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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③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 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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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 제가 보기에는 상당수 지식인들이 지지했어요. 올 것이 왔구나 싶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럴 만도 했죠. 민주당 정부는 도무지 나라를 끌어갈 수 없는 정부였어요. 한마디로 완전히 카오스였습니다. 수습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오죽하면 ‘독재는 나쁘지만 무질서보다는 낫다’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그러니 뭔가 일이 터져서 ‘정리’를 해야 선거라도 치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일반 국민 중에도 미국 사람들이 본 것처럼 쿠데타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좀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죠. 때문에 그 무렵엔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 세력이 박정희 외에도 여럿 있었어요. 내가 알기에도 두세 군데는 됩니다.

박 :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강 : 가령 김홍일 장군은 저더러 “이러이러한 계획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고, 그밖에 이범석에게도 모종의 계획이 있다, 이한림 장군도 움직인다는 등의 말이 많이 돌았어요(실제로 당시 미 CIA 한국지부에서는 박정희와 관련된 쿠데타설 외에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민족청년단의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저는 혁명이 어디에선가는 일어나리라고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도 협조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혁명이 성공해서 그 사람들이 뭘 같이 하자고 하면 입장이 무척 난처할 것 같고, 실패해도 모의한 사람으로 연루될 것 같아서 그런 상황을 피하려고 일단 일본으로 떠났죠. 책에는 교회 일로 갔다고 썼지만.

박 : 일본으로 가신 게 정확히 언제입니까.

강 : 1961년 5월 초인 듯합니다. 1962년 4·19 2주년 무렵을 계기로 어디선가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민주적인 국민선거를 통해 민주당 정부가 선 지 8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걸 못 참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8개월 만에 민주당 정부는 완전히 죽을 쑨 겁니다. 의거를 일으킨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면서 민주당에 정권을 맡겼는데, 민주당은 자기들끼리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허구한 날 싸움판을 벌였습니다(신파는 장면 계열로 1955년 민주당이 결성될 때 민주당에 합류한 원내 자유당 계열, 흥사단 계열 등으로 구성됐다. 구파는 1945년에 결성된 한국민주당과 1949년 한국민주당을 모태로 조직된 민주국민당의 주도세력들을 의미한다).



결국 신파가 내각의 실권을 잡았는데, 신파 내부에서도 노장파와 소장파가 대립하면서 자기들끼리 싸움하느라고 아무것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부산에서는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이북 학생들을 만나겠다고 올라오질 않나…4·19로 데모크라시(democracy)를 쟁취했지만, 당시 서울 거리는 ‘데모크레이지(demo-crazy)’였어요. 매일같이 시위만 했습니다. 그러니 이북의 움직임이 걱정될 수밖에요. 그런 시점에 쿠데타가 터졌기에 군사혁명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집권하는 것에 대해 불안감은 있었지만, 식자들은 대부분 ‘당장은 할 수 없지 않겠나, 좀 기다려보자’는 태도였죠.

박 : 쿠데타 직후 시기에 대해서는 너무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신 듯합니다. 즉 당시 상황에서는 쿠데타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박정희 개인에게도 뭔가 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이후의 개인 박정희와 박정희 시대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강 : 처음에는 “질서만 회복하고 나서 곧 군인의 본 업무로 돌아가겠다”고 혁명군으로서 확실히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안 지켰어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장기 집권 의지를 뚜렷하게 드러냈습니다. 중앙정보부를 만들고는 어지간한 사람은 다 좌익이라며 잡아넣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되니까 군사정부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 결국 삼선개헌에까지 이르자 이거 정말 장기 집권으로 가는구나 하고 절실히 깨닫게 된 겁니다. 그렇게 장기 집권을 준비하던 시기를 2기 박정희 시대라고 할 수 있겠죠. 3기는 이른바 유신헌법 이후의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 토막으로 나눠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렇듯 시기별로 나눠 봐야지, 전체를 한마디로 어떻다 하고 얘기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시각입니다.

‘1기’는 높이 평가받아야

박 : 저도 목사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박정희를 평가하면서 부정적이다, 혹은 긍정적이다 하면서 전생애를 한칼로 잘라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강 : 그렇습니다. 뭐든지 일도양단해서 한 쪽만 보려하는 데서 역사적 평가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경제만 해도 그래요. 실제로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우리 경제라는 건 경제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그야말로 기아에 허덕이는 농업국가였습니다. 제가 지금도 박정희씨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양반이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진심에서, 자신의 생래적 양심에 따라 이들 굶주리는 국민을 가난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하면 농민들이 제대로 벌어먹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경제를 살려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경제발전을 위해 자기개혁을 독려한 것은 그 목적도 순수했고, 성과도 상당했습니다. 이런 점은 분명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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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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