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권말 부록|제4회 동아 仁山 문예창작 펠로십 당선작

검은 하늘을 이고 잠들다

  • 글: 김도연

검은 하늘을 이고 잠들다

3/20
“존경하는 사북 노동자 시민 여러분! 이제 바야흐로 노동자 세상이 도래할 첫 불꽃을 피워 올렸습니다. 누가 뭐래도 사북은 광산 노동자들 땅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 위대한 장정에 들어선 지금 우리 사북 전직 노동자 동맹, 즉 사노맹도 투쟁의 선봉에 서겠다는 각오로 이렇게 삭발식에 참여했습니다. 저 캄캄한 막장을 헤쳐나온 역전의 용사임을 자부하며 살아온 우리에게 정부가 해준 게 대체 뭐란 말입니까? 그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도시 자체를 말살하겠다는 만행을 시도하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 있습니까! 우리는 저 80년의 사북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뼈아픈 실패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사북을 떠나간 그 많은 광원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아직도 고통받는 진폐환자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노맹 대표인 저 박종포도 기꺼이 혈서를 쓰겠다고 이 자리에서 맹세하는 바입니다. 사북 만세!”

“광부 만세!”

옆에 있던 황도 한쪽 목발을 치켜들며 박종포를 지지했다. 군중들은 위령탑 시위 때처럼 박수와 웃음을 함께 보냈다. 박종포는 짧게 자른 머리에 다시 붉은 띠를 둘렀다. 군중 틈에 있던 사노맹원들은 옆 사람의 피켓을 뺏어 허공을 찌르며 열렬히 환호했다.

태양은 여전히 사북의 하늘에서, 박종포의 붉디붉은 손끝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3. 늙은 광부의 노래



급조한 꽃상여를 실은 트럭이 과속방지턱을 넘으면서 출렁하더니 주변으로 무수한 조화가 떨어졌다. 동원탄좌를 한 바퀴 돈 시위 군중들은 땀을 흘리면서 꽃상여를 따라 가두행진의 긴 강을 만들었다. 박종포와 맹원들은 그 대열의 앞에 서서 시위 열기를 고조시키느라 바빴다. 어느새 무장한 경찰 병력은 안경다리 입구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더 이상의 진입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방송을 계속해서 내보냈다. 조금씩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재빨리 간파한 박종포는 비밀리에 맹원들을 후미로 집결시켰다.

“이건 사북사태랑 상황이 똑같잖아!”

“위원장님, 선두에 나가 싸워야지 왜 뒤로 빠진 거요?”

잔뜩 화난 황이 맹호부대 김의 탄식에 이어 박종포에게 따졌다.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하듯 박종포는 병나발만 불 뿐 대답을 미뤘다. 겁을 먹은 듯 정선댁의 목소리는 떨렸다.

“이러다 예전처럼 누가 죽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죽을 땐 죽더라도 비겁하게 도망치다 죽진 말아야지. 안 그렇습니까, 위원장님?”

황은 박종포의 결단을 촉구했다. 박종포는 손에 든 술병을 주머니에 넣고 차분한 표정에 미소까지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전투는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아. 길고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될 거야. 우리 맹원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적들의 기만을 밝혀내야 하고 그 기만전술에 시민과 광원노조가 속지 않도록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해. 지금 욱해서 바리케이드를 향해 달려가면 거기서 끝나는 거야. 그 일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춘천집에서도 말했지만 우린 보다 큰 일을 하려고 조직을 결성했다는 사실을 제발 잊지들 말라구!”

박종포와 황은 껴안은 채 빡빡 깎은 머리를 서로 비비는 행동으로 단결을 과시했다. 철길 아래 안경다리에서 대치한 경찰 병력과 시위 군중들의 신경전은 조금씩 수위를 높여갔다. 최루탄과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에 대항하여 선두의 광원노조원들은 쇠파이프와 폐석으로 맞서는 형국이었다. 박종포는 언덕 위에서 작전관처럼 정세를 파악했다. 인원과 지형 조건을 보면 단연 시위 군중이 우위를 차지했지만 경찰은 시위에 단련된 전문가들이었다. 선봉대 격인 광원노조만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어떤 계기가 필요했다. 작은 불씨 하나가 광야를 불붙게 한다고 어느 시인이 외치지 않았던가. 박종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선 황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황은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겠다는 뜻으로 한쪽 목발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킨 뒤 건네받은 물건을 옷 속에 감추고 군중들 속으로 들어갔다. 박종포는 최루탄 연기와 허공을 날아가는 폐석을 바라보며 남은 소주를 모두 비웠다.

꽃상여를 실은 트럭은 시위 군중 속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박종포의 예리한 시력과 판단력이 그것을 놓칠 까닭이 없었다. 맹원들은 한쪽 다리가 없는 황이 그 위에 올라간 것만 가지고도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황은 꽃상여를 실은 트럭의 짐칸에 우뚝 서서 시위 군중과 경찰을 번갈아 내려다보며 같은 구호를 세 번 외쳤다.

“광산촌 생존권을 쟁취하자!”

황의 오른손에 들린 화염병에 불이 붙었다. 침묵은 꽃상여를 중심으로 동심원처럼 서서히 퍼져나갔다. 양측은 힘을 견줘보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터라 화염병의 출현에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박종포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오른손을 내리자 황의 손에 들렸던 화염병도 허공에서 내려와 꽃상여 위로 내려앉았다. 황은 다시 외쳤다.

“광산촌을 살려내라! 살려내라!”

3/20
글: 김도연
목록 닫기

검은 하늘을 이고 잠들다

댓글 창 닫기

2022/07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