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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 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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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1948년 5·10 선거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란을 벌이다 와해된 듯합니다. 그 결과 이극로 계열은 북으로 올라가고, 조봉암 쪽은 남에 남았고요.

강 :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때 조봉암씨가 이극로씨랑 그걸 하다 5·10 선거에 참가했어요. 5·10 선거는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빼놓고는 모두 반대했습니다. 저도 반대 일선에 섰고요.

박 :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갔더니 이극로씨 묘지가 있더군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왜 북한행을 택했을까요?

강 : 그 사람이 왜 북에 남았는지는 분명치 않아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시는 대부분이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는 겁니다. 1948년 유엔총회 결의-유엔이야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던 시절이니-대로 단독선거를 하면 나라가 동강날 판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방되고 3년도 채 안 된 시점에서 분단이 되게 생겼으니 다들 반대할 수밖에요. 남쪽에다 정부를 세우면 이북에 또 정부가 설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전쟁으로 가는 것 아니냐, 그러니 이건 절대로 안 된다면서 들고일어났죠. 이승만 박사는 이미 1946년에 단독정부라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이 양반 머릿속엔 어떻게든 대통령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박 : 만약 장덕수씨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의원내각제로 갈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요?



강 :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죠. 어쨌든 한국민주당과 서북청년회말고는 전부 5·10 선거에 반대했습니다. 미국도 순우익들만으로 선거가 치러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어요. 그래서 이승만 박사가 남한 정부에는 우익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조봉암씨를 끌어다 넣고, 그 다음에 김구 선생 계열에선 신익희씨를 끌어넣은 것이죠. 신익희·조봉암을 끌어넣음으로써 충칭 임시정부 계통에서 좌익 인사까지 망라됐다는 인식을 주려 했던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조봉암이라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그가 5·10 선거에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공산당에서 탈당하더니 5·10 선거에도 참여했고, 거기에서 당선돼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을 했잖아요. 너무 왔다갔다한다 싶었습니다.

요시다 총리도 혀 내두른 정략가

박 : 저도 그 점이 1950년대의 소위 혁신세력들이 조봉암씨를 신뢰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와 갈등관계였던 박헌영이 북한에서 제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로선 남한에 남아서 선거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강 : 제가 보기에 조봉암씨는 원래부터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신봉했다기보다는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그 방편으로 내세운 듯합니다. 일제시대에는 공산당과 민족주의자 사이에 별로 갈등이 없었습니다. 저도 감옥에 있을 때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방을 쓰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피차 생각이 다르지 않았어요. 어떻게 민족을 독립시킬 것인가 하는 생각들만 했으니까.

박 : 미군정 자료를 보면 조봉암씨가 전향하는 과정에도 미군정이 개입했고, 전향한 다음에도 조씨가 미군정 장관들을 여러 차례 만나 “내가 공산당을 누를 수 있는 당을 만들 테니 지원해달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이 조봉암씨에 대해서만 유독 ‘가짜 전향’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강 : 저는 가짜 전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조봉암씨를 위해 여러 번 증언하기도 했지만, 그 사람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확실한 증거를 하나 들어볼까요? 6·25가 나서 사흘 만에 서울이 무너지자 국회의원들이 다 도망가버렸어요. 그때 조봉암씨가 국회에 있던 비밀문서들을 자기 차에다 싣고 빠져나왔는데, 문서를 차에 가득 싣느라 부인을 태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부인이 거기서 죽었어요. 그 사람이 이북하고 통합하려 했던 사람이라면 인민군들을 영웅으로 맞이했지,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그 사람이 지조가 굳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변절을 모르는 지사형 정치가가 아니었어요. 그는 대단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현실을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적어도 수십 년 앞을 내다보고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제까지나 이극로씨와 돌아다녀선 될 일이 없을 것 같거든요. 그렇게 판단하고는 마침내 이 박사와 손을 잡고 나온 겁니다. 물론 이 박사도 그 사람을 이용한 것이고. 이걸 봐도 알 수 있지만, 이 박사는 탁월한 정략가(politician)예요. 아마 정략가로서는 대한민국 역사에, 아니 미래에도 그런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무렵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나는 정치적으로는 이 박사의 상대가 못 된다”고 털어놨을 정도예요. 미국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는 미 의회에서 증언할 때 “이 박사 앞에 있으면 커다란 바위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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