘 자라나나 아침저녁으로 둘러본다.

    콩꽃이 핀다. 줄기 겨드랑이 사이에 보랏빛, 흰빛, 자줏빛으로. 농사하기 전까지 콩꽃이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콩을 기르고 몇 해가 지나서야 그 꽃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날마다 먹는 콩. 그 꽃이 어찌 생겼는지 언제 피었다 지는지 몰라도, 콩은 열매를 맺어주었다. 서울 나들이 가고, 도시에서 놀러오는 손님 치르느라, 그 넓디넓은 콩밭 한번 둘러볼 틈 없었다. 이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살아가는 데 자리가 잡히고, 아이들이 집에서 공부하면서, 콩꽃이 눈에 들어왔구나!

    해 뜨면 고추가 얼마나 자랐나

    뜨거운 햇살을 모아들여 고구마 줄기가 밭을 뒤덮고, 하지(夏至) 지나 심은 팥도 벌써 이파리가 나불거린다. 온몸이 붉게 익은 토마토를 베어 물면 해님의 살을 베어 무는 맛이다. 미끈하게 빠진 오이, 쭉 뻗은 풋고추, 보랏빛 가지에도 햇살이 뭉쳤구나.

    오이소박이 담가 먹을 철이다. 봄에 심은 오이가 이제야 넉넉히 영근다. 한데 부추는 자주 베어먹지 않으면 꽃대가 올라와 못 먹는다. 그러니 오이에 부추를 넣은 오이소박이는 이때가 제철이다.

    먹을거리가 푸짐하다. 풋옥수수 금방 꺾어 찌면 그것만도 충분한데, 애호박도, 수박도, 참외도 먹어주기를 기다린다. 이 밭 저 밭 다니면서 그 자리에서 먹기도 하고, 한바구니 얻어와 먹기도 한다. 금방 따와 아직 햇살이 남아 있어 따끈따끈한 수박. 그 수박을 갈라 속살을 베어 물면 얼마나 연하고 싱싱한지. 생각만 해도 온몸이 그 맛을 기억한다. 풋옥수수도 금방 따서 쪄야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하루 밤만 지나도 그 맛이 사라진다.

    자기 손으로 농사한 사람만이 먹을 수 있는 싱싱한 여름 기운. 더위에 지쳐 입맛 없을 겨를이 없다. 햇살을, 여름을 한껏 먹는다.

    대서에 중복(中伏)이 낀다. 이때 메밀을 심는다. 가장 늦게 심는 곡식이리라. 메밀은 말복에 한 뼘 자라면 된다고 중복 어름에 심는다. 가을 당근도 이때 심지. 추석 때 먹을 김칫거리도, 양파 씨도 이때 심는다. 봄에만 씨 뿌리는 게 아니다. 땅이 언 한겨울을 빼고는 늘 씨 뿌리고 거두는 일이 이어진다.

    농사도 자식 낳아 기르기와 같다. 낳아 기르면서 보여주는 재롱. 그 재미로 길러야지 나중에 부모 봉양하기를 바라서야 되겠나. 농사도 날마다 가꾸고 돌보는 재미를 소득으로 삼아야겠다. 싹이 트네, 본잎 나네, 꽃 피네 하고. 이것 심어 얼마를 거두어야지 하는 욕심으로 심으면 돌보기는 오늘 내일 미루기 십상이다. 그러면 제대로 자라지 못할 거는 뻔한 이치.



    아침에 일어나면 나락이 궁금하고, 콩꽃 구경가는 재미가 좋아져야 진짜 농부가 될 텐데. 이제 그만 쓰고 얼른 자자. 해 뜨면 고추가 얼마나 자랐나? 둘러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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