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박카스 신화’어떻게 만들었나

시원한 맛, 싼 가격, 감동 주는 광고가 비결

  • 글: 최희정 자유기고가 66chj@hanmail.net

    입력2003-11-27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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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카스 신화’어떻게 만들었나

    40여 년간 팔린 박카스 병을 모두 이으면 지구를 41바퀴 돌고도 남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의약계엔 ‘박카스 신화’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소비자 취향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탓에 1∼2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상품이 허다한 요즘, 박카스는 무려 40년 동안이나 소비자들로부터 한결같은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동아제약(회장 강신호) 박카스는 1961년 처음 출시된 이래 지금까지 137억7510만9000병을 팔아 국내사상 최다판매상품에 올랐다.

    2000년 한 해에만 7억병이 넘게 팔렸는데, 하루 평균 193만병이 팔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대한민국 전국민이 매월 박카스 한 병 이상을 마신 셈이다. 2002년에는 월드컵 특수를 톡톡히 누려 6월 한 달 동안에만 7400만병이 팔려 23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1966년 연간 판매량 1000만병 돌파, 1976년 연간 판매량 1억병 돌파 등 박카스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어왔다.

    동아제약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까지 팔린 박카스 병의 길이를 더하면 지구를 41바퀴 돌고도 조금 남는다고 한다. 박카스는 동아제약 전체 매출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간판제품이다.

    박카스가 40년간 변함없는 인기를 유지한 첫째 비결은 바로 맛에 있다. 뒤끝 없는 상쾌한 맛이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비결은 가격. 처음 박카스가 출시됐을 때 가격은 40원이었는데, 당시 자장면 한 그릇 값과 같아 다소 비싼 편이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자장면 값은 100배 뛰었지만, 박카스는 10배 정도만 뛰었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40년 동안 값이 거의 오르지 않은 셈이다.



    동아제약은 1932년 ‘강중희 상점’이라는 의약품 도매상으로 시작됐다. 지금은 한국일보 사옥이 들어선 서울 중학동의 10평 남짓한 조그마한 공간이 그 모태. 사업 초기부터 다른 의약품 도매상들이 취급하지 않는 붕대와 탈지면 등 위생용품을 판매하면서 틈새시장을 파고들었다. 1942년에는 의약품 제조업 허가를 받고 감기약이나 소화제, 정장제, 피부질환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홍보광고팀의 박상훈 이사는 “동아제약이 설립된 지 70년이 됐습니다. 그중 35년 동안 제약업계 1위 자리를 지켰어요. 박카스와 같은 장수 상품 덕분이죠. 박카스말고도 소비자에게 인기를 끄는 제품이 상당수 있어요. 위염치료제인 스티렌은 발매된 지 채 1년도 안 되어서 70억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고 설명한다.

    박이사 말대로 동아제약 상품 중에는 의약품 품목 판매 1위를 차지하는 것이 상당수다.

    동아제약이 생산하는 의약품은 종류나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약품 종류만 해도 180여 종에 이른다. 이중 혈액순환제인 ‘서큐란’과 구강청정제 ‘가그린’, 염색약 ‘비겐크림톤’, 초기감기약 ‘판피린’ 등은 각 부문별 브랜드 파워 1위를 자랑한다. 또 병원에서 처방하는 전문 의약품으로 판매되는 제품도 연간 1600억원어치가 넘는다.

    알약, 앰풀에서 드링크 제품으로

    동아제약이 박카스를 개발하게 된 배경은 당시 우리나라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1956년 대통령선거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내건 선거 구호는 “못살겠다 갈아보자”였고, 여당인 자유당이 내건 구호는 “갈아봤자 별수없다”였다. 그야말로 우리 국민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도 힘겨운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이 많았는데 잔이 아니라 대접이나 사발에 술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는 탓에 건강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과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함유된 복합영양제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1960년대 국내의 약업 시장도 ‘비타민 전성시대’라 할 만큼 비타민제 개발이 붐을 이루었다. 6·25 전쟁으로 영양실조 상태에 있던 국민들은 미국의 구호물자 중 비타민이라면 무조건 좋아했고, 심지어는 비타민을 몸을 튼튼하게 해주는 강장제로 여겼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강신호 회장은 가난과 피로에 지친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술꾼의 간을 보호해줄 의약품을 개발한다면 얼마든지 시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선 비타민과 미네랄에 강간제(强肝劑)를 배합한 종합강간영양제를 개발해 산뜻한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술꾼을 지켜주고 풍년이 들게 해준다는 그리스 신화의 ‘바커스’신이 약품의 개발동기나 효능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해 ‘박카스’로 이름을 짓게 된 것이다.

    알약으로 출시된 박카스는 월 매출이 1만개까지 늘어날 정도로 소비자의 호응이 높았다. 그러나 발매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제조 기술이 미숙한 탓에 박카스의 외피를 형성하는 당의정이 녹으면서 대량 반품 사태가 빚어진 것. 그야말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강회장은 고심 끝에 박카스를 앰풀 형태로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다. 그러나 앰풀은 운반 과정에 파손될 위험이 컸고, 또 소비자들이 앰풀 박카스를 주사제로 착각, 제 손에 주사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졌다. 앰풀 용기를 대체해 새롭게 내놓은 것이 바로 드링크타입의 ‘박카스-디’였다.

    소비자들이 드링크 타입으로 선보인 박카스에 보다 쉽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마케팅 전략이 필요했다. 이에 동아제약은 ‘3M 전략’을 펼쳤다. 3M 전략이란 대량생산(Mass Prod uction) 대량광고 (Mass Communi cation) 대량판매(Mass Sale)를 뜻하는 것으로, 이 전략은 훗날 대학 마케팅 강의 교재에도 실렸다.

    우선 의사나 약사를 대상으로 한 광고 관행에서 벗어나 TV나 신문, 잡지, 옥외광고 등을 동원해 광고 공세를 펼쳤다. 특히 당시 선풍적 인기를 끌기 시작한 TV매체에 중점을 두고 인기 코미디언 김희갑과 유명 여배우 남미리를 등장시킨 TV광고를 내보냈다.

    이러한 광고 물량 작전은 곧바로 효과를 나타냈다. 발매 초부터 매출이 월 평균 35만병을 웃돌았고, 그 이듬해에는 월 평균 56만병으로 판매가 증가한 것. 대량광고로 대량판매를 달성한다는 전략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박카스는 어느샌가 술꾼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마실수 있는 피로회복제로 인식되었고, 자연히 박카스를 찾는 연령층도 다양해졌다.

    지금도 동아제약 홍보팀 냉장고에는 박카스가 떨어지는 날이 없다. 냉장고가 귀하던 시절에도 큰 주전자에 얼음과 박카스를 넣어놓고 회사를 방문한 손님들에게 박카스를 대접했던 동아제약은 요즘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차갑고 상쾌한 박카스를 대접하고 있다.

    DSC로 소매업자와 직거래

    3M 전략에 DSC(Dong-A Sales Circle) 제도를 도입했다. DSC란 소매 직거래를 뼈대로 하는 특약점 제도이다. 당시 약업 시장은 제약회사보다는 도매상에 의해 상권이 좌지우지됐을 정도로 도매상의 파워가 막강했다. 이들 요구대로 가격을 맞추다 보니 마진율이 너무 낮았다. 게다가 소매상들은 물건이 제때 배달되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하기 일쑤였다.

    DSC는 동아제약이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일선 약국과 직접 특약점 계약을 맺는 제도였다. 특약점으로부터 일정액의 계약금을 받으면 월 4부의 이자를 회사가 지급하면서 각종 서비스를 우선적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소매업자로서는 동아제약의 전제품을 구색 맞춰 갖출 수 있고, 또 각종 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어서 유리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거래처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러한 유통전략은 나날이 발전하여 현재에 와서는 ‘박카스 루트세일’이라는 동아제약만의 독특한 유통시스템을 이루었다. 루트세일이란 그 자리에서 바로 현금을 지급해야 물건을 주는 것이다. 지금도 시중 약국에서는 일주일 안에 대금을 결제해야 박카스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박이사는 “동아제약은 업계 최초로 사원 공개 채용을 실시해서 유능한 인재를 발굴했어요. 당시 대학 졸업생들은 동아제약에 취직했다면 출세했다는 인사를 받을 정도로 동아제약의 위세가 막강했거든요. 이 점도 동아제약과 박카스가 성공한 요인 중 하나일 것입니다”고 덧붙였다. 3M 전략, DSC 제도 도입, 루트세일, 그리고 사원 공채 등에 힘입어 박카스 매출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날이 신장했다. 마침내 1967년에는 제약업계 선두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아제약은 1976년 일대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더 이상 자양강장 드링크류 의약품을 대중매체에 광고할 수 없게 된 것. 당시 보건사회부는 광고로 인해 약의 오남용이 심해진다는 이유로 모든 자양강장 드링크류의 광고를 금지했다. 3M 전략을 구사하고 있던 동아제약으로선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조치였다.

    그러나 광고를 금지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아직도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국민이 많은데,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박카스를 왜 마시냐는 것이었다. 1976년 당시 박카스는 100원이었는데, 커피 한 잔 값과 자장면 한 그릇 값은 177원이었다. 또 100원이면 연탄 세 장을 살 수 있었다.

    또 한번의 위기는 1989년에 찾아왔다. 단맛을 내기 위해 첨가하는 인공감미료인 사카린이 발암물질로 판명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것. 사카린 대신 과당을 사용하자 본래의 박카스 맛이 나지 않는다며 ‘물탄 박카스’란 항의가 빗발쳤다. 몇 달 동안 연구한 끝에 천연 감미료인 스테비오사이드를 찾아냈고 박카스 본래의 맛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동아제약은 감미료를 스테비오사이드로 대체한 뒤 ‘박카스-에프’란 상품명으로 새롭게 시장에 선보였다. 그러나 대중매체 광고 금지, 사카린 파동 등으로 한풀 꺾인 매출세는 도무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종점에서 박카스 달라는 학생들

    1993년 의약품 광고 금지가 전면 해제되면서 동아제약은 다시금 대량광고 전략을 펼치기로 했다. 대신 광고의 내용에는 변화를 줬다. 기존의 광고와는 달리 보통 사람들을 모델로 내세워 휴머니티 광고를 제작하는 모험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선보인 광고가 묵묵히 음지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들을 담은 ‘새 한국인’ 시리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어떤가? 그날의 피로는 그날에 푼다’는 카피와 함께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주는 잔잔한 감동을 광고를 통해 전달하자 소비자들의 공감대를 넓힐 수 있었다. ‘중장비 수리공과 수위아저씨’ ‘학생과 버스기사’ ‘ 농촌부부’가 출연한 광고는 소비자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고, 이는 곧바로 매출 증대로 이어졌다. 1998년부터는 ‘대학생 국토 대장정’ 프로그램을 전개해 젊은 소비자층을 형성하기도 했다.

    홍보팀의 이상훈 팀장은 “학생과 버스기사 광고를 내보내고 나서는 버스 회사로부터 박카스를 보내달라는 주문을 많이 받았어요. 학생들이 운전기사에게 ‘종점까지 왔는데 왜 박카스를 주지 않느냐’고 한다는 거예요. ‘지하철 노약자 좌석을 비워두는 젊은이’ 광고를 내보내고는 좌석을 양보하는 일이 늘었다며 도시철도공사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습니다”며 광고 뒷이야기를 전해줬다.

    수십 년간 국내 제약업계 1위 자리를 고수해온 동아제약은 최근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 마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국내 1위’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1981년 아랍에미리트에 박카스를 수출했고, 같은 해 7월에는 미국 식품의약국으로부터 검정을 받고 미국시장에도 진출했다.

    현재 박카스는 전세계 13개국에 수출된다. 지난 2000년부터는 동남아시아와 미주지역 현지인의 취향에 맞는 맛과 디자인을 개발해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특히 2002년 10월 베트남 현지인의 기호에 맞춘 캔 형태의 박카스 매출 규모는 당초 목표인 80만캔을 훌쩍 뛰어넘는 200만 캔을 기록해 베트남에서의 박카스 시장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신약 개발로 제2의 도약 꿈꿔

    한편 동아제약은 박카스 신화에 이어 신약 개발로 ‘제2 도약의 발판 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1979년 반합성 페니실린계 항생물질인 ‘탈암피실린’의 합성에 성공했고, 1988년에는 국내 최초로 에이즈(AIDS) 진단시약을 개발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위염치료제 스티렌을 개발 발매했으며, 금년에는 개량 신약인 흑피종 치료제인 멜라논을 시장에 내놓았다. 발기부전 치료제, 세포를 이용해 피부를 만드는 인공피부, 골다공증 치료제, 알레르기 치료제 등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의약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슐린, 성장호르몬, 인터페론 알파, 호중구감소증 치료제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설비도 갖췄다. 신약개발을 위해 연 250억원을 투자하고 있고 연구원도 현재 130명에서 2004년까지 200명으로 대폭 증원할 계획이다.

    ‘박카스 신화’를 탄생시키며 제약업계 최강의 자리에 우뚝 선 동아제약이 어떤 신약개발로 또 하나의 신화를 일구어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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