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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호주 소년병 론 캐시맨의 인생유전

“나는 자랑스런 ‘가평대대’ 용사, 내 삶은 무너졌지만 후회는 없다”

  • 글: 윤필립 재(在)호주 시인 phillipsyd@naver.com

한국전 호주 소년병 론 캐시맨의 인생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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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호주 소년병 론 캐시맨의 인생유전

한국전 참전용사 론 캐시맨(왼쪽)과 에디 라이트. 1952년과 2004년의 모습이다.

귀가 번쩍 뜨인 것은 참전용사 프랭크가 아니라 필자였다. 에디에게 당장 론 캐시맨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에디는 “론은 지금 출판기념회와 방송시사회 등으로 무척 분주하기 때문에 좀 기다려야 될 것”이라고 했다.

가평전투 對 마령산전투

1951년 4월. 중공군은 춘계 대공세를 펼치며 파죽지세로 남하를 거듭했다. 특히 한국군 6사단을 격파한 중공군 118사단은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비교적 기동이 용이한 가평천 골짜기를 통해 서울-춘천간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연합군의 전선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가평 북방 8km 지점의 목동리 504고지에 배치된 호주 3대대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혼비백산해 후퇴했다. 4월23일 밤 10시경, 6사단을 추격하던 중공군 118사단 선두 연대는 가평을 신속히 점령할 목적으로 종대 대형을 유지한 채 도로와 계곡을 따라 진격하던 중 호주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호주 3대대가 배치된 사정을 전혀 몰랐던 것.

일단 후퇴한 중공군은 이튿날인 24일 새벽 1시경 연합군 전차부대가 재보급을 위해 잠시 철수하자 즉시 반격을 가해왔다. 그후 3대대와 중공군의 일진일퇴 공방은 24일 아침녘까지 이어졌다. 날이 밝아 연합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이 집중되자 중공군은 산더미 같은 시체를 남기고 급히 철수했다. 호주군 1개 대대가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던 중공군 1개 사단을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는, 믿기 어려운 전과를 올린 것이다.



중공군은 가평전투에서 1만명 이상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당했다. 4월26일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춘계 대공세의 실패를 자인하면서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작전상황을 보고했다.

이로써 중공군의 연합군 전선 분할 기도는 저지됐고, 연합군은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됐다. 전사에는 당시 호주군 3대대가 중공군을 막지 못했다면 한국전쟁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대대는 그 공로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고 ‘가평대대’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호주 육군은 가히 기적이라고 할 만한 가평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4월24일을 ‘가평의 날’로 정했으며, 가평 퍼레이드 같은 행사를 통해 호주 군인의 용맹스런 정신을 기리고 있다.

같은 3대대 출신이라도 가평전투를 치른 용사들은 이 전투를 치르지 않은 참전용사들을 한 수 아래로 본다. 가평전투는 그만큼 치열했고 대대원들은 호주 전사에 기록될 만큼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3대대 전우 중에서도 마령산전투를 치른 용사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가평전투의 빛나는 전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막강한 전력의 중공군을 공격해 진지를 탈환한 마령산전투가 방어전투였던 가평전투보다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951년 10월7∼8일 이틀간 벌어진 마령산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호주 육군이 벌인 최대 규모의 전투다. 3대대 병사들은 이 전투에서 90만발의 총탄을 발사했고 1만2000개의 수류탄을 투척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3대대 병사들은 중공군 2개 대대 병력 2000여명을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반면 3대대의 희생은 전사 20명, 부상 89명에 그쳤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3대대의 마령산전투 출신 용사들이 가평전투 출신 용사들의 기세에 순순히 물러날 리 없다.

더욱이 마령산전투의 승리로, 중공군의 동태를 자세히 살필 수 있는 마령산 317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중공군이 집중된 서부전선을 지켜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마령산은 경사가 급한 지형으로 파노라마의 전망을 지닌 요충.

그런 요지인 만큼 마령산을 차지하기 위해 미군과 캐나다군, 그리고 한국군이 각각 중공군과 맞서 싸웠지만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전장에 마지막으로 투입된 호주군이 중공군을 격퇴시킨 것이다.

론 캐시맨씨도 마령산전투 출신의 전쟁영웅이다. 그를 만나고 싶어 에디 라이트씨에게 부탁한 지 두 달이 넘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지난 7월 초 에디로부터 “론을 만나러 가자”는 전화가 왔다.

기찻길 옆 오두막집

시드니의 7월은 겨울이다. 아열대성 기후에 속하는 시드니는 한겨울이라고 해봐야 기온이 10℃ 아래로 내려가는 날이 아주 드물다. 그러나 론 캐시맨을 만나러 가는 7월4일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날씨가 쌀쌀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문득 그의 신산(辛酸)했던 삶이 떠올랐지만 애써 생각을 돌렸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가 살아온 얘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을 에는 찬바람 때문에 옷깃을 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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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필립 재(在)호주 시인 phillipsy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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