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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論座 공동기획|한일 언론인 대담 (상)

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 대담: 권오기 전 동아일보 사장,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논설주간

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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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언과 사죄의 반세기, 민족주의만으론 해결 어려워

<b>權 五 琦</b><br>1932년 생. 동아일보 도쿄특파원으로 63년 부임, 한일교섭 등을 취재했다. 그후 워싱턴 특파원, 편집국장, 논설주간, 사장을 역임. 김영삼 정권에서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으로 남북문제를 담당했다. 현재 동아일보 21세기평화재단 이사장, 울산대 석좌교수.

와카미야 확실히 일본은 당시 근대화의 속도나 깊이에서 아시아에서 빼어난 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랑이고 한일합방의 역학이기도 했겠지만, 그것과 ‘한일합방은 정당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전후 한일교섭에서 되풀이된 한국측 주장은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원천 무효였다는 것으로, 일본측과 대립합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무효’라는 표현으로 이현령비현령식으로 애매모호하게 마무리지어졌지요. 하지만 일본에는 한일합방조약은 합의에 따라 원만하게 이뤄진 것이며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법적으로 무효인가 여부는 별문제라 치더라도 원만했다거나, 합의였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무력으로 협박해 반강제적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의 경위를 안다면 그런 발언이 나올 리 없겠지요.

저는 이번에 후쇼샤(扶桑社)가 발행한 시판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읽었습니다. 거기에도 ‘일부에 합병을 받아들이자는 목소리도 있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동학혁명(1894년에 일어난 농민혁명·이때 출병한 청일 양군이 충돌해 청일전쟁으로 번졌다)이 있었습니다. 동학은 일종의 종교운동입니다. 뒤에 천도교(天道敎)와 시천교(侍天敎), 둘로 나뉘었습니다. 그 중 시천교의 이용구(李容九)라는 인물이 일본과의 합방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합방 후의 나라 이름은 ‘대동국(大東國)’, 즉 대등 합방을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합방에 공을 세운 인물에게 작위를 수여했는데 이용구는 작위를 거절했습니다. 일본에 흡수되는 합방을 당했기 때문에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또 일본에서는 합방을 요구하는 상소(上疎)의 수나 합방에 찬성하는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에 100만명이 참가했다는 이야기를 인용해 한국인 다수가 합방에 찬성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시 상소문은 일본인 손으로 쓴 것이 많았지요. 일진회 등을 조종한 일본의 국수주의자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한문 실력이 당시 조선 유생(유학을 배우는 사람)보다 못해 조선인 이름으로 상소문을 쓴 일인을 질책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때 일본은 친일파까지 속였던 것이지요.

와카미야 가끔 일본 정치가의 입에서 이른바 ‘망언’이 나옵니다. 망언은 한국에서 쓰는 말이고, 일본에서는 ‘문제 발언’ 혹은 ‘폭언’ ‘방언(放言)’이라고 씁니다. 최초의 망언은 1953년 10월 제3차 한일회담에서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 수석대표가 한 발언이었습니다. 한국측 대표단이 ‘말도 안 된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그뒤 1957년까지 교섭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구보다의 발언 기록을 읽어보겠습니다. ‘일본도 (한국에) 철도나 항만을 만들거나 농지를 조성하면서 대장성이 여러 해에 걸쳐 2000만엔이나 지출했다. (한국측이 배상을 요구한다면) 이것을 돌려달라고 주장해 한국측의 청구권과 상쇄하자는 얘기다.’ 그러니 배상 요구는 그만두라는 취지였죠.

망언의 다섯 유형

또 하나는 ‘당시 일본이 하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한국에) 들어갔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언의 원형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1986년 후지오 마사유키(藤尾正行) 당시 문부상의 발언(한일합방은 형식으로나 역사적 사실로나 합의로 성립된 것이다. 한국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한일합방이 없었다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한반도에 손을 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월간 ‘문예춘추’ 1986년 10월호-편집자), 1995년의 에도 다카미(江藤隆美) 당시 총무청장관의 발언(한일항밥은 강제적이었다고 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총리의 발언은 틀렸다. 한일합방이 무효라면 국제협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당시는 나라가 약하면 당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1995년 10월, 기자간담회에서 비보도 전제로 발언-편집자), 2003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의 발언(우리는 결코 무력으로 침범하지 않았다. 한일합방을 100% 정당화할 생각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들(조선인)의 선조에게 책임이 있다. 식민지주의라고 해도 매우 앞선 것이었고 인간적이었다:2003년 10월 도쿄 도내 한 집회에서 강연하며-편집자) 등 여럿 발언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일부러 거짓말을 지어냈다기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 것이겠지요.

와카미야 망언을 유형화해보면 5가지쯤 됩니다.

첫째는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는 것. 구체적으로는 철도나 항만 등을 건설했다는 것으로 한마디로 요약해 ‘근대화를 위해 꽤 공헌한 것 아니냐’는 유형입니다.

둘째가 ‘일본이 합병하지 않았다면 언젠가 러시아나 중국, 특히 러시아가 합병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일본만 나무라는 것은 심하다’는 생각입니다.

셋째는 ‘본래 합방 자체가 합의였다. 확실한 조약에 근거했다’는 유형입니다. 1995년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의 발언(일본은 36년간 한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고, 한일합방조약을 서로 확실하게 인정한 결과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대신 협력금을 내마고 해왔다. 한일합방조약은 원만하게 맺어졌다:1995년 6월 강연과 기자회견에서-편집자)처럼 ‘한일합방조약은 원만하게 맺어졌다’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시하라 씨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조선의 총의(總意)였다’고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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