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안동선비’의 격조와 의리 이어가는 千年不敗之地

  • 글: 박재광 parkjaekwang@yahoo.co.kr 사진: 정경택 기자

    입력2004-03-03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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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선비’의 격조와  의리 이어가는 千年不敗之地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 16세기 기록물인 ‘영가지(永嘉誌)’는 경북 안동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93) 종택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천년 동안 패하지 않고 번성하는 땅’이란 뜻으로, 전쟁, 기근, 전염병 등 삼재(三災)가 없다는 의미다.

    학봉종택에 처음 들어서면 산세가 매우 부드럽다는 인상을 받는다.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을, 동(動)보다는 정(靜)을 중시한 동양의 현자를 빼닮았다고나 할까. 종택 뒤편의 내룡은 작은 동산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아담하고 부드럽다. 내룡은 태조산(太祖山)인 천등산에서 20리를 굽이쳐 내려온 맥이다. 또한 집 앞 안산(案山)은 둥글둥글한 금체(金體) 형태의 작은 동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대(案對)도 쌀과 재산으로 간주되는 노적봉이라 재물이 모이는 터라고 볼 수 있다.

    학봉종택은 풍수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양반의 도시’ 안동 일대를 대표하는 고택 중 하나다.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풍뢰헌(風雷軒)과 운장각(雲章閣) 등 전부 합쳐 90여칸, 2000평에 이르는 규모를 자랑한다. 특히 운장각에는 1만50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503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민간에서 보관하는 문화재로는 국내 최대 규모. 안동 일대 명문가는 대개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70)에 연원을 두고 있지만, 그 다음으로는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1542∼1607)에 그 연원을 둔다.

    ‘안동선비’의 격조와  의리 이어가는 千年不敗之地

    안주인의 주 생활무대인 광채와 뒷마당. 가지런히 널린 빨래와 장독대가 풍요롭게 느껴진다.

    학봉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의리가(義理家)였다. 임금 앞에서도 할 말은 하고야 마는 강직함,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갔을 때 일본인들에게 보여준 조선 선비로서의 자존심과 격조 높은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안동 사람들의 자랑거리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장에서 의롭게 죽었다.

    학봉의 애국심은 직계 후손들과 제자들에게 전승됐다. 학봉의 학통을 이어받은 제자이자 11대 종손인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1827∼99)은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제자 60여명을 배출했다. 이들 중에는 학봉의 직계 후손이 11명이나 된다. 또한 학봉의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1887∼1946)은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치기로 작심하고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 700두락, 18만평의 전재산(현 시가로 180억원)을 독립군 자금으로 내놓았다.



    이처럼 국가를 위해 물심양면 애국심을 보인 학봉종가의 정신은 ‘현재진행형’이다. 초·중·고교 교사들을 유난히 많이 배출했는데, 집안에 교장만도 무려 30여명이나 된다. 아마도 그의 후손들은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는 조국을 위해 선비 집안의 후손이 할 수 있는 가장 뜻 있는 일로 후학 양성을 꼽았던 것이 아닐까.

    ‘안동선비’의 격조와  의리 이어가는 千年不敗之地

    ①②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안경과 가죽신발 등 선조의 유품들.<br>③손님에게 내놓은 소박한 다과상. 안동식혜가 보인다.



    ‘안동선비’의 격조와  의리 이어가는 千年不敗之地

    제례의식 때 업무분담을 표시한 집사분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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