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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 ⑥

前衛에 선 신세대 무협작가들

서술 실험으로 영웅주의 뛰어넘다

  • 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 junaura@snu.ac.kr

前衛에 선 신세대 무협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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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衛에 선 신세대 무협작가들

특이한 서술구조로 전위적 무협소설 세계를 추구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

이러한 혼란은 작품 말미에 가서야 비로소 정리된다. 추리소설 형식을 몸통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도입부에서 제시된 의문의 내막이 밝혀져가는 과정으로 스토리를 구성한 것이다. 사실은 ‘기묘일’이라는 표지로 시작된 세 번째 장면부터가 현실이다. 그리고 설진명은 실제로 시원의 아버지였다. 오히려 처음 설 아저씨가 등장하는 장면이 조작된 기억이다. 설진명은 시원에게 술법을 베푼 일을 시원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설 아저씨의 기억을 집어넣은 것이며, 다시 그 위에 ‘기묘일’이라는 표지로 시작되는 처음 두 장면의 환각을 겹쳐 쌓은 것이다. 그러니 주인공 시원이 혼란을 겪는 것은 물론, 독자까지도 시원 못지않은 혼란을 느끼며 책을 읽게 된다.

설진명의 이러한 행동은 무림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는 데 시원 부자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다소 개연성이 부족하여 도입부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설정했다는 느낌을 주지만, 이 작품의 핵심 모티프와는 잘 부합되는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핵심 모티프는 자아의 정체성과 그 안정성에 대한 심문이다.

만약 기억이 자아 정체성의 근거라고 할 때, 기억이 바뀐다면 이미 같은 자아가 아니지 않겠는가. 시원은 온갖 곡절을 겪은 뒤에 자신이 환검문에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진실의 내막을 다 안 것은 아니다. 진실은 설진명이 죽통 속에 넣어 강물에 띄워보낸 편지를 통해 독자에게만 전달된다.

그런가 하면 진실의 내막을 다 안다고 해서 자아 정체성의 안정성이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원래 설진명은 무림맹의 맹주 연운경을 죽이고 연운경으로 가장하여 환검문의 복수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자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결국 설진명이 아닌 연운경으로 변해간다. 위지혁의 경우는 더욱 극단적이다. 실종되었다던 천하제일의 고수 위지혁은 법술의 힘을 빌려 젊은 여자로 화신한다. 물론 여자가 된 위지혁의 기억은 온전하다. 그러나 그는 위지혁이기를 포기하고 선우비라는 한 여자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요컨대 이 작품은 기억과 육체, 환각과 현실, 거짓과 진실 등의 갈등 속에서 자아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불확정성의 전망을 제시하는 셈이다. 바로 이것이 작가의 의도라면 도입부의 다소 작위적인 서술은 독자에게 혼란을 체험하게 하는 아주 적절한 방법이라 할 것이다.



장상수의 ‘삼우인기담’(1997)은 필자가 지금까지 본 무협소설 중 가장 과격한 형식 실험을 한 작품이다. 대뜸 ‘라쇼몽(羅生門)’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일정 기간 동안 벌어진 사건을 관련된 세 인물의 시각을 통해 세 차례 되풀이해 서술한다.

세 번 반복되는 이야기

제1권은 ‘흑사회’라는 비밀조직의 하급 살수인 주인공 남자를 1인칭 화자로 하여 서술된다. ‘나’는 처음으로 견습 살행을 나갔다가 한 여자를 범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바로 흑사회주의 딸이다. 그 후로 ‘나’는 영문 모를 사건을 거듭해 겪고, 그러다가 흑사회와 대립관계에 있는 백룡회주의 딸을 범하게 된다. 백룡회주의 딸은 ‘나’의 아내가 되겠다고 결정하고 가출하여 ‘나’와 살림을 차린다. 결국 ‘나’와 두 여자와의 일이 발각되고 ‘나’와 두 여자는 함께 탈출해야 할 상황에 봉착한다.

제2권은 흑사회주의 딸을 1인칭 화자로 하여 서술된다. ‘나’는 나름대로 일을 해보려다가 약물에 중독되는 바람에 그만 한 하급 살수에게 강간당한다. 그 뒤로 남의 손을 빌려 하급 살수를 죽이려고 온갖 계책을 꾸미지만 거듭 실패할 뿐이다. 그러던 중 자신에게 약물을 쓴 자가 백룡회주의 딸임을 알게 되고 복수를 위해 ‘나’도 그녀에게 약물을 쓰는데, 그 결과 백룡회주의 딸이 하급 살수와 결혼하게 된다. 하급 살수와의 관계로 임신까지 한 ‘나’는 결국 모든 사실이 발각되자 두 사람과 함께 탈출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

제3권은 백룡회주의 딸을 1인칭 화자로 삼는다. ‘나’는 살수의 침입을 눈치채고 약물을 사용하여 방비한다. 그 바람에 흑사회주의 딸이 하급 살수에게 간음당한 것을 알게 된 ‘나’는 그녀가 그를 죽이려고 꾀하는 계책에 일일이 간섭한다. 그러다 ‘나’는 그만 약물에 중독되어 하급 살수에게 간음당한다. ‘나’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하급 살수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그와 살림을 차린다. 결국 모든 사실이 발각되고 ‘나’는 하급살수와 흑사회주의 딸과 함께 탈출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작가는 세 가지 서술 사이의 관계를 정교하게 조직해 각각의 서술에 나름대로 치밀한 디테일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세 가지 서술을 종합해야만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각각의 서술은 각자 서술한 화자의 주관적 진실만 드러낼 뿐이다. 그런데 작가의 관심은 총체적 진실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주관적 진실과 그것의 한계를 드러내는 데 주된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세 인물은 저마다 자신이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남자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의 인과관계를 전혀 알지 못하니 말할 나위가 없다. 두 여자는 스스로 총명하다고 믿고 실제로도 총명하지만, 그럼에도 현실은 그녀들의 의도와 계산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작품제목 ‘삼우인기담’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들 세 사람 모두는 어리석은 사람, 바보들인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서로에게 상처와 피해를 준다. 물론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이루어진다. 작가는 개별자의 삶의 조건이 바로 이런 의미의 어리석음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작중 인물들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고 대명사나 신분 명칭으로만 불리는 것도 이러한 작가의 의도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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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 junau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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