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민주노동당의 정파갈등

연합파·좌파…평당원 중심의 ‘민주노동당파’까지 등장

  • 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4-07-28 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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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노동당의 정파갈등이 정점에 올랐다. 당내 양대 정파인 ‘연합’파와 ‘좌파’ 에 이어 최근엔 평당원 중심의 정파 결성움직임까지 생겨났다. 기성정당의 계파와 차별화한 정파 개념을 강조해온 민주노동당. 정파는 계파로 전락하지 않고 당 발전을 견인해낼 수 있을까.
    민주노동당의 정파갈등

    민주노동당엔 다양한 정파들이 활동중이지만 평당원들에 대해서는 폐쇄성을 유지하고 있다. 사진은 국회에 입성한 민주노동당 의원단.

    “굳이 따지자면 나는 당파(黨派)입니다. 내 소속은 민주노동당이죠.”지난 6월12일 ‘신동아’와 인터뷰 당시 김혜경(59)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 신임 대표는 “김 대표 스스로는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그의 말은 특정 정파에 치우침이 없어야 할 당 대표로서의 당위(當爲)를 품고 있었다. 다른 한편 뒤집어보면 당내 정파갈등이 지나치게 과열돼 있음을 방증하는 답변이기도 했다.

    민노당의 정파갈등은 과연 김혜경 대표의 표현대로 ‘성장통(成長痛)’에 불과한 것일까.

    현재 민노당엔 여러 개의 정파가 활동중이다. 전국연합을 중심으로 반미자주화와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표방한 민족해방(NL) 계열의 ‘연합’파,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원회)’ 등을 중심으로 노동자 중심 정당을 지향하는 민중민주(PD) 계열의 ‘좌파’, 당의 핵심 지지기반인 민주노총에 뿌리를 두고 ‘좌파’와 연대하는 ‘중앙파’, 역시 민주노총에 기반을 두고 상황에 따라 ‘좌파’ 혹은 ‘연합’파와 연대를 모색하는 ‘국민파’ 등이다. 학생운동가 출신들의 결합체인 ‘화요모임’, 급진적 사회주의그룹인 ‘평등연대’, 학생운동가 출신의 트로츠키그룹인 ‘다함께’ 등 당내 의견그룹이나 일정한 경향성을 갖는 모임까지 세분하면 10여개로 늘어나기도 한다.

    정파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건 지난 6월2∼5일 실시된 3기 당 지도부 선거. 당 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최고위원을 선출한 이 선거에서 당 대표에 김혜경, 사무총장에 김창현(42) 전 울산 동구청장이 당선됐다. 정책위의장은 과반수 득표자를 내지 못해 6월12~16일 결선투표를 실시, 주대환(50) 마산 갑 지구당위원장이 이용대(49)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김 대표는 정파와 무관한 것으로 평가받지만 김 총장은 ‘연합’파, 주 의장은 ‘좌파’로 분류된다.



    당 지도부 선거 가운데 정파심리가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최고위원 경선. 민노당 최고위원은 총 13명인데, 당연직 최고위원인 당 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의원단 대표를 뺀 나머지 9명이 여성(4명)·일반(3명)·농민(1명)·노동(1명) 등 각 부문별 최고위원이다.

    최고위원회는 당의 최고집행기관. 일상적 활동에 있어 의원단까지 지도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때문에 각 정파들은 자파(自派) 후보들을 당선시키려 치열한 득표경쟁을 벌였다. 선거결과 여성부문에 박인숙 김미희 유선희 이정미, 일반부문에 최규엽 이영희 김종철, 농민부문에 하연호, 노동부문에 이용식씨가 각각 최고위원으로 뽑혔다.

    경선과정에서 정파갈등은 극에 달했다. 보도된 바 없지만, 선거기간 중 일부 농촌지역에선 특정 정파 후보에 기표가 된 견본용 유사투표용지마저 나돌았다. 후보 수도 많은 데다 어느 후보가 어떤 정파 소속인지 속속들이 알 길이 없는 평당원들로선 투표기준을 제대로 설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틈을 타 일종의 ‘모범답안’이 생겨난 것.

    민노당의 ‘정책사령탑’인 정책위의장 선출을 둘러싸고도 심한 갈등양상을 보였다. 민노당 관계자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민노당 사이트 당원게시판은 격조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과정에서 ‘연합’파 소속인 이용대 후보의 지지자가 당원게시판을 통해 ‘주대환 후보는 CIA(미 중앙정보국)의 간첩’이라 비난하고, ‘좌파’ 소속인 주 후보의 지지자는 이 후보를 향해 ‘조선노동당으로 가라’고 비난하는 등 극단적인 인신공격까지 난무했다”고 귀띔했다.

    3기 당 지도부 선거결과를 두고 일부 언론은 ‘연합’파가 사무총장을 비롯해 최고위원 8명을 당선시켜 당직을 ‘싹쓸이’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노당 의원 및 최고위원들을 정파별로 정교하게 분류해보면 기존 언론보도와는 2명 가량 차이가 있다(표 참조).

    또한 일부 언론은 지난 6월말 김종철 최고위원(당 중앙연수원장)이 당 대변인직을 사퇴한 것을 두고 이번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연합’파가 ‘좌파’ 소속인 김 위원마저 대변인직에서 사퇴시켰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됐다는 게 민노당측의 해명. 논란의 당사자인 김종철 최고위원은 “대변인직 사퇴는 정파문제와 관련이 없다. 중앙연수원장이 된 뒤 대변인을 겸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힘들어 스스로 사퇴한 것”이라 답했다.



    유사투표용지 나돈 최고위원 경선

    민노당은 과거에도 당직선거 때마다 정파갈등을 벌여왔다. 이로 인해 일부 선거가 연기되는 등 당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17대 총선 비례대표 후보 선출과정에서도 정파심리가 일정하게 작용했다. 그럼에도 이번 3기 당 지도부 선거에서 특히 정파갈등이 두드러진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당내 지도체제의 변화다. 권영길(63) 의원이 당 대표로 있던 1·2기 지도부는 당 대표와 사무총장 중심의 단일지도체제였다. 게다가 17대 총선 이후 ‘당직·공직(의원직) 분리’ 방침에 따라 당직을 사퇴한 권 전 대표는 정파 문제에 있어 불편부당한 인물로 평가됐다. 하지만 3기 당 지도부의 경우 최고위원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로 바뀌어 다수의 최고위원을 확보하면 정파의 당내 입지를 크게 강화할 수 있게 됐다.

    다른 이유로는 정파들이 이번 선거를 ‘마지막 베팅’으로 인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7대 총선을 전후해 당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정파와 무관한 신규당원들이 급증해 기존 정파들이 당원을 재생산해내던 구조는 거의 사라졌다. 따라서 각 정파들은 차기 지도부 선거 때부터 정파간 이해관계에 따른 투표가 힘들다는 점을 의식해 이번 선거에 총력을 기울인 것. 특히 2000년 1월 창당 때부터 4년간 1·2기 당 지도부를 ‘좌파’가 이끌어왔음을 감안하면 같은 기간 당 지역조직을 장악하는데 힘써왔던 ‘연합’파 입장에선 당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번 선거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강하다.

    전력투구 나선 정파들의 ‘마지막 베팅’

    당 일각에선 ‘좌파’ 계열인 주대환 정책위의장과 ‘연합’파 출신이 다수를 점한 최고위원회 간에 당 정책과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권한의 충돌’이 빚어질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기도 한다. 당헌·당규에 의하면 정책위의장은 당내 ‘2인자’격으로 중앙당 상근인력 100여명 중 50%를 업무상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당 정책연구소와 의정지원단을 총괄하는 중책이다.

    또한 민노당은 한국 정당사 초유의 ‘원내 정당-원외 지도부’ 체제를 구축해 의원단이 일상적으로 당 최고위원회의 지도를 받도록 하고는 있지만, 정파심리가 작동할 경우 이 역시 원활하게 되지 않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와 관련, 민노당의 한 관계자는 “아직까지 ‘불협화음’이 불거진 적은 없다. 하지만 그럴 소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비록 당직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의원들이 후배 격인 최고위원들로부터 일일이 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의원들이 지닌 권위의 위계질서와 당이 중시하는 당헌·당규에 의한 위계질서는 성격이 판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당에서 정파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당의 발전을 위해 상생(相生)도 가능하지만 언제든 극한적으로 대립할 수도 있다. 더구나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노당 내부에서 다양한 노선의 정파들이 경쟁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노선경쟁이 한 정파의 이익이나 당의 이익만을 위한 게 아니라 민노당이 추구하는 노동자·서민의 이익실현, 국민의 이익실현에 합리적인 방법을 찾기 위한 경쟁이 되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하다.

    민노당은 복잡다기한 정파갈등의 최소화를 위해 어떤 대안을 강구중일까.

    “당직선거 때의 정파갈등은 그것으로 끝이다. 각 정파들이 과거를 불문하고 당의 발전을 위해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김창현 사무총장은 “중앙당 당직자에 대한 인사제청권을 가진 사무총장으로서 당직자들의 소속 정파를 따지지 않고 실무능력과 품성 위주로 보직을 주는 ‘인사(人事) 탕평책’을 이미 실시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파들간 정책과 노선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토론회 등을 마련해나갈 것”이라 밝혔다.

    일부 평당원, 새로운 정파 결성

    그렇다고 민노당의 정파갈등이 쉽사리 줄어들 것이라 낙관하기는 아직 이르다. 문제의 핵심은 정파들이 평당원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평당원들에게 폐쇄성을 유지한다는 점. 따라서 활동가들이 중심이 된 정파와 평당원들 간 정보격차는 매우 크다. 당 지도부와 당 활동가들 자신이 특정 정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대외적으로나 평당원들에게는 ‘아닌 척’ 행동함으로써 정파와 관련한 정치적 정보가 평당원들에게까지 공유되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파의 존재를 잘 모르는 평당원들은 막상 당직선거시 후보들이 정파 중심으로 출마하는 현실을 접하고 소외감과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최근 일부 평당원들은 새로운 정파를 결성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가칭 ‘민주노동당파’가 그것이다. ‘민주노동당파’는 ‘평당원의 수평적 네트워크 형성’과 ‘평당원 직접민주주의의 강화’를 위한 평당원의 세력화를 표방한다.

    6월20일 인터넷상에 임시게시판을 개설한 뒤 ‘민주노동당파’ 결성과 관련한 당내 의견수렴 작업을 벌였던 일부 평당원들은 오는 7월24일 민노당사에서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를 위한 모임인 ‘사회민주주의연대’(가칭) 발기인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발기인에는 평당원 40여명이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3기 당 지도부 선거 당시 평당원으로서 당 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현재 ‘민주노동당파’ 결성에 참여하고 있는 김용환씨는 “NL이니 PD니 하는 1980년대식 낡은 논쟁을 펼치며 대립·반목하는 기존 정파들에 염증을 느꼈다. 또한 민노당 내부에서조차 학맥 등 연고주의를 따지는 풍토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며 “‘민주노동당파’ 결성은 궁극적으론 평당원들이 당직·공직선거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전국조직을 갖추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정파 결성’으로 보면 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민노당측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민노당 중앙당 관계자는 “3기 당 지도부 선거에서 평당원인 김씨가 당 대표 후보로 출마한 것에 대해 당내에선 ‘평당원의 출마라는 의미가 있었다’와 ‘당직선거를 희화화(戱畵化)한 돌출행동’이란 상반된 평가가 있다”며 “‘민주노동당파’의 구성원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평당원이 대다수다. 당 간부나 당내 활동가가 포함되지 않아 정파로서의 영향력은 미미할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정파갈등과 관련, 일부 정파와 의견그룹은 지난 6월 중순 ‘새로운 당파 제안문’을 만들어 내부 논의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건은 ‘당 기간조직과 의사구조를 전당적(前黨的) 정파들이 장악하고 있음. 이에 따라 다수 당원들은 당의 의사결정과 집행에서 배제되거나 수동적으로 동원되고, 비정파적 당원들의 취약성이 당 활동 및 발전의 장애가 되고 있음. 이를 극복키 위해서는 전당적 정파들의 경합을 극복하고 ①당 안에서 ②당 발전을 목적으로 ③당원들에 의해 구성되는 ④‘새로운 당파’를 구성해 당의 주도세력으로 기능토록 해야 함’이라 하여 정파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이재영 당 정책국장은 지난해 9월 사견임을 전제로, 당 사무규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정파의 노선 또는 의견, 대표적인 소속원 등을 중앙당에 신고함으로써 그 활동을 보호·보장받는 ‘정파 등록제’를 내용으로 한 ‘당내 정파활동에 대한 당규 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재영 국장은 “민노당이 현재 과도정당이고 강령 또한 과도적 강령인 만큼, 이런 불충분한 부분들을 여러 정파가 열성 활동가를 양산하고 그들이 생산해낸 좋은 의견들로 개선해나가야 한다는 차원에서 정파는 필요한 존재다. 그래서 정파들을 양성화하는 방안을 나름대로 제시해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정파들이 당헌·당규를 위반하거나 선거질서를 문란케 하는 행위, 당 지도부에서 내린 사업지침에 대해 일사불란하지 못한 채 정파의 이해관계에 집착해 분열을 일으키는 행위 등은 여전히 문제”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당 대회나 당 중앙위원회에서 민주노총 산하 산별노조의 총파업을 지원하자고 결정해도 일부 정파가 통일관련 행사 참석을 이유로 동참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독단적 사례들이 적지 않아 ‘치열한 토론, 단일한 실천’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게 이 국장의 설명이다.

    “정파 등록제로 건전한 경쟁 촉진해야”

    당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규엽 최고위원은 “민노당과 가장 비슷한 정당인 브라질 노동자당의 경우 당내에 정파 성격을 띤 5개의 정치적 블록이 있는데 이 블록들이 당 내부에서만 활동하도록 당규에 명문규정을 뒀다”며 “민노당도 장기적으론 브라질 노동자당처럼 정파 활동을 공개적·객관적으로 하도록 관련규정을 두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민노당이 출발부터 여러 정파가 뭉친 정파연합당이었고 이념과 노선이 분명한 진성당원 중심의 대중정당이란 점에서 당내 이너서클인 정파들간 갈등은 사실상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더욱이 민노당은 정파에 대해 학연·지연과 관계없이 이념적 성향을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인물과 지역 중심으로 이뤄진 기성정당의 계파와는 차별화된 개념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정파갈등이 갈수록 심해질 경우 자칫 당원과 유리(遊離)된 단순 계파로 전락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계파로 변질된다면 기성정당과의 차별성은 물론이고 대중정당으로서의 신뢰성 또한 흐트러진다. 민주노동당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민노당의 정파들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까. 민노당이 불필요한 정파갈등을 당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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