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12세기교회 종소리 울리는21세기자립자족형 전원도시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3-10-28 17: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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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세기교회 종소리 울리는21세기자립자족형 전원도시

    신·구도시가 공존하는 생 크리스토프 마을 전경. 멀리 보이는 교회는 12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낮의 길이보다 밤의 길이가 길어진다는 추분(秋分)이 막 지난 9월24일 오후, 파리를 출발해 세르지·퐁투아즈로 향했다. 파리에 인접해 있는 산업신도시 라데팡스를 한번에 관통하는 지하도로를 지나자 곧바로 전형적인 프랑스의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단풍 든 나무 사이로 스쳐지나는 오래된 농촌 가옥과 농장들이 평화로워 보였다.

    곧게 뻗은 고속화도로(A15)를 따라 30분 남짓 달렸을까. 각양각색의 건물과 숲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도시가 눈앞에 서서히 떠올랐다. 마치 대형 극장에 앉아 갑자기 거대한 화면이 스크린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걸 보는 것 같은 환상에 빠져들었다. 실제 경관을 보면서도 마치 영상화된 파노라마를 보는 듯했다. 인구 18만명에 면적 8000㏊의 신도시 세르지·퐁투아즈. 예전엔 시야 왼쪽으로 보이는 곳이 세르지 코뮌이고, 오른쪽은 퐁투아즈 코뮌이었는데 지금은 하나의 신도시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코뮌’이라는 자치도시가 활성화돼 있는 국가다. 코뮌은 12세기에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성립된 도시형 자치체로, 현재 프랑스 전체에 모두 3만6000개나 구성돼 있다.

    퐁투아즈는 역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지역이다. 한때 왕이 살기도 했다는 이곳은 바이킹과 노르만족이 프랑스를 침략했을 때 파리를 지키는 마지막 요새였다. 때문에 오래된 교회와 성당, 박물관 등 많은 유적과 함께 크고 잘 다듬어진 농장이 많다. 19세기 중순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 카미유 시세르의 작품 중에도 ‘잘레의 언덕, 퐁투아즈’ ‘퐁투아즈의 강변과 다리’ 등 퐁투아즈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적지 않다.

    오래되고 고즈넉한 도시 분위기 때문에 정년을 마치고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려는 고급 공무원이나 직장인이 파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개발 이전, 이곳의 인구는 2만명 정도였다.



    이에 비해 세르지는 고작해야 시민 500∼600명 에 불과한 조그마한 코뮌이었다. 퐁투아즈에 왕족이나 귀족들이 살았다면 세르지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살던 곳이다. 세르지·퐁투아즈에는 이 2개의 코뮌 외에도 9개의 코뮌이 포함돼 있는데 이들 지역도 세르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개발 이전 세르지와 퐁투아즈를 포함해 11개 코뮌 전체 인구는 4만명을 넘지 못했다. 현재의 4분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

    상상하는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퐁투아즈의 유물과 유적들은 관광상품으로 개발돼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으며, 세르지에는 대형 쇼핑몰과 행정관청, 대학, 병원 등 행정, 교육, 상업 등 각종 편의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졌다.

    세르지 중심가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변에 세워진 대형 쇼핑몰은 연간 고객이 3000만명에 이른다는 게 관계자의 전언이다. 또 100만명이 거주하는 파리 서북쪽 발두와즈지역을 총괄하는 행정기관인 도청이 이곳에 세워졌고, 그 주변에는 수천 평의 공원 등 휴식공간이 마련돼 있다.

    교육시설로는 세르지·퐁투아즈 종합대학을 비롯, 프랑스 최고수준의 상경계열 그랑제콜(5년 과정의 대학원대학) 에섹(ECCEC), 국립예술학교, 국립전자공학대학, 교육대학, 고등농업학교 등 10여 개의 고등교육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신도시 전체적으로는 초등학교 및 유치원 83개, 중학교 18개, 고등학교 11개가 있다. 풍부한 교육시설 덕분에 초등학교의 평균 학생수는 80명으로 한 학년에 한 반이 보통이다.

    12세기교회 종소리 울리는21세기자립자족형 전원도시

    오퇴유 언덕에서 바라본 ‘역사의 중심축’. 이곳에서 똑바로 가면 라데팡스의 신개선문, 개선문, 루브르까지 이어진다.

    금융기관으로는 파리국립은행(BNP) 해외파트부문과 일반 은행과는 조금 다른 CIS, SG 등 은행기술부문 기관들이 이 도시에 들어와 있다. 1000명의 연구원을 고용한 SAGEM 등 연구소도 30여개나 된다.

    이처럼 다양한 인프라와 시 차원의 적극적인 유치전략에 힘입어 푸조, 소니, 톰슨, 루이 뷔통 본사가 진출했고 3M, 유니시스, 지멘스, 포드, 존슨의 지역본부 또한 이곳에 있다. 이들을 포함해 현재 3500여 개의 기업이 진출, 8만여 개의 일자리가 창출됐다.

    센강의 지류인 우아즈강 일대에는 대규모 스포츠공원이 조성돼 경비행기, 요트, 카약, 낚시, 패러글라이딩 등 다양한 레저스포츠를 즐길 수도 있다. 현재 이 센터 이용객만 하루 평균 3만명, 많을 때는 8만명에 육박한다.

    경영관리 및 품질관리시스템,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벤처업체 WYSIWYG사 대표 사비에르 로페즈(Xavier Lopez)씨는 “세르지·퐁투아즈의 레저센터는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극찬했다. 로페즈씨는 또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 “시에서 재정뿐 아니라 사무실과 비서, 전화 등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가 하면 경영지도도 해주는 등 벤처업체로서는 최상의 조건이었다”고 말했다.

    주거환경도 훌륭하다. 단독 집합주택 지역, 삼림지 저밀도 단독주택 지역 등 각 지역별로 특색을 갖추고 있고 아파트와 국민주택 등 다양한 형태의 주택이 있어 경제적 형편에 맞춰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지역도 똑같은 집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서도 빈부 격차를 느끼지 않게 세심히 배려했다. 전체적으로 200∼300년 전에 지어진 건물들과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지역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파리 도심에서 살다가 이주해왔다는 한 지역주민은 “1800년대 중반에 지어진 집에서 살고 있는데 정말 새로운 기분이다. 요즘에는 집에 푹 빠져 있다. 이젠 아파트에서 못 살 것 같다”며 만족해했다.

    신도시에서 가장 높은 생 크리스토프 지역 오퇴유 언덕에는 이 시를 상징하는 탑과 함께 이스라엘 출신 건축가 캬라반(Dany Karavan)이 1988년에 만든 12개의 원형 기둥이 서 있다. 그곳이 바로‘역사의 중심축(악스마젤-Axe Majeur)’의 연결점이다.

    ‘역사의 중심축’은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콩코드광장의 오벨리스크, 샹젤리제, 개선문, 라데팡스의 신개선문, 그리고 세르지·퐁투아즈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상징한다. 악스마젤은 루이14세 시대의 조경가 르 노트르가 루브르궁전에 느릅나무를 줄지어 심으면서 형성된 개념이다. 이후 수 세기에 걸쳐 도시계획가와 조경가, 건축가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완성됐다.

    프랑스 ‘신도시 개발의 산 역사’라고 일컬어질 만큼 반평생을 신도시 개발에 몸담았던 장 루이에(Jean-Eudes Roullier)씨의 설명에 따르면 신도시 세르지·퐁투아즈의 개발역사는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신도시 창안자 드루브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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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지시 중심지역. 1960년대 ‘차는 지하, 사람은 지상으로’라는 원칙에 따라 도로가 건물 밑으로 나 있다.

    1900년대초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프랑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었다. 1950년대까지 무려 2500만명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던 것. 그 중 300만명 이상이 파리와 그 근교로 집중됐다. 여기에 베이비붐과 해외 식민지에 거주하던 프랑스인이 대거 귀국하면서 극심한 주택난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서울 수도권이 인구 집중으로 난개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처럼 1930∼40년대 파리와 그 주변지역에도 난개발 문제가 심각했다.

    파리 근교의 난개발이 통제불능 상태에 빠지자 프랑스 정부는 1941년부터 개발정비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나도록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1957년, 폴 드루브리에(Paul Delouvrier)가 신도시 개념을 창안해 정부에 제안하게 된다. 연구원만 무려 150명에 달하는 그의 도시계획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드루브리에의 이 신도시 개념은 획기적인 것이었고, 난개발 해결을 위한 혁명적인 방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신도시라는 개념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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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지·퐁투아즈 11개 코뮌의 연합체인 SAN 건물.

    드골은 이에 1961년 최초로 정부산하 신도시개발 조직을 만들어 드루브리에의 도시계획연구소와 연계해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를 내렸다. 루이에씨도 이때부터 신도시 관련 업무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965년 이 조직에서 작성한 ‘도시계획 지침계획’이 발표되면서 파리권 신도시 계획이 공식화됐다. 파리가 갖고 있는 방사집중형 도시골격으로는 인구집중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남쪽과 북쪽에 평행하게 두 개의 도시축을 세우는 것이 이 계획의 골자였다. 남쪽 축에 5개, 북쪽 축에 3개 등 모두 8개의 신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1970년 5개의 신도시로 수정되는데 남쪽 축에 에브리(Evry), 믈랭 세나르(Melun Se’nart), 생 캉텡 앙 이블린(Saint Quentin on Yvelines) 등 3개와 북쪽 축에 마른 라 발레(Marne la Valle’e), 세르지·퐁투아즈를 포함해 모두 5개의 신도시로 축소됐다.

    신도시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새로운 조직도 만들었다. 신도시 예정지역의 자치도시, 즉 각 코뮌 사이의 업무조정과 협조체계 구축을 위해 코뮌의 상위 개념인 특별 자치단체 ‘도시개발조합(SCA)’과 신도시 실무집행기구인 ‘공공개발공사(EPA)’를 조직한 것이다. SCA가 관련 안건을 검토하고 의결하는 기구라면 EPA는 집행기구에 해당한다.

    EPA는 각 신도시별로 신도시개발계획안이 확정된 후 공식적으로 출범했으며, 대부분 내각 수상실 산하 신도시 기획단 직원이 그대로 옮겨와 일했다. 계획과 집행 간 원활한 연계를 위해서 취해진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5개 신도시 지역에 각각 SCA와 EPA가 만들어져 자체적으로 개발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조직적 토대가 완성됐던 것.

    “프랑스 정부는 신도시 개발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정치, 경제, 행정 등 각 분야에서 효율적인 조직체 구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물론 조직 구성원들의 인적 자질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게 루이에씨의 설명이다.

    프랑스 정부도 성공적인 신도시 개발을 돕기 위한 나름의 조치를 취했다. 1, 2차 파리 외곽순환도로를 건설하고, 외곽지역에서 파리 중심까지 곧바로 연결하는 고속전철 RER을 건설하는 등 교통편 확충에 주력했다.

    부동산 투기는 있을 수 없는 일

    12세기교회 종소리 울리는21세기자립자족형 전원도시

    이 도시에 가장 먼저 들어선 도청 앞에 ‘유토피아를 향한 투쟁’을 상징하는 돈 키호테 동상이 서 있다.

    세르지·퐁투아즈에도 1969년에 EPA가 조직돼 3단계에 걸친 신도시 개발에 착수했다. 파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오히려 파리로의 인구집중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를 이 지역이 신도시로 선정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루이에씨는 “프랑스의 경우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이동은 1950년대에 이미 끝났다. 현재 파리 및 주변 신도시지역 인구는 모두 합해 1100만명 정도인데 그 중 파리인구는 200만에 불과하다. 오히려 인구과밀화를 해소하는 효과가 있었다는 증거”라면서 선정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갔다. 루이에씨는 파리에서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것도 거리상 멀다고 지적했다.

    “파리 근교에 신도시를 개발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3차산업, 이른바 지적산업이 발달했다. 그런데 지적산업체 대부분이 파리에서 매우 먼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경제성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뒤따랐다. 무엇보다 주택문제가 심각했다. 파리도 이미 주택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라도 파리 근교에 신도시가 필요했다. 출퇴근 시간도 1시간 이내가 적당하다. 출퇴근에 그 이상이 걸리면 경제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그 중간 지역에 신도시를 만들게 된 것이다.”

    3차산업이라는 것은 이른바 서비스산업으로 상업·금융업·보험업·운수업·통신업·관광업·광고업 등이 이에 속한다.

    ‘SAN(상·신도시연합체)’의 역사담당 장 클로드 로(Jean Claude Rault)씨는 루이에씨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세르지·퐁투아즈가 신도시로서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췄음을 강조했다. “맑은 강이 흐르고 경치가 아름답다. ‘보석 같은 도시’를 만들기에 이보다 좋은 지리적 환경을 갖고 있는 곳은 없다. 또 새로운 것을 만들 때는 뿌리가 있어야 한다. 퐁투아즈 등 오래된 도시들이 바로 신도시의 뿌리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SAN은 1983년 국회에서 관련 특별법이 개정되면서 기존의 도시개발조합인 SCA에 이 지역 11개 코뮌의 주민까지 직접 참여하는 독립적인 지자체형 관리조직이다. SAN 의장은 11개 코뮌 대표 60명에 의해 선출된다. 이 조직은 도시계획부터 경제, 교통, 환경, 스포츠 등 거의 모든 사안을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처럼 부동산 투기는 없었을까. 루이에씨는 “1965년 신도시 개발계획을 발표하면서 한 해 전 1964년 가격으로 부동산 가격을 동결시켰기 때문에 투기는 있을 수 없었다”면서 “다만 농토를 사들이면서 농민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농민들의 반발을 결코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농민들이 납득할 때까지 끊임없이 대화와 토론을 하면서 참고 기다렸다. 신도시 하나 건설하는 데 30∼40년 이상 걸린 이유 중 하나다.

    로씨에 따르면 세르지·퐁투아즈 신도시 개발에 있어 첫 사업은 행정관청 이전이었다. 허허벌판이던 세르지 지역에 가장 먼저 들어선 건물은 발두와즈 전지역을 관장하는 도청이었던 것. 그리고 도청 건물 바로 옆에 돈 키호테의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은‘유토피아를 향한 투쟁’을 의미한다는 게 로씨의 설명이다. 그만큼 당시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세르지·퐁투아즈만의 독특한 개발기준이다. 도시개발자들은 녹지공간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도시를 정원처럼’ 개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불도저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비가 올 때 물이 흐르는 기존의 지형과 환경을 그대로 살려서 산책로를 마치 계곡처럼 만든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새롭게 건물을 지어도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설계했다. 아파트의 경우 언덕 아래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층수를 조금씩 높여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게 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실험하고 검토해 도심개발계획을 수정해나갔다. 신도시 개발의 역사가 바로 이 과정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60년대 도청을 중심으로 처음 개발된 세르지 지역은 ‘차는 지하로, 사람은 지상으로’라는 원칙으로 설계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지상으로 올라오면 도로가 없다. 넓은 지역을 도로를 건너지 않고도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 사람 중심의 도심계획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처음 이 지역에 오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진입할지 몰라 목적지를 지나치기 일쑤였던 것이다.

    1980년대 두 번째 지역을 개발할 때는 선례를 참고해 다른 도시처럼 사람과 차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했다. 대신 옛 도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려 건물들을 작게 지었다. 하지만 이것도 도심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오랜 연구 끝에 1990년대부터 개발에 들어간 세 번째 지역 도심개발계획의 모델은 결국 파리였다. 지금도 개발중인 이 지역은 옛 파리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데 현재까지는 옛 건물과 새 건물이 조화롭게 건축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이 신도시에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도심개발의 모델이 공존하고 있다. 황량한 벌판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부터 무작정 지어대는 우리와는 천양지차다.

    신도시 개발과정에는 기술적인 문제 이외에 구성원간의 마찰도 적지 않았다.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구도시의 중소 상점과의 마찰, 신구도시간 구성원들의 성향차이 등이 그것. 정치적으로 구도시는 중도우파의 성향이 강한 반면 젊은층이 많이 사는 신도시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다행히 이같은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치유됐다. 하지만 개발 이후 나타난 사회적인 문제는 쉽게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일부 지역의 슬럼화 현상이다. 역 주변에 저소득층과 외국 이민자들이 집중되면서, 이 지역에서 범죄 발생빈도가 높아졌다. 이에 따라 “최근 이들이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일자리 창출과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의 치안, 사회교육 정책적 측면에서 대안 마련에 노력하고 있다”고 로씨는 밝혔다.

    세르지·퐁투아즈는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전환기에 서있다. 지난해 12월31일자로 세르지·퐁투아즈의 EPA가 공식적으로 해산되면서 모든 권한을 지자체에 넘겼기 때문이다. 앞으로 진행될 신도시 개발이 계획부터 실행까지 모두 지자체에서 결정하고 집행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실상 정부의 권위를 갖고 있던 신도시개발 집행기관 EPA에 의해 건설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지자체 관리조직인 SAN은 올해 말로 광역연합체 개념인 ‘세르지·퐁투아즈 코뮈니티’로 이름을 바꾸고 지역현실을 보다 더 많이 반영한 신도시개발계획을 세워 새롭게 추진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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