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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나의 두꺼비 축구단|이기준

  • 글: 이기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전 서울대 총장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나의 두꺼비 축구단|이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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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교수 오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딱 2~3년만 하겠소.”

당시 나는 스스로도 강단 체질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교수보다는 사업 쪽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우리 경제가 어느 정도의 기반을 갖춘 상황이었다면 나는 아마 처음부터 비즈니스 쪽으로 진출했을지도 모른다. 2년, 길어야 3년 동안만 멋지고 보람 있게 교수생활을 해보자고 작심을 하고 나는 유치 과학자 케이스로 항공편을 제공받아 한국에 왔다. 입신출세도 금의환향도 아니었지만 모교의 강단에 선다는 데에야 마음이 설레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1971년이었다.

학생 대표로 교수회의에 참석

공학도이면서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선친의 열혈(熱血)을 이어받은 탓인지 나도 학생시절부터 ‘캠퍼스 바깥’의 일에 관심이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교수가 된 후에도 모순된 것을 바로잡는 데에는 겁없이 결사(結社)를 하는 등 자주 일을 저지렀다.

내가 대학 3학년을 마치고 4학년에 올라갈 무렵으로 기억되는데,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학생회장을 비롯한 세 학교의 학생대표 몇몇이 명동의 태극당에 모여서 ‘개진회’(사회개혁과 진보를 위해 활동하자는 취지였을 것이다)를 결성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모임에 공대생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했다. 그러니까 공과대학의 다른 학우들보다는 세상 보는 시야가 조금쯤 더 넓었거나 아니면 ‘삐딱했던’ 모양이다.



이내 4·19 혁명이 일어나고 세상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공과대학은 변두리 외진 곳인 태릉 근처 공릉동에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가끔씩 바깥 나들이를 해서 시국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내가 학생들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앞에 나서게 되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면서 자유당 시절의 관제 조직인 학도호국단이 없어지고 새로운 학생 자치조직을 결성하게 되었는데, 그 준비과정에서 내가 공대 학생대표를 맡았다. 억눌렸던 욕구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기는 공과대학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우선 자유당 독재정권에 유착했던 교수를 배척하자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빗발쳤다. 학교를 떠나야 할 교수들의 명단이 공공연히 나돌기도 했으니 교수의 진퇴가 학생들의 손에 달려 있었던 셈이었다.

어느날 평소 존경하던 강웅기 박사가 학생 대표격인 나를 따로 불렀다.

“물론, 강의는 제대로 않고 자유당 정권에 일조했던 교수가 있다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방예의지국에서, 더군다나 최고 지성들이 모였다는 대학에서, 해당 교수들에게 평소에 이러이러한 것은 문제가 있으니 고쳐달라는 요구 한마디 없다가 불시에 물러나라고 쫓아낸다면 그걸 사회정의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

나는 강 박사의 그 의견에 전적으로 찬동해서 학생들을 설득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교수들은 너나없이 불안해했다. 나는 학장에게 교수회의에 학생대표로 참가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3학년 학생 두 명을 데리고 교수회의에 참석했는데, 그때 내가 뭐라고 발언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으나 ‘우리 공대에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니 안심하시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좌중에서는 박수가 터졌지만 한편에서는 ‘박수는 무슨 박수!’라며 자조섞인 얘기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쑥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뒤틀렸던 체제가 붕괴되고 아직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지 못하던 혼란기가 아니고선 상상하기 어려운 해프닝이었다.

두꺼비 축구단의 탄생

10여년 뒤, 내가 서울공대에 조교수로 부임해 왔을 때 4·19 당시 젊은 교수였던 사람들 중에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두어 명 있었다. 어쨌든 내가 학생이 아닌 교수로 부임하고 보니 공과대학이 돌아가는 시스템 자체가 고쳐야 할 것 투성이였다.

1971년 말경 나는 젊은 교수 10명을 규합했다. 명분은 공대교수 축구단 결성이었다. 운동에 소질이 있든 없든, 두 발로 뛰어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은 찰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내지른 공이 앞으로 가면 어떻고 옆으로 튕겨나가면 또 어떤가. 그런데 젊은 교수들이 축구단을 결성한다는 소문이 나자 우선 학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나는 “학장이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두면 정말 무슨 정치적인 모임이라도 결성하려 했던 것처럼 오해받기 십상이니 그대로 밀고 나가자”고 설득했고 대부분이 내 의견에 동조했다. 그리하여 명동에 있던 한일관에서 축구단 발족모임이 열리게 되었다.

“우선 이름부터 근사하게 짓자고.”

“어이, 여기 소주부터 몇 병 갖다주세요! 두꺼비 3병만 줘요!”

“뭐? 두꺼비? 그거 좋다. 축구단 이름을 두꺼비로 하자!”

“그거 괜찮네. 우리나라 사람들 두꺼비 좋아하잖아. 아이를 낳을 때도 떡두꺼비 같은 아들 낳으라고 하잖아.”

그래서 소주 병뚜껑에 그려져 있던 ‘두꺼비’가 공대교수 축구단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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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기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전 서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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