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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 故 박동진 명창의 외길인생

죽을 때까지 소리를 하고 싶다던 진정한 藝人

  • 글: 주성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swon@donga.com

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 故 박동진 명창의 외길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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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 故 박동진 명창의 외길인생

1970년 변강쇠 타령을 열창하고 있는 박동진 명창.

‘여자들 등쌀에 견디다 못한’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어엿한 스물하나 청년이 된 박동진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정정렬 선생을 만나 소리를 배우게 된다. 정정렬은 당시 ‘조선성악연구회’라는 단체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박동진은 이 조선성악연구회에 나가며 그로부터 ‘춘향가’를 배웠다. 당시 정정렬은 ‘춘향가’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던 명창이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평자들은 “박동진의 춘향가는 정정렬의 춘향가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조선성악연구회에는 정정렬을 비롯해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손꼽히는 이동백, 김창룡, 송만갑 등이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박동진은 이때부터 25세때까지 유성준(劉聖俊)으로부터 ‘수궁가’를, 조학진(曺學珍)으로부터 ‘적벽가’를, 박지홍(朴枝洪)으로부터 ‘흥보가’를 각각 전수받았다. 김창룡의 동생인 김창진(金昌鎭)으로부터는 ‘심청가’를 배웠다. 어쩌면 이 시기가 박동진 명창의 판소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셈.

박동진은 당대 명창으로부터 여러 소리를 두루 섭렵했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에 배운 탓에 모든 소리를 세세하게 익혔다기보다는 그들 소리의 특징만을 배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오히려 훗날 어느 유파에도 기울지 않고 ‘박동진제’로 불릴 만한 스스로의 경지를 터득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판소리는 좋은 스승으로부터 세밀하게 배우지 못하고서는 ‘예술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구전 예술. 박동진 명창이 이런 짧은 가르침을 딛고 대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소리 위해 똥물 60그릇 마셔

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 故 박동진 명창의 외길인생

1969년 자신이 복원한 판소리 열두마당 중 하나인 숙영낭자전을 완창하고 있는 박동진 명창(왼쪽). 고수는 김두수씨다.

판소리 수업을 받으면서도 명월관 같은 고급 요리집에서 소리도 하고 원로 명창들을 모시고 중국까지 공연도 다녔다. 돈도 좀 만졌으니 멋도 부리고 연애도 하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목이 잠기는 일을 당하게 된다. “갑자기 고음이 안 나오고 숨이 짧아지고 소리가 갈라졌다”는 것이 훗날 박동진의 회고.



“못된 짓을 많이 해 목을 버렸다”고 생각한 그는 별별 약을 다 써보았지만 효험이 없자 방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두 달을 앓는 것으로 그쳤다. 박동진은 전국을 떠돌며 소리 공부를 했지만 한번 잃은 목은 찾기 어려웠다. 전도양양하던 젊은 소리꾼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그래도 소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30대의 박동진은 고향집으로 내려가 뒷산에 토굴을 파고 살면서 소리를 깨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말고는 소리만 지르는데, 침이 마르고 이가 솟으며 뼈마디가 모두 풀려 늘어졌다고 한다. 매일같이 소리만 질러대니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는데도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전신이 붓고 죽을 지경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가 보고 기겁을 할 정도였다. “소리도 좋지만 내려가자”고 잡아끄는 아버지께 인분(人糞)을 퍼다 달라고 부탁했다. 소리하다 죽게 된 데는 똥물이 최고라는 말이 생각났던 것. 그는 양재기로 똥물을 60그릇 이상 마셨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박동진은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소리 공부 100일을 채우고서야 산을 내려왔다.

소리꾼이 ‘득음(得音)’을 한다는 것은, 더구나 한번 상했던 목으로 득음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소리 독학은 훗날 명실상부한 명창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박동진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부인은 젊은 시절 그의 방황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한국전쟁 직후 만난 두 번째 부인 변기 여사와는 평생을 함께 했다. 변여사는 1999년 세상을 떠났다. 박동진이 마음을 잡고 차분하게 소리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 변여사의 내조 덕분이었다.

박동진은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보로 들어갔다. 이후 6년 동안 아침 여섯시부터 정오까지 혼자서 소리 공부를 했다. 마침내 1968년 ‘흥보가’를 완창할 즈음에는 당대 최고의 소리를 가진 명창으로 거듭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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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주성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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