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현장 리포트

급증하는 화학물질 중독사고

폐 뚫고 간 찢는 10만 흉기, 온 가족을 노린다

  • 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급증하는 화학물질 중독사고

3/4
급증하는 화학물질 중독사고

전문가들은 “안전마개만으로도 화학물질 중독사고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 시판되는 화학제품들은 대개 안전마개가 없다.

50대 중반의 주부가 의식을 잃은 채 응급실에 실려온 적도 있다. 이 환자는 응급실에 온 지 이틀 만에 깨어났는데, 수면제 과다 복용에 의한 중독으로 밝혀졌다. 만성적인 불면증에 시달리다 수면제를 10여알 정도 먹고 잠이 들었는데, 그만 혼수상태에 빠진 것.

노 교수는 “자살 의도로 수면제를 50~100알 삼킨 경우 위 세척 등을 통해 빼내면 별다른 위해를 입지 않는다. 그러나 10알 정도 먹고 잠이 들면 수면제 성분이 모두 신체에 흡수되기 때문에 자살을 시도한 경우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면 근육계통이 모두 파괴되는데, 심장이 멈춰 급성신부전으로 사망할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중독에 의한 사망 중 가장 비중이 큰것이 바로 농약 중독이다. 자살이든 사고든 농약 음독사고는 연간 2600여건(2002년 기준)에 달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농약 중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전체 사망 건수의 60%를 차지하는 제초제 그라목손. “그라목손을 마시면 100% 사망한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할 정도로 치사율이 높다. 한 모금(10ml)만 마셔도 치사율은 50~70%. 그 이상 마실 경우 치사율은 90~99%다.

이렇듯 위험한 그라목손이 관리 부실로 아까운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어은경 교수는 “할머니가 희석시킨 그라목손을 박카스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20대 손자가 술에 취해 음료수로 착각하고 한 모금 마셨다. 그라목손은 청년의 폐에 있는 모든 세포막을 파괴했고, 그는 폐가 점차 딱딱해지면서 사고 발생 한 달 후 사망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라목손의 엄청난 위험성 때문에 의사 300여명이 ‘그라목손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란 모임을 만들었을 정도다. 이들은 “일본에선 그라목손을 5% 농도로 희석한 제품을 판매하는데, 우리나라 시판제품의 농도는 24.5%라고 지적하면서 농도를 낮춰 판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안전마개를 장착해 충동적인 자살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경북 안동병원 응급의학과 김욱진 과장은 “부부싸움을 한 후 홧김에 그라목손을 털어 마시거나, 다른 병에 넣어둔 그라목손을 물로 오인해 마시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다”면서 “그라목손의 농도를 낮추고 안전마개를 장착하면 사고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과장은 “그라목손을 마시게 되면 곧장 식도에서 위까지 심한 궤양이 나타나고 간과 폐 조직이 딱딱하게 굳으면서 호흡부전 등 극심한 고통 속에 사망하게 된다는 얘기를 꼭 기사에 넣어달라”고 부탁할 만큼 그라목손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그렇다면 이렇듯 급작스럽고 어처구니없는 화학물질 중독사고를 예방할 수는 없는 걸까. 전문가들은 “안전마개 도입만으로도 어린이 중독사고의 상당 부분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 시판되는 가정용 화학제품 중 안전마개가 달린 제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소비자보호원이 지난해 11월 안전검사 대상으로 지정된 방향제, 세정제, 접착제, 가구광택제 등 화학제품 49종을 조사한 결과 어린이 보호포장이나 보호용기를 갖춘 제품은 단 5개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 5개 제품은 모두 수입제품이었다.

특히 미국, 캐나다, 유럽 등에서 어린이 보호포장·용기 의무사용 대상으로 규제하는 29개 제품 중 수입제품 2개를 제외한 나머지 국산제품은 모두 보호포장·용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제품들은 방향제, 접착제, 세정제, 얼룩제거제 등으로 에탄올이나 이소프로필 알코올, 등유, 아세톤 등의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용 앞면창유리 세정액 제품들의 경우 호흡곤란, 혈관과 신장기능 손상 등을 일으킬 수 있는 메틸알코올을 포함하고 있는 데도 안전마개는커녕 위험을 알리는 표시조차 없었다.

美, 안전마개로 사망률 90% 줄어

이 때문에 대한의사협회와 환경운동연합이 설립한 ‘21세기 생명환경위원회’는 화학제품에 안전용기 사용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호용기 사용을 의무화한 화학제품은 아세트아미노펜, 이부프로펜, 철분 등을 함유한 의약품이 유일하다. 그러나 이 같은 식약청 고시(2003년 7월부터 시행)는 의약품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가정용 화학제품까지 안전용기 포장을 의무화하는 법률 제정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원민경 변호사(법무법인 자하연)는 “미국은 1972년 중독방지포장법을 도입한 후 어린이 약물중독 사망자수가 90% 이상 줄어드는 효과를 거뒀다”며 “어린이의 85%가 설명 없이 개봉할 수 없는 용기나 포장 등 명확한 기준을 삽입한 안전마개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호포장·용기, 즉 안전마개란 어떤 것일까. 지난 5월3일 서울대병원에서 열린 ‘어린이독극물 사고 예방대책’ 심포지엄에는 안전마개를 사용한 여러 화학제품이 진열됐다. 이들 제품은 대다수 수입제품으로 성인의 경우에도 뚜껑을 여는 방법을 알아차리는 데 30초~1분이 걸릴 정도로 특수하게 고안된 것들이다.

3/4
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목록 닫기

급증하는 화학물질 중독사고

댓글 창 닫기

2022/08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