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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안 통과시킨 유럽연합의 앞날

외교·안보·국방은 거부권 행사 가능… 요원한 연방국가의 꿈

  • 글: 안병억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과정·유럽통합 전공 anpye@hanmail.net

헌법안 통과시킨 유럽연합의 앞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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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안 통과시킨 유럽연합의 앞날
미국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익을 추구하려는 영국과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EU를 활용하려는 프랑스. 상반된 목적을 가진 두 나라가 국가의 핵심주권인 외교, 안보, 국방 분야에서 거부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이라크전쟁처럼 회원국들의 이해가 달린 국제문제가 발생할 경우, 분열과 대립이 나타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EU의 대통령과 외무장관도 회원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강제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 단일화폐인 유로화 도입으로 경제분야의 통합은 가속화됐지만 외교, 국방 분야는 여전히 개별 국가의 권한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EU의 현주소며 진정한 EU통합은 요원함을 잘 말해준다.

현재 헌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한 회원국은 영국과 아일랜드, 덴마크, 포르투갈,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체코 등 8개국. 경제가 어려운 데다가 자국의 정치기구는 물론 EU기구에 대한 불신이 심한 유럽 각 국에서 과연 헌법안이 무난히 국민투표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992년 6월 덴마크 국민은 국민투표에서 1.4% 차이로 유럽연합조약(일명 마스트리히조약)을 부결시켰다. 결국 덴마크에서 마스트리히조약은 단일화폐 유로와 공동외교안보정책에서의 탈퇴가 허용된 후 다음해 다시 치른 국민투표에서 통과됐다. 이번에 타결된 헌법안도 이와 비슷한 경로를 밟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가장 큰 난관은 영국에서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블레어의 승부수

지난 5월말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EU 헌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영국 언론은 노동당 정부가 EU라는 함정을 내년 봄으로 예정된 총선 이후로 교묘히 피한 뒤 집권 8년 동안 이뤄놓은 교육과 의료보험 서비스 개선을 집중 부각,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블레어가 띄운 승부수라고 분석했다. 즉 야당인 보수당이 유럽의 초국가기구가 영국의 주권을 찬탈하고 있다고 집중 비난하며 헌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고 요구하자, 이 문제가 총선이슈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내놓은 고육책이라는 것. 그러나 블레어는 총선 승리를 위해 유럽이라는 더 큰 혹덩어리를 스스로 키우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2차대전 이후 거대한 제국을 잃고 1973년 뒤늦게 유럽공동체에 가입한 영국은 유럽통합에 대해 실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독일이나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이 다시는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 유럽통합을 추진했다면 영국은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유럽공동체에 가입했다. 하지만 유럽통합이 진전될수록 자랑스런 영국의 역사가 끝나며,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위해서도 유럽통합에 적극적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현재 영국사회에 팽배해 있다. 이런 생각은 설문조사 결과에 잘 드러난다. 지난 6월 헌법안이 타결된 직후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조사대상자의 49%가 ‘헌법안에 반대한다’고 대답했다. 찬성하는 사람은 4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유럽통합을 반대하는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대주주로 있는 ‘더 선’과 여타 타블로이드 신문들이 너무나 잘못된 정보를 국민에게 주입시켰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다수 영국인은 헌법안이 통과되면 EU 집행위원회가 영국의 조세를 인상하며, 영국 여권이 EU 여권으로 대체된다는 등의 근거 없는 지식을 가지게 됐다. 지난 6월 열린 유럽의회 선거에서 EU 탈퇴를 강령으로 내세운 영국독립당이 전체 의석의 15%인 12석을 얻은 것은 현재 영국내 EU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준다.

블레어가 총선에서 이기기 위해 헌법안을 국민투표에 회부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유럽개혁연구소 찰스 그랜트 소장은 “블레어가 총선 승리라는 단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럽이라는 매우 민감한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려 한다. 만약 국민투표에서 헌법안이 거부될 경우 영국은 EU의 주변국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블레어는 EU 헌법이 영국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국민에게 이성적으로 설득하면 국민투표에서 무난히 통과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국민투표 시기는 내년 봄 총선이 끝나고 1년 안, 즉 2006년 봄 이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헌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된다면 영국뿐 아니라 EU 전체에도 큰 짐이 될 것이다.

1992년 덴마크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조약이 부결되자 당시 존 메이저 총리가 이끄는 영국 보수당은 조약의 의회비준을 두고 당이 분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수당은 야당인 노동당보다 의석 수에서 겨우 22석이 많아 비준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존 메이저는 이 조약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반대하는 의원은 출당하겠다고 위협하는 동시에 찬성하면 내각자리를 주겠다고 하는 등 채찍과 당근전략을 함께 구사했다. 하지만 비준이 거부됐다. 결국 메이저 총리가 이 문제를 자신의 신임과 연계, 재비준에 부치고 나서야 유럽연합조약이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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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병억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과정·유럽통합 전공 anpy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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