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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기⑦|늘재에서 문경새재까지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난다”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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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는 웬 고갠가,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난다”

청화산 중턱의 정국기원단. 멀리 속리산 주능선이 보인다.

은터재를 넘어 구왕봉으로 가는 길에서는 이곳이 봉암사 도량임을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등산로를 막아놓은 목책과 노끈이 거친 방식으로 경계심을 심어준다면, 봉암사 주지스님의 이름으로 써놓은 문구는 중생의 욕심을 완곡하게 달래준다.

“일체중생이 번뇌 틀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으니 출가인은 이에 분발하여 사람마다 본래 구족한 불성을 바로 보아 사람과 천상이 스승됨이라. 이곳은 그와 같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청정도량이므로 현명하신 여러분께서는 양지하시고 출입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구왕봉에 올라서자 연한 오렌짓빛 희양산이 성큼 다가왔다. 산 전체가 큰 바위 형상인데 바위틈에 뿌리박고 자라난 소나무들이 그 운치를 더해준다. 구왕봉에서 20여m쯤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희양산 골짜기를 감상할 수 있다. 희양산에서 뻗어나간 산줄기가 힘을 다하고 숨을 고르는 지점에 바로 봉암사 도량이 있다. 멀리 청정도량을 바라보며 ‘나는 무엇 때문에 백두대간을 타는가’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자문자답하는 사이 산중의 저녁이 빠르게 찾아오고 있었다.

4월24일, 충주에서 연풍을 거쳐 은티마을로 향했다. 충주와 문경을 잇는 3번 국도를 지나는 동안, 택시기사는 지역경제의 퇴보를 아쉬워했다. 문경탄광과 충주비료공장이 활발하게 가동하던 시절 3번 국도는 전국에서 가장 번잡한 도로 가운데 하나였지만, 지금은 1시간을 기다려야 직행버스 한 대가 다닐 만큼 한산한 길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필자는 택시 기사의 푸념을 한 귀로 흘려보내면서도 그의 어감에 묻어나는 충청도 특유의 소박함과 어눌함을 정겹게 느꼈다. 아마도 충주가 배경인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진한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생이 함부로 넘어설 수 없는 희양산 도량을 통과하면서 필자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새벽에 지나가자는 것이고, 둘째는 청정도량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희양산 구간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빗물을 잔뜩 머금은 희양산의 바위를 기어오르면서 저절로 새나오는 신음소리를 자제하지는 못했다.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살짝 비켜서 있는 희양산 정상의 풍광에 반해 터져나온 감탄사도 끝내 지키지 못한 나와의 약속이었다.



희양산 정상에서 지름티재로 돌아 나와 북쪽으로 걷다 보면 오래된 성터가 보이는데, 이곳은 신라시대의 희양산성이다. 삼국시대의 역사에서 한강 유역은 각국의 흥망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따라서 경주가 근거지인 신라의 처지에서 보자면, 문경-상주라인이 한강으로 가는 교두보였고 희양산성도 전략적 요충지에 속했을 것이다.

성터를 지나면 시루봉(914.5m)이 보이고 이곳에서부터 백두대간은 동으로 길게 흘러갔다가 그 길을 되돌아 북서쪽의 이화령 쪽으로 빠져나간다. 종주자로선 빤히 바라다보이는 이화령을 두고 길게 휘돌아 걷는 셈이다. 도중에 이만봉(989m) 백화산(1063.5m) 황학산(910m) 등 꽤 높은 산들을 통과하게 되지만, 백화산 구간을 빼면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아 부담 없이 지날 수 있다.

황학산을 지나면 간벌지대가 나타나고 여기서 왼쪽으로 휘었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경운기가 다닐 정도의 넓은 길이 열린다. 이곳은 좌우로 침엽수가 길게 뻗어 있고 바닥에는 풀들이 알맞게 자라고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조금 더 걸어가니 넓은 길은 오른편 각서리 쪽으로 빠지고 대간은 오솔길로 변한다. 길은 조금 좁아졌지만 혼자 산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군데군데 군사훈련을 위해 만들어놓은 진지와 이동통로를 지나 산허리를 오른편으로 휘감아 돌아서면 이화령 고개가 나온다. 이화령은 1925년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경북과 충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 됐는데, 최근 이화령터널이 뚫리면서 산꾼이나 들러가는 옛 고개로 바뀌었다.

조령샘물에 목 축이는 길손이시여

문경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다. 시내 곳곳에 옛 모습이 간직돼 있는가하면 외곽에 우후죽순처럼 러브호텔이 들어서 있다. 문경이 이처럼 달라진 결정적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세트가 문경새재도립공원에 들어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이 지역에 온천이 개발된 탓이다. 결국 문경의 변화는 내부의 필요성보다는 타지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신용카드가 통용되지 않는 시내의 장급 여관과 너무 비싼 외곽의 러브호텔 중 그 어느 쪽에서도 숙소를 구하지 못하고, 결국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허름한 여인숙에 짐을 풀었다. 문경탄광이 번성하기 전부터 문을 열었다는 이 여인숙은 아직도 연탄을 때고 있었다. 그 이유를 묻자 여인숙 주인은 가슴 뭉클한 세월의 변화를 털어놓았다.

“광부들한테 하룻밤에 600원씩 받은 돈으로 4남매를 대학까지 보냈습니다. 탄광은 사라졌지만 그 사람들까지 잊어버릴 수는 없잖아요.”

4월25일 새벽, 택시를 타고 이화령으로 향했다. 날이 밝으려면 1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했지만, 등산로에는 일찌감치 야간산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화령-문경새재 코스의 첫 번째 고개인 조령산(1026m)까지는 8부 능선을 길게 돌아서 올라간다. 도중에 목을 축일 수 있는 조령샘이 나오는데, 물맛보다도 이곳에 붙어 있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조령샘물에서 목을 축이는 길손이시여! 사랑 하나 풀어 던진 샘물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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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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