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고서·책 박물관’ 건립하는 (주)화봉문고 여승구 대표의 古書 수집기

쓰레기더미 뒤져 귀중본 건지고, 외국서적 들여오다 밀수범으로 몰리고

  • 구술 정리: 최희정 자유기고가 66chj@hanmail.net

    입력2004-07-29 18: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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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억원을 호가하는 고려 때 서적부터 1950년대의 영화 포스터까지 (주)화봉문고의 여승구 대표가 모은 고서는 무려 10만여 점에 이른다. 수집가의 길은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한 그는 자신의 삶에서 고서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였다고 말한다.
    ‘고서·책 박물관’ 건립하는 (주)화봉문고 여승구 대표의 古書 수집기

    계미자, 경자자 등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들과 ‘진달래꽃’ ‘님의침묵’ 초판본 등 옛 문학서, 때묻은 지도와 사진 등 여승구 대표가 수집한 고서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요즘 같아서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사재를 털어 건립한 ‘책 박물관’이 개관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비지땀을 흘리며 직원들과 함께 책을 나르고 분류하고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가버린다. 몸이 바쁜 마음을 잘 따라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지난 수십 년간 애지중지하며 수집한 고서를 모아 ‘고서·책 박물관’을 건립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 특히 독일의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200여년 앞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直指心經)을 가졌을 정도로 찬란했던 우리 인쇄출판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다.

    23년째 고서를 수집하고 있는 나를 두고 주변 친구들은 종종 지독하다는 말을 하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서 수집이라는 한 길을 걸어오는 동안 그나마 모아놓은 재산을 야금야금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제법 값이 나가는 책에서부터 영화 포스터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내가 모은 고서는 10만여점이 넘는다. 어떤 사람들은 고서를 팔면 한 밑천 단단히 챙길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러나 나는 고서를 팔 생각이 전혀 없다. 고서는 내 마음의 고향이고 나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지난 20여년간 고서가 뿜어내는 향내에 취해 얼마나 발품을 팔았고 또 마음을 졸였던가. 곧 개관할 책 박물관 서가에 하나씩 꽂혀지는 고서를 볼 때마다 그 책을 구하느라 애간장을 녹이고 환희에 젖었던 지난 세월이 떠올라 가슴이 묵직해지곤 한다.

    내가 고서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건 1982년이다. 하지만 고서와의 첫 인연은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라남도 담양이 고향인 나는 고교 졸업 후 서울대 상대에 진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시골 촌놈이 서울에 올라온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서울에 남고 싶었다. 우선 먹고 자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해서 고종사촌형이 운영하는 고서점인 ‘광명서림’에 들어갔다. 고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 귀동냥, 눈동냥으로 고서적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다.



    그후 어렵사리 중앙대 정외과에 들어갔지만 동생 뒷바라지를 위해 중퇴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서적무역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1963년 ‘팬아메리칸 서비스’를 차려 외국의 학술잡지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등을 수입해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다. 중학시절부터 시인의 꿈을 가지고 교과서나 참고서보다는 시집을 읽고 달달 외웠던 나였기에 사업을 하더라도 책과 관련된 일을 하면 잘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수입해서 판매한 책들이 연달아 성공하면서 사세가 확장됐고 책에 대한 욕심으로 ‘월간 독서’란 잡지도 발행하는 등 왕성한 출판활동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책을 잘 파는 성공한 책장사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다른 버전의 춘향전 300여점 모아

    1982년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국내 최초로 국제 규모의 도서박람회인 ‘서울 북페어’를 개최했다. 이것이 내가 고서수집이라는 평생의 업(業)을 지게 된 인연의 단초이다. 출판사상 최초로 열린 북페어였던 터라 ‘서울 북페어’는 당시 여러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자 유명 학원 국어 강사였던 윤석창씨가 나를 찾아왔다. ‘님의 침묵’ 등 현대시나 소설 초판본 200여권을 북페어에서 팔아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 책들을 몽땅 사들였다. 그리고 북페어 안에 ‘한국문학작품 초판본’ 소전시회를 개최했다. 처음부터 고서수집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고 북페어가 끝나면 경매에 부치려고 했다. 북페어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 계획대로 이 책들을 경매에 내놓았고 모 대학에서 구입의사를 밝혀왔다.

    경매가 성사될 무렵 우연히 언론사 문화부장들과 식사를 하게 됐다. 그 자리에서 경매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은 “여 사장, 그것을 왜 팝니까? 이 기회에 고서수집을 시작해 나중에 박물관 하나 만드시죠”라며 한마디씩 했다. 그들이야 지나가는 말로 한 거였겠지만 나는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책 박물관’은 듣기만 해도 감격스런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언론사 문화부장들이 농담 삼아 던진 말에 나는 감격을 했고 그때부터 고서와의 질긴 인연이 시작됐다.

    내가 본격적으로 고서수집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한 사람은 당시 을유문화사 편집주필이었던 안충근씨였다. 그때 이미 그는 고서의 매력에 흠뻑 빠져 제법 굵직한 고서들을 소장하고 있던 고서 애호가 겸 마니아였다. 나는 회사 일이 끝나면 그와 함께 인사동 고서점을 찾아 곰팡내 나는 고서들을 뒤적였고 청계천 헌 책방을 샅샅이 뒤졌다. 공치는 날도 많았지만 어쩌다 ‘물건’을 만나면 그야말로 열락에 들뜨는 기분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블랙홀’에 빠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내 의식은 고서에 빠져들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쳤지만 몸은 늘 고서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내가 소장한 고서 중에서 단일품목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춘향전이다. 옥중화, 옥중가인, 춘몽록, 춘향가, 성춘향전, 열녀 춘향 수절가, 현대식으로 코믹하게 각색한 1950년대 나이론 춘향전, 춘향의 재판 과정을 법률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법률춘향전 등 수많은 버전의 춘향전 300여점이 내 서고를 빽빽이 채우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국문학자들이 직접 찾아와 연구자료로 참고하기도 한다.

    ‘고서·책 박물관’ 건립하는 (주)화봉문고 여승구 대표의 古書 수집기
    내가 이토록 춘향전에 빠지게 된 것은 이광수의 ‘일설춘향전’ 초판을 우연히 손에 넣은 뒤부터다. 처음에는 단순히 수집욕구 때문에 춘향전을 모으기 시작했지만 춘향전이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개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게 되면서 점점 더 매료되었다.

    윤이상 선생이 작곡한 오페라 ‘심청전’이 서양인들의 심금을 울리지 못했던 것은 효(孝)라는 지극히 동양적인 주제를 다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춘향전에는 남녀간의 사랑이 있고 불의의 권력에 대한 민중의 항거도 있어 외국인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문화상품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는 판단이 선 후 작으나마 힘을 보태기 위해 더욱 수집에 열을 올렸다. 또 우리 고전을 대표하는 작품이고 춘향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많지만 정작 작품들을 모으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더욱 애착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한번 제대로 춘향전을 수집해보겠다는 의욕에 불타서 춘향전이 있다는 곳이면 어디든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김옥균의 암살범인 홍종우가 1892년 파리에서 프랑스인과 공동번역한 프랑스어판 춘향전을 구하기 위해 파리 센 강변의 고서점을 수십 군데나 뒤졌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한 적도 있다. 그 책은 내가 갖고 있지 못한 단 한 권의 춘향전이어서 지금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바르셀로나의 알거지

    춘향전 다음으로 내가 애착을 갖고 수집한 고서는 바로 천로역정이다. 천로역정은 존 버니언의 종교소설로 서양에서는 성서 다음으로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라 한다. 내가 이 소설에 관심을 갖고 100권이나 되는 책을 수집하게 된 데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1983년쯤이라고 기억되는데 일본 오사카를 여행하던 중 기차역 앞에 있는 한큐 지하상가에 있는 고서점가를 들른 일이 있었다. 한 서점에 들어가 “한국과 관련된 고서가 없느냐”고 했더니 깨끗한 천로역정 초판본 두 권을 내놓는 게 아닌가. 그것은 천로역정을 우리나라 판으로 찍은 것으로 삽화도 우리나라 화가가 그렸고 그림 속 주인공도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당시 고서수집을 시작한 지 몇 년 안 됐던 나는 물건을 만났구나 싶어 그 자리에서 구입했다. 그만큼 수집욕구를 억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김포세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천로역정이 적법 절차를 밟지 않고 들여온 고가문화재였기 때문에 밀수품으로 분류돼 통관이 보류됐던 것이다. 애타는 마음에 문화공보부에 달려가서 수입허가서 발부를 요청하고, 다른 한편으론 친지를 통해 김포세관장을 소개받아 부탁도 해보았으나 차가운 반응뿐이었다. 오히려 얼마 후에는 김포세관 심리과로부터 세관조사까지 받았다. 밀수범으로 의심받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책을 외국에서 들여온다는데 무슨 밀수란 말인가?

    수차례 조사를 받는 동안 편법을 알게 됐다. 책을 통관시키지 말고 오사카로 돌려보낸 뒤 일본여행에서 돌아올 때 구입해서 세관에 신고하지 말고 그냥 여행 가방에 넣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개월 만에야 천로역정 한국어 초판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후 은근히 오기가 발동해 천로역정을 모으기 시작했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일본어 초판을 아주 비싼 돈을 들여 구입했고 세계 각국에서 발간된 초판본도 수집해나갔다.

    수집과 관련된 언짢은 일화가 또 하나 있다. 1986년경이었는데,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디스트리프레스(Distripress) 총회가 개최돼 1주일 정도 스페인에 머무른 적이 있다. 고서 수집가라면 꼭 갖고 싶어하는 책 중 하나가 바로 그레고리안 성가집이다. 채색 필사본으로 장정과 제본이 화려한 세계 미서(美書) 중 하나기 때문이다. 이를 구하기 위해 마드리드 구시가지 고서점을 몇 군데 돌아다녔다.

    며칠을 찾아다니던 중 드디어 프라도 박물관 근처 서점에서 그레고리안 성가집 한 권을 발견했다. 들뜬 마음을 억누르고 흥정을 시작해 5000달러를 부르는 서점 주인을 설득해 3000달러에 구입하기로 했다. 문제는 세관 통과였다. 천로역정을 수입했을 때 밀수범으로 오인돼 고생한 일도 있고 해서 서점 주인에게 출국할 때 확실한 통관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주인은 대답을 회피했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코의 철권통치 시기로 수도인 마드리드 도처에 기관총을 든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 정도로 경직돼 있는 사회 분위기였다. 아무 일 없이 반출될 것이라고 해도 가슴이 떨릴 판인데, 희미한 대답을 믿고 들고 나가다 문화재 절도범으로 몰리면 책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자칫하면 형사처벌까지 받게 될 수 있었다. 고서를 수집하는 것도 좋지만 남의 나라에서 감옥살이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쉽지만 결정을 보류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현금과 카드가 들어 있는 지갑을 택시에 놓고 내린 것이다. 일시에 알거지가 된 나는 바르셀로나의 고서점을 구경하려고 했던 일정도 취소하고 바로 귀국 길에 올랐다.

    천로역정이나 그레고리안 성가집을 사려다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건 돈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한국과 스페인의 법과 제도가 국제적인 상식에 맞지 않게 폐쇄적이고 전근대적인 데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30만원에 구입한 고려시대 불경

    이처럼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난처하고 곤경에 빠질 때도 있지만,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행운이 찾아올 때도 있다. 18년 전쯤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서 쓸 만한 물건을 찾아보고 있을 때였다. 서점 한 귀퉁이에 휴지조각처럼 구겨진 채로 나뒹구는 책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이 휴지조각 같은 게 뭐요”라고 묻자, 주인장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직감적으로 그 휴지뭉치가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종이에서 풍겨나오는 냄새도 그렇고 서체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주인장에게 “아무것도 아니면 그냥 주소”했더니 그는 “그냥은 안 되고 30만원 주고 가져가시오”라고 대답했다.

    주인의 맘이 바뀔까봐 서둘러 값을 치르고 집에 와서 알아보니, 과연 예상대로 보통 책이 아니었다. 큰 돈을 주어도 구하기도 힘든, 고려시대 불경인 ‘자비도량 참법’이었던 것이다. 복권에 당첨된들 이런 기분일까. 무더운 날씨에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를 맞은 기분이었다. 휴지통에서 건져낸 이 보물을 들고 흥분에 겨워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기도 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골동품이나 고서 분야에 ‘나카마’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다름 아닌 브로커다. 이들 중에는 고서에 대한 식견이 학자 뺨칠 정도로 두터운 사람도 있지만 그야말로 잔머리만 굴리는 사람도 있다.

    어느 날 한 고서 나카마가 찾아와 ‘고려본’이라며 고서 한 권을 건넸다. 그 책을 받는 순간 진짜 고려본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흥분하는 눈치를 보이면 나카마가 부르는 대로 값을 쳐줘야 될 것 같아, 짐짓 태연한 척하면서 “고려본이면 다른 데 나가서 팔아라” 하며 그냥 책을 던져버렸다. 고서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나카마였다면 제 값 톡톡히 치르고 샀을 텐데, 그는 고서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 고려본을 살 의사가 없어 보이자 그는 나머지 책이라도 팔 생각에 “그럼 그 책은 그냥 덤으로 줄 테니 나머지 책들만 좀 사라”고 제안했다. 사업하면서, 또는 고서를 수집하면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게 이런 때다. 바로 이런 기분 때문에 고서 수집에 점점 빠져드는 게 아닐까.

    영욕의 역사 담긴 고서들

    지난 28년 동안 내가 수집한 고서는 총 10만여점이 넘는다. 계미자, 경자자 등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들과 ‘진달래꽃’ ‘님의 침묵’ 초판본 등 옛 문학서, 때묻은 지도와 사진 등 온갖 자료들이 내 서가에 가득하다.

    대마도가 우리 땅으로 표기된 ‘천하총도’, 금속활자로 인쇄한 ‘동래선생 교정북사상절’(1403), ‘명심보감’ 국내 초간본(1454),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이라는 ‘고사촬요’(1568), 일본에서 조선통신사의 모습을 목판화로 만든 ‘조선인대 행렬기대전’(1763), 단재 신채호의 ‘유년필독’(1907), 등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고서들이 수없이 많다.

    한편 한국이 중국령으로 표기된 프랑스의 고지도, 우리나라를 ‘작은 중화’라고 표현한 ‘소화시평’, 이완용이 쓴 ‘천자문’, 1909년 일본 제일은행이 펴낸 ‘한국화폐정리보고서’, 이광수가 1944년 발표한 단편소설 ‘대동아’, 조선총독부 건물 사진 등 한국인으로서는 수치스러운 자료들도 있는데, 이것들을 수집한 이유는 부끄러운 역사도 잘 보존해 후세 교육에 활용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내가 수집한 것 중 가장 아끼는 것은 1985년에 발간된 스코틀랜드 책으로, 가로 세로 1mm에 ‘Old King Cole’이라는 제목의 12쪽짜리다. 흔히 좁쌀처럼 생겼다고 해서 쌀책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자장가 가사를 담은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책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나는 이 책을 1991년 영국의 한 중개상을 통해 구입했다.

    수십억 지출해 가족과 갈등 겪기도

    고서를 수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가족과의 마찰이었다. 고서 수집으로 수십억을 썼고 지금도 사재를 털어 책 박물관을 짓고 있으니 아내나 자식 입장에서는 정신나간 짓을 하는 것으로 보이고 또 자신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 같아 섭섭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책·책의 역사’를 집필할 때는 매일 새벽에 귀가하는 것은 물론 주말에도 꼬박 사무실에서 일했다. 무리한 행군으로 피곤을 느꼈던 나는 어느 날 자정 전 집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잠자고 있던 아내가 일어나 거실을 쿵쿵거리며 뛰어다니고 피아노를 마구 쳐대는 것이 아닌가. 남편이 집안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밤낮 책에 미쳐 사니 울화가 치밀어 그런 식으로 항의를 한 거였다. 물론 그런 아내의 심정을 이해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서 수집을 향한 나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하나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돈이었다. 고서는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여서 한 권에 몇억원 하는 것은 기본이고 몇십억원 하는 것도 종종 있다. 좀 유명한 고서다 싶으면 몇천만원이 훌쩍 넘는다.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늘 주머니 사정이 문제였다. IMF 외환위기 후 운영하는 출판사가 경영난을 겪었을 때도 부동산은 처분했지만 고서만은 팔지 않았다. 거의 모든 책에 일일이 파란색 포갑을 씌웠고 열을 받으면 책이 상할까봐 복사도 못하게 한다.

    나의 이런 유별난 고서 사랑이 어느덧 20년을 훌쩍 넘었다. 책과 인연을 맺고 출판업이라는 한 우물만 판 시간도 어느덧 50여년이 지났다. 오랜 세월 고서를 수집했지만, 아직까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초판본과 그레고리 성가집을 소장하고 있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무리를 하면 살 수도 있겠지만 ‘고서·책 박물관’ 설립 시점에서 이왕이면 한국 책의 역사를 대변할 수 있는 고서를 더 많이 구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수집가의 길은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다. 하지만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처럼 고서 수집은 내 인생을 상쾌하고 활기차게 만들어줬다. 고서 수집으로 가족들과 부딪쳐 외로울 때나 회사가 자금 사정에 쪼들릴 때마다 난 스피노자의 ‘내일 비록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을 되새긴다. 내 인생에서 고서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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