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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환의 문화오디세이 ⑤

한국의 세대투쟁과 세대감각

그들은 왜 아비를 부정했나

  • 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eutekom@hanmir.com

한국의 세대투쟁과 세대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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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세대투쟁과 세대감각

1961년 5·16쿠데타에 성공한 군인들이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상실의 세대’이자 ‘도피의 세대’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잉여인간’ ‘인간 오발탄’ ‘병신’으로 불렀다. 각각 손창섭의 ‘잉여인간’(1958), 이범선의 ‘오발탄’(1959),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1966)의 소설 제목이다. 이 소설들에서 전쟁을 겪은 주인공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과 무기력에서 헤어날 줄을 모른다.

전쟁 후의 모순이 누적되다가 4·19혁명이 일어났을 즈음에 전후 1세대는 30대가 됐다. 1960년대 초, 즉 4·19와 5·16이 있던 당대의 감각으로 볼 때 당시의 30대와 20대는 서로 다른 세대로 인식됐다. 1960년대 초에 씌어진 모든 세대론에서 이들은 구분되어 있다. 20대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반면, 30대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임방현은 30대가 “엄청난 현실 앞에서 생활방편과 처세의 필요에 따라 움츠리거나 전 세대의 풍조에 물들었고 4·19의 폭풍 앞에서 초조한 방관자와 무력한 동조자의 자세를 취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4·19세대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도 없고 훈련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이던 송건호는 좀더 강하게 30대를 비판했다. 30대는 유소년기에 엄청난 혼란과 분열을 목격했기 때문에 피해의식이 강하다. 그래서 “불안하고 공포에 가득 찬 전쟁 분위기 속에서 일신의 안전을 위해 도피해보자는 것이 일반적인 처세술이 되었고 생활태도가 되었다. 민주주의고 민족주의고 공산주의고 도시 ‘主義’가 붙은 것은 덮어놓고 기피하는 경향이 생기고 가치판단 의식이 마비되었다”고 쓴다.

송건호의 글에는 해석상 묘한 대목이 있다.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반공에 투철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의 1920~30년대 출생자들이 실제로 젊은 시절 반공에 앞장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산당과 사생결단을 낸 한국전쟁에서 이들은 오히려 몸을 사렸다(죽음의 공포 앞에서 인간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정상이다). 송건호는 “5·16 이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들에게 징소집 기피현상이 있었다는 것도 위와 같은 ‘보신(保身)’심리 때문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쓰고 있다.



이 평가에 따르면 그들의 ‘투철한’ 반공주의는 실제로는 ‘반공’을 못한 데서 오는 심리적 보상기제이거나 후일 필요에 의해 개발된 기득권 방어논리일 가능성이 높다. 또 ‘반공’이 폭력적인 지배논리가 되면 ‘반공’하지 못하고 ‘비겁’했던 사람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박정희가 빠진 함정을 생각해보자. 남로당 군조직 간부 출신 박정희는 1963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빨갱이’ 비난에 시달렸다. 그 뒤 박정희는 ‘빨갱이’에 대해 가장 철저한 적대자가 된다. 전후세대에게 있어 반공이란 합리적 이념으로 선택된 것이라기보다 빨갱이와 빨갱이 적대자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겪은 두려움에 대한 조건반사반응이 누적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세대혁명으로서 4·19

이 세대들 가운데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며 스타이자 문화적 아이콘이 된 사람은 비평가 이어령(1932년생)이다. 1956년 ‘우상의 파괴’라는 평문을 발표하며 일약 유명인사가 된 그는 분단 이후 한국 문단의 어른 노릇을 하던 김동리·조연현 등을 철저하게 비판하며 새롭고 ‘저항’적인 문학정신의 기치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우상’으로 이어령의 비판을 받아야 했던 김동리와 조연현의 나이도 기억할 만하다. 그들도 40대 초, 30대 중반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해방과 전쟁 사이에 조선 문단을 이끌던 대가급 문인들이 대다수 납북·월북한 뒤 저절로 ‘어른’ 자리에 앉게 된 것이었다. 결국 젊은이가 젊은이에게 ‘우상’이라 비판받은 셈이다. 이처럼 젊은이들 사이에서 세대투쟁이 벌어졌을 때에야 중·노년층은 어떠했겠는가. 살아있는 시체 취급을 받지 않았겠는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업적이 많고 세대적 동질감이 높은 것으로 인식되는 4·19세대는 전후 2세대로, 1959년에서 1963년 사이에 일어난 정치적 격동을 겪으면서 하나의 세대를 형성했다. 4·19혁명은 대학생과 20대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라는 점에서 사회 전반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재미있는 점은 4·19 이전에 기성세대의 눈에는 대학생들이 전후파적인 ‘3F’, 즉 나태·나약·불신(Faulheit·Feiheit·Falschheit)에 빠져 불건전하고 무능하게만 보였다는 것이다(고영복 ‘4월혁명의 의식구조’, 4월혁명론 90쪽). 특히 당시의 40대들은 자기들이 20대 학생시절에는 야심만만하고 민족의 현실에 비분(悲憤)하는 청년다운 기풍이 흘렀는데, 지금 청년에게는 그러한 기풍을 찾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런 그들이 혁명으로 떨쳐 일어나 ‘기성세대 타도’를 외치리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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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eutekom@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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