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가 논에서 홀태로 타작을 하고 있다. 이웃집 어린애도 해보고 싶다 한다.
그 이듬해 한 발 더 나아가 홀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발탈곡기도 처음 본 나는 홀태를 듣도 보도 못했지. 쇠붙이로 만든 참빗처럼 생긴 홀태. 머리 빗질하듯 빗살 사이에 이삭을 넣고 잡아당기면 알곡이 떨어진다. 박물관 같은 데 가면 있지. 근데 그 골동품이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 먹을거리는 홀태로 타작을 해 보았다. 내친김에 남편은 나무로 절구를 만들어, 겨우내 그 절구에 방아를 쪘다. 그 날 먹을 만큼씩. 그 쌀이 담긴 바가지를 받아 밥을 지어 먹었다. 못자리하면서부터 쌀이 될 때까지 고요하게 자란 벼. 쌀이 살아있는 생명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나는 어떤 쌀을 먹어왔나! 트랙터, 이앙기, 콤바인, 건조기, 정미소의 엄청난 기계소리가 들어있는 쌀이었지. 늘 정신없다 그러며 살아왔는데…. 우리 쌀은 이런 나를 치유해 주지 않겠나. 우리 쌀 속에 담긴 고요함이 내 몸을 바꾸어 주리라.
생각을 바꾸면, 그래서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 길이 있다. 이따금 홀태로 타작하는 사람을 만난다. 기계가 들어가기 힘든 논을 가진 할머니는 혼자서 하루에 한 마지기를 한다는 이야기도 듣고. 우리 이웃이 홀태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시나브로 하면, 누구 손길 빌리지 않아도, 자기 먹을거리는 거둘 수 있다.
처녀 농군은 논 가운데 홀로 앉아 시나브로 털고. 어린아이도 위험할 게 없으니 이웃집 아이들이 놀러오면 논에서 함께 일하며 논다. 일하다 논둑에 앉아 먹는 새참은 또 얼마나 맛난가. 물론 콤바인이 들어오면 몇 시간이면 끝낼 일을 한 달 넘어 한다. 일의 흐름이 이러니 논마다 벼를 골고루 심는다. 가장 일찍 익는 검은 쌀부터 늦게 익는 찰벼까지. 일이 밀리거나 겹치지 않도록.
콤바인은 기계 사정에 맞춰야 한다. 빠르고 몸은 편하지만 가을걷이하는 아무 느낌이 없다. 발탈곡기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지만 가을걷이가 일이 되어 버린다. 낫으로 벨 때는 몇 날이고 벼를 베야 한다. 기계를 돌릴 때는 긴장해야 하고 한번에 일을 해치우게 된다. 거기에 견주면 홀태는 논 가운데 혼자 앉아 벼를 두어 단 베어다가 털고. 다시 베어다가 털고. 누가 오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일하고. 평화가 있다. 도시에서 살던 우리에게 지금 이 시간은 소중하다.
아, 이게 바로 우리 술이구나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면, ‘금상첨화.’ 쌀로 빚은 술. 목도 축이고, 참도 되고. 지나가는 이웃이 있으면 한잔 권하고 그러면 덕담을 주고받고. 올 가을 타작 때는 쌀알이 동동 뜨는 동동주를 빚어 참을 할까. 이런 소리를 하는 데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시골 생활 몇 년 동안 풀지 못했던 숙제였던 술 빚는 법을 올 봄에 터득한 데다, 쌀광에 누룩을 매달아놓았기 때문이다.
시골로 내려오니 막걸리 마실 자리가 있다. 농사와 막걸리. 어울리지 않는가. 그래 언젠가 술 빚는 걸 배우리라. 농사한 밀과 쌀이 있으니 술을 빚으리라. 생각은 하면서도 몇 년을 흘려 보냈다. 한번도 술 빚는 근처에 가보지 않아 정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올 봄 일을 저질러 보기로 했다. 마음을 먹으니, 도서관에 좋은 책이 눈에 띄고, 시어머니가 오신단다. 술을 빚으려면 누룩이 있어야지. 누룩을 사러 갔더니 술 약, 그러니까 가루 이스트를 꼭 넣으란다. 나는 이스트를 넣고 술을 빚고 싶지 않았다. 그래 책에 나온 대로 술약 대신 엿기름을 넣고 술을 빚어보았다. 어머님 말씀이 보통 술 약을 넣고 빚으면 사흘이면 술이 오른단다.
사흘 만에 한 잔 떠서 맛을 보니, 이건 시큼한 식혜지, 술이 아니다. 술 항아리에서 공기방울이 퐁하고 올라와 터지기는 하는데. 어떡하나. 윗술을 한 번 더 안치고, 궁금해서 들여다본다. 아침에 눈 뜨면 궁금해 한 잔 떠다가 맛을 보는데 하루가 다르게 술맛이 돈다. 일주일쯤 지나니 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