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본프레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선정 뒷이야기

위기에 강한 승부사, 한국판 ‘나이지리아 신화’ 쏜다

  • 글: 장원재 숭실대 교수·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j12@ssu.ac.kr

    입력2004-07-29 18: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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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추 영입에 실패한 대한축구협회가 ‘차선카드’로 내놓은 본프레레 감독. 나이지리아를 올림픽 우승 및 월드컵 16강으로 끌어올린 그는 최악의 여건에서 최선의 성적을 내온 감독이다. 본프레레 영입 뒷이야기와 화려하고도 비참했던 그의 감독 역정.
    본프레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선정 뒷이야기
    ‘김진국 기술위원장, 사의표명. 신임 조영증 위원장, 이틀 만에 전격사퇴 발표’. 부르르르르. 신문 기사를 보고 있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장 교수, 나 허정뭅니다. 거기 어디요?”

    “김포공항입니다. 제자들과 제주도로 졸업여행 가려고 탑승구에 줄서 있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협회로 오는 건 무리겠네. 알았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기술위원 좀 맡아주시오.”

    “전 경기인 출신도 아니고...”



    “이봐요 장 교수, 집에 불이 났다고 쳐요. 화재원인이 뭐냐, 피해액이 얼마냐를 따지는 건 나중 일이고, 일단은 불부터 끄고 봐야 하는 것 아니오? 한국 축구는 지금 위기일발이요.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대로 협회에서 만납시다. 시간이 없어요.”

    5월18일, 이회택 위원장 체제의 첫 기술위원회가 열렸다. 상견례를 겸해 점심을 함께 했는데, 비장한 분위기가 마치 출전전야의 독립군 작전회의를 연상케 했다. 정말 시간이 없었다. 쿠엘류 감독과 대한축구협회가 합의하에 계약을 종료한 시점은 4월19일.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한 달이 넘도록 선장을 구하지 못하고 표류했다.

    세계 축구시장의 중심은 서유럽이다. 이 지역의 시즌은 매년 8월 중하순에 시작하여 이듬해 5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것이 관례. 시즌의 명칭을 ‘98∼99시즌’ ‘03∼04시즌’ 식으로 표기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5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3주 동안이 이른바 하이시즌이다. 이 기간에 주요 선수와 감독의 이적 협상이 활발히 논의되고 계약이 이루어진다. 이 시기를 놓치면 협상의 효율성도 떨어지고, 모두 제 갈 길을 찾아간 뒤끝이므로 능력 있는 감독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

    따라서 대한축구협회에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두 주 남짓. 서둘러 감독 선정 원칙을 정해야 했다. 월드컵 16강 이상 진출 실적이 있는가, 문화적응력이나 선수장악력은 어떤가, 언어 구사력을 포함,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는가….

    ‘밀실행정’에서 ‘투명행정’으로

    대한축구협회의 국가대표 감독 선임기준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문제는 선임 과정이었다. 감독 선임이 비밀리에 이뤄진 탓에 결과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분명치 않고 여러 부작용이 생길 여지가 많았던 것이다.

    이것이 쿠엘류 하차 후에 터져나온 언론의 지적사항이었다. 그렇다면 공개선임으로 가자. 다수의 지혜를 모아 최고의 선택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오갔다. 감독 공개선임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으나 위기상황에서 관례만 고집할 수는 없는 법. 기술위원회는 1차 후보 10명을 선정하고 다섯 시간의 토의를 거쳐 4명의 최종 후보를 발표하기로 했다.

    메추(2002년 세네갈 감독, 8강), 스콜라리(2002년 브라질 감독, 현 포르투갈 감독), 멕카시(2002년 아일랜드 감독, 16강), 귀네슈(2002년 터키 감독, 4강)로 접촉 대상을 압축 선정하자 언론에서는 ‘한국 축구 행정이 진일보했음을 보여준 사례’라며 ‘밀실행정에서 투명행정’으로 나아가는 몸짓을 보여줬다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이회택 위원장, 허정무 부위원장, 그리고 필자 3인은 5월21일 오후 8시30분 UAE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유럽 출장중이던 가삼현 국제부장 등 축구협회 지원팀은 현지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처음 접촉한 사람은 메추 감독. 22일 오후 5시15분이 ‘작전시간’이었다. 작전은 서로 극도의 보안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메추의 현직은 UAE리그 소속 알 아인팀의 감독. 알 아인은 당시 UAE리그 선두로 24일 최종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상위 두 팀의 승점이 같을 경우 골 득실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UAE리그의 로컬 룰. 24일 경기에서 알 아인과 2위팀이 모두 승리하면 28일 우승팀 결정전을 치르는 것이 경기 일정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 아인의 라이벌팀은 최종 경기에서 패배해 24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알 아인 구단의 우승이 확정되었다.

    약속 시간과 장소는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우리 쪽에서 결정했다. 알 아인의 경기 일정상 무리한 요구를 상대가 들어준 셈이니 우리 쪽에서도 예의를 갖춰야 했다. 별도의 방을 예약하고, 동선이 드러나지 않도록 기술위원 일행은 사람이 각각 다른 통로를 이용해 현장에 집결했다.

    이윽고 장장 네 시간의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축구철학, 전술특징, 훈련방법, 한국 축구에 대한 이해도, 향후 목표 등에 대한 광범위한 대화가 홍수처럼 오고 갔다. 기술위원회는 메추만이 아니고, 네 명의 감독 후보 모두와 각각 몇 시간에 걸쳐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귀국 후 대화록을 포함한 보고서를 작성, 대한축구협회에 제출하였으니 때가 되면 이들 자료가 공개될 수도 있을 터다.

    말이 난 김에 기술위원회 얘기를 잠깐 하고 가자. 기술위원회는 대표팀, 올림픽팀, 청소년팀 등 각급 대표팀의 감독 선임 및 선수 선발,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한 장기 계획 등을 연구하고 입안하는 기구다. 실로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그러나 위원장을 포함한 11명의 기술위원 자리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그들이 받는 사례라고는 회의 참석비 5만원이 전부다. 몇 시간 난상회의를 하는 동안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일을 하면 얼마든지 더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사람들이 사명감만으로 수행하는 직책이란 뜻이다.

    물론 경기장 출입증을 발급받는 등 여러 가지 예우를 받기는 한다. 그러나 필자를 제외한 다른 기술위원들은 굳이 이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의 예우는 다른 경로를 통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분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메추 사전 내정설 사실 아니다

    기술위원회에서 논의되는 사안은 필자가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수준이 높은 편이다. 예를 들어 특정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을 분석하는 경우 피벗 턴(공을 잡은 뒤 한쪽 다리를 회전축으로 삼아 좌우로 도는 기술)의 방향이 오른쪽 일변도라든가, 왼발과 오른발의 사용빈도가 슈팅과 패스에서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인다든가 하는 세세한 문제까지 토의한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내용을 비축구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능력이 다소 떨어졌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문제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같은 대학생이라도 문학도와 자연과학도가 쓰는 용어가 얼마나 다른가. 통역은 외국어 사용자 사이에만 필요한게 아니다. 이과생과 문과생 사이의 이해소통을 돕기 위해서도 통역이 필요하다는 농담이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기술위원회의 업무처리 능력은 평균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한다. 전임 기술위원 모두를 포함해서 말이다.

    메추와의 면담을 끝내고 기술위원회 대표팀 감독 면접단은 새벽 비행기로 이동, 파리를 거쳐 리스본에 착륙했다. 24일 오후 6시 스콜라리 감독 면담. 25일에는 비행기 편으로 런던으로 이동, 27일 오후 귀네슈 감독을 면접했다. 멕카시 감독은 밝히기 어려운 사정 때문에 애초 정한 약속 시간과 장소를 몇 번씩 바꾼 끝에 27일 저녁에서야 시간을 냈다.

    면접단이 귀국한 시점은 5월28일 오후 3시30분(한국시간). 인천공항에서 간단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술위원마다 휴대전화로 취재요청이 폭주하는 가운데 5월30일 최종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토론과 투표를 통해 메추 감독을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여기서 항간의 오해를 짚고 넘어가자. 기술위원회가 출국 전 이미 메추 감독을 선정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모 스포츠신문이 계약서 사본을 사전선정의 증거로 제시했는데, 그러한 서류가 존재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절대시간이 부족했기에, 대한축구협회는 급료 총액 항목만 비워둔 채로 접촉 대상자 네 명의 계약서를 만들었다. 물론 어떤 계약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서류부터 들이미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정을 설명했을 때 네 명의 후보 모두 “한국 축구 상황을 이해한다. 동업자로서 얼마든지 양해할 수 있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며 오히려 우리를 위로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지면을 빌려 네 분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바로 언론의 속보 경쟁이다. 한 신문에서 ‘메추 유력’ 제하의 기사를 내면 다른 신문은 ‘메추 확실’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급기야 ‘메추 확정’을 거쳐 계약기간, 연봉 등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까지 보도되었다. 그러자 메추 측이 거세게 항의했다. 6월18일을 전후해 하루 30여통씩 걸려오던 국제전화가 21일을 기점으로 하루 100여통으로 폭주한 탓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가 됐다. 이 와중에 한국 언론의 취재 열기는 알 아인구단, UAE 현지 언론 등 전방위로 확산되었다.

    23일에는 모 방송국 기자가 이동카메라를 들고 알 아인 구단을 방문하자 구단 관계자가 “만약 한국이 내일 월드컵 결승을 치른다고 하자. 그런데 외국 기자가 들이닥쳐서 ‘월드컵 끝나고 너희 감독 어디로 간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으면 기분이 좋겠는가”며 역정을 내는 모습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알 아인 구단의 경고 메시지

    언론의 열성적인 취재가 축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또 다른 표현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이러한 열정이 한국 축구 발전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임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일견 지나치다 싶은 속보 경쟁도 얼마든지 이해한다.

    스포츠의 속성은 정당한 과정을 통해 승패를 다투는 것이다. 100m 달리기 경주는 0.01초차로 승자가 가려지기도 한다. 0.01초의 차이가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반문한다면 그는 스포츠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얼마나 심도 있는 기사를 쓰는가와 더불어 얼마나 빨리 보도할 수 있는가, 말하자면 ‘특종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기자들의 취재 열기는 불꽃 같은 직업정신의 표출이라 할 수 있으리라.

    본프레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선정 뒷이야기

    바레인과의 첫 평가전을 하루 앞둔 7월9일 광주 월드컵경기장. 본프레레 감독이 스트라이커 김은중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의 취재관행과 국제관행 사이에는 분명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고 그것이 문제가 됐다. 알 아인 구단의 일정을 고려하지 않은 수백 통의 전화문의, 심지어는 우승 축하연 자리에까지 메추 감독의 거취를 둘러싼 전화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마침내 알 아인 구단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메추와 대한축구협회의 비밀회동 전말이 한국 언론을 통해, 그리고 이를 받아 보도한 외신에 의해 세세하게 공개된 상태였다. 이를 근거로 알 아인 구단은 메추 감독에게 “가고 싶으면 이적료 100만달러를 물어라”고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여기서 알 아인 구단과 메추의 계약 내용을 살펴보자. 일단 계약 기간은 2006년 6월까지다. 단, 어느 나라든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가는 경우 별도의 이적료를 물지 않고 계약이 자동 종료된다. 프로팀 감독으로 가는 경우는 이적 대상이 중동지역 구단이냐 유럽 구단이냐에 따라 이적료와 위약금의 적용범위가 달라진다. 메추가 중동의 클럽팀으로 갈 경우 각종 대회에서 알 아인과 칼을 맞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 아인은 이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해놓은 것이다. 알 아인이 메추에게 요구했다는 100만달러의 이적료는, 그러므로 이적료가 아니라 신의성실 원칙에 입각해 계약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데 대한 일종의 벌과금이다. 만약 메추와 한국 축구협회 기술위원단 사이의 회동이 공표되지 않았다면, 혹은 ‘모두들 그렇다고 알고는 있으나 아무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지 않는’ 상황이 이어졌다면 메추는 이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얼마든지 부드럽게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오해를 해명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인터넷에 떠도는 말 가운데 ‘국가대표팀 감독은 명예요, 클럽팀 감독은 돈이 주목적’이라는 명제가 있다. 혹자는 메추가 돈을 너무 밝힌 것 아니냐고 그를 비난하고, 혹자는 대한축구협회가 메추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정면에서 거스른 전근대적 발상이 아니냐며 기술위원들에게 비난의 칼끝을 겨누기도 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대한축구협회는 메추에게 이런 말을 건넨 사실이 없다. 현대사회에서 어떤 인물의 가치나 능력을 계량하는 기본단위는 돈이다. 대한축구협회는 전문가의 전문성을 그에 합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이용한다는 원칙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선 적이 없다.

    다시 비공개로

    축구계는 능력과 노력에 대한 보상과 상찬, 무능과 나태에 대한 징벌과 제재가 뚜렷하게 구현되는 세계다. 모든 것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적과 결과와 숫자로 드러나는 세계. 지구상에서 축구계만큼 완전경쟁 구도가 실현된 분야가 달리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대표팀은 명예요 클럽팀은 돈’이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단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있다. 만약 메추가 중동팀과의 계약을 연장한다면, 감독으로서 그의 경력은 평생을 두고 중동을 순회하는 고액 연봉자에 그칠 공산이 크다. 그렇지만 약간의 수입 손실을 감수하고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한다면 2006년 월드컵의 성적에 따라 감독으로서의 가치가 단번에 몇 곱절 상승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현재의 소득과 미래의 가치를 높이는 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되 기회비용을 대한축구협회가 부담한다는 것이 계약내용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마지막까지 메추 감독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연봉 200만달러를 제시한 카타르의 클럽과 접촉한 것은, 그것도 공개적으로 접촉한 것은 나름의 계산에 따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메추 감독은 대한축구협회와 자신 사이에 오간 논의는 하나의 참고사항일 뿐이라는 점을 대외만방에, 적어도 알 아인 구단에 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쉽지만, 메추는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기에 대한축구협회에 대해 이행할 어떠한 약속도 없었다. 그리고 계약직전까지 계약조건을 두고 협상을 계속하는 일은 국제 스포츠계 관행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한축구협회는 6월7일 메추와의 협상종결을 선언했다. 이제는 다른 후보를 선정해야 한다. 정말로,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2002월드컵 이후 한국은 유럽에 여러 명의 선수를 진출시키는 등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한국 축구는 국제관례를 거스를 수 없는 지점까지 전진해버렸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친선경기가 열리는 경우 유럽이나 남미 국가는 경기 시작 72시간 전에 대표팀을 소집한다. 선수에게 연봉을 지급하는 소속 구단의 편의와 권리를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다. 국가대표팀 간 경기가 세계 축구 흥행에서 차지하는 비중, 언론의 관심도, 국제경기가 선수의 가치를 높이는 매우 효율적인 수단이며 이를 통해 발생하는 이익의 최대 수혜자는 해당 선수의 소속 구단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윈윈 게임을 수행하는 것이다.

    지난 월드컵 때처럼 무려 일년 반을 합숙하다시피하며 국가대표팀을 운영하는 일은 이제 꿈도 꿀 수 없다. 그렇다면 국가대표팀이 합숙을 하며 훈련하는 경우는 없는가. 있다. 월드컵이나 대륙선수권 대회(유로 2004, 코파 아메리카나, 북중미 골든컵, 아시안컵, 아프리칸 네이션스컵, 오세아니아 선수권대회 등) 때는 대략 3주 정도의 합숙훈련 기회가 마련된다.

    4년마다 열리는 아시안컵의 개막일은 7월17일. 우리나라는 국내리그 일정 등을 감안하여 6월29일부터 합숙훈련을하기로 했으므로 그 전에 신임 감독을 선임해야 했다. 대표급 선수들을 모아 훈련할 수 있는 시간은 대단히 소중한 것이므로 하루라도 헛되이 보낼 수 없었다. 이 날을 기준으로 역산을 하면 적어도 24일을 전후해서는 신임감독이 한국 땅을 밟아야 한다.

    다시 기술위원회가 열리고 당초 선정했던 1차 후보군 바깥에서 후보자를 고르기로 했다. 국제적으로 일이 너무 커져 1차 후보군 중에서 감독을 선임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술위원회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에는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한다고 선언했다. 모든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협상 전 과정을 비밀에 부쳤다. 그런 과정을 거쳐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이 한국 국가대표팀을 이끌어갈 새 선장으로 결정된 것이다.

    쿠엘류의 실패로부터 배우다

    본프레레는 히딩크 감독 영입 당시 히딩크, 에밀 자케 감독에 이은 접촉 대상 3순위였다. 플레멘스 벨스터호프 감독을 보좌하다가 나이지리아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활약하며 1994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준우승, 월드컵 8강의 전과를 올린 경력을 갖고 있다. 1995년부터는 나이지리아 대표팀 감독을 맡아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금메달, 1998년엔 월드컵 16강 고지를 정복했다.

    징크스란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나 거듭해서 일어나고 그러면서도 좀처럼 깨뜨릴 수 없는 현상의 다른 이름이다. 세계 축구계에는 ‘월드컵 4강 징크스’라는 것이 있다. 4강 중의 한 자리는 늘 깜짝 놀랄 만한 팀이 차지하는데, 이런 신데렐라 팀은 다음 대회에서 변변한 성적을 내지 못하기 일쑤이고 심지어 지역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962년의 칠레나 1966년의 포르투갈까지 거론하진 않더라도 1994년의 불가리아, 1998년의 크로아티아가 다음 대회에서 어떤 성적을 거두었는지를 기억해보라. 본프레레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놀라운 성적을 거둔 감독이다.

    다음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축구가 충분한 시간을 마련할 수 없다면, 그리고 한국축구의 현 상황이 비상시국이라면 본프레레만한 적임자도 없는 셈이다. 성공을 벤치마킹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에서 교훈을 끌어내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고통스럽다.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일이 틀어졌는지를 조목조목 따져 때로는 자신에 대해서도 여지없이 수술칼을 들이대야 하기 때문이다. 본프레레 선임은 쿠엘류의 실패로부터 이끌어낸 선택이다.

    2002년 월드컵 직후 부임한 쿠엘류는 중도퇴진하기까지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남겼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쿠엘류는 유로 2000에서 포르투갈을 이끌고 4강 진출의 놀라운 업적을 이룬 감독이다. 준결승 경기인 대(對)프랑스전에서 연장경기 종료 직전 페널티킥을 허용하며 1-2로 물러섰지만, 당시의 경기 내용은 어느 팀이 이겼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막상막하 일진일퇴의 대접전이었다. 말하자면, 쿠엘류는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을 세계 챔피언 수준으로 조련한 명감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유럽과 한국의 조건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바로 이 지점이 유럽 출신 축구인들이 한국에 와서 부딪히는 문화적 장벽이다. 유럽의 경우 1부리그 산하에 5부, 6부에 이르는 하위리그가 조직되어 있고, 매 리그는 연말 성적을 토대로 상위팀과 하위팀이 자리를 바꾼다. 두터운 선수층과 완전경쟁 구도, 이익실현을 통한 축구문화와 축구산업이 사회제도로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기적을 일궈낸 본프레레

    이러한 구도는 일종의 국제표준이다. 한국이 국제축구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나 그간에 거둔 성적을 감안하면, 외국인 축구 지도자들은 한국축구의 운영체계가 이러한 표준궤도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렵다.

    쿠엘류는 스타급 선수들을 대상으로 팀을 만드는 데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감독이다. 말하자면 이미 완성된 부품을 선별하여 조립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그만한 인물을 다시 찾기 어렵다는 뜻이다.

    문제는 한국축구의 여건은 그와 다르다는 데 있다. 한국에서는 감독 자신이 때때로 부품을 직접 깎아야 한다. 감독의 기능과 역할에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감독의 문화적 연착륙을 도와주는 인력이 없었고 기타 여러 측면에서 협회의 지원이 히딩크 감독 때와는 다소 차이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쿠엘류 감독의 실패는 이러한 모든 요소가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본프레레가 처했던 비정상적인 상황이란 어떤 것일까. 예를 들어 아프리카 대표팀이 잉글랜드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갖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갔다고 치자. 경기 전날,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호텔 방문이 모두 잠겨 있다면? 차일피일 중간정산을 미루며 결제를 하지 않던 팀 관계자가 현금을 몽땅 들고 사라졌는데 선수들은 땀에 전 채로 호텔 앞에 주차해놓은 버스에 앉아있다고 하자. 감독은 선수들에게 일단 야외수영장으로 가서 샤워를 하라고 지시하고 국제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버럭버럭 악을 쓰며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올림픽 본선. 아예 8강 진출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 그랬는지 단순한 사무착오였는지 선수촌에 숙소를 마련하지 못했다면? 부랴부랴 선수촌 근처의 모텔을 수배하고 인근 중국집 주인에게 사정해 숙식을 해결한다. 그러다가 4강에 오르자 고위공직자들의 예고 없는 방문이 줄을 잇는 가운데 훈련 스케줄을 그 사람들에 맞춰 재조정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다고 치자. 방문인사들이 나름대로 작성한 출전선수 명단을 들이밀며 ‘이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라’고 협박한다면? 6개월 임금 체불은 수시로 발생하는 일이어서 논할 가치도 없다고 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면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 아닌가.

    1998년 월드컵 본선에서 나이지리아는 스페인을 3-2, 불가리아를 1-0으로 물리치고 조1위로 16강에 진출한다. 16강전 덴마크와의 경기에서 4-1로 참패하며 진군을 멈췄지만 내용을 따지자면 이건 대도박의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이다. 16강 이후는 토너먼트다. 1점 차로 지건 10점 차로 지건 탈락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당시 나이지리아는 초반 12분 사이에 두 골을 잃었다.

    ‘도 아니면 모’ 식의 총력전을 펼치는 것이 그들이 고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무리가 겹친 탓에 체력이 소진돼 후반 중반 이후 처절하게 무너진 것이 사태의 진실이다. 조별 예선에서 본프레레 감독의 나이지리아가 보여준 경기력은 ‘8강권 이상’이라는 것이 세계 축구계의 평가였다.

    그렇다면 본프레레 감독이 2000년 이후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본프레레 감독 부임 이후 벌어진 이른바 3류 감독 논쟁이나 그가 카타르, UAE, 나이지리아에서 잇따라 해고되었다는 사실을 검증해 보자.

    3류 감독론이야 개인의 주관적 평가이니 논외로 하더라도 본프레레 감독이 가는 곳마다 연이어 문제를 일으켰다는 얘기는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정보와 다른 이면의 진실이 있는 법.

    1997년 카타르 감독으로 재직할 당시 본프레레의 해임 사유는 98월드컵 예선에서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에 연패하고 이란과의 친선경기에서도 대패했다는 것. 그러나 당시 카타르팀 전력으로는 오토 대제나 자갈로 감독이 팀을 맡았어도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을 이길 수는 없었으리라는 게 세계 축구계의 평가다.

    1999년 11월 나이지리아 감독으로 재부임했다가 2001년 4월21일 시에라리온에 0-1로 패하며 월드컵 예선 도중에 해고당한 일도 화제였다. 당시 본프레레는 유럽 출신 선수를 한 명도 쓰지 못했다. 수족이 잘린 채 경기에 나섰다는 뜻이다. 당시 사정을 말해주는 기막힌 일화가 있으나 미처 사실 확인을 하지 못했기에 따로 적지 않는다.

    혹자는 말한다. 98월드컵을 전후해 나이지리아에서 그렇게 수모를 당했다면서 왜 1999년에 다시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탔는가. 모든 얘기가 본프레레 감독이 지어낸 변명이 아닌가.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걸 필자도 인정한다.

    그러나 본프레레는 본전 생각이 났을 것이다. 나이지리아 선수들은 그와 1990년부터 한솥밥을 먹은 사이다. 그때까지 투자한 세월이 아깝기도 했을 것이고 자신이 구상한 축구철학이 완성단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허정무 코치에게 협박 반 애원 반

    1998년 UAE리그로 진출, 알 와다 클럽을 우승으로 이끌고 그 인연으로 2002년 UAE대표팀을 맡았다가 이내 지휘봉을 놓은 일도 구설에 올랐다. 그 일만을 놓고 말하자면 본프레레는 정치적 파워게임의 희생자다.

    두 사람의 실력자 사이에 외국선수를 귀화시켜서라도 단기간에 실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성적지상주의’와 성적은 나쁘더라도 국내 출신 선수들만으로 팀을 구성해야 한다는 ‘순혈주의’가 평행선을 그으며 사사건건 부딪친다고 하자. 대표팀을 뽑을 때마다 감독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두 종류의 명단이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해 축구협회로 날아든다면? 담판을 짓되 뜻을 관철할 수 없으면 짐을 챙겨 깨끗이 물러나는 것이 정도(正道)가 아닐까.

    정도? 필자는 허정무 코치 선임을 두고 시비가 일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선임 당시 허정무 코치의 직책이 기술위 부위원장이었으므로 ‘자기들 가운데서 누군가를 뽑았다’는 비난은 나름대로 정당한 근거를 지닌다. 그러나 기술위원은 모두 명예를 중요시한다. 만약 허정무 수석코치 선임의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하자. 그때 쏟아질 비난이나 질책은 여타의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혹독할 것이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선임을 강행한 것은 허정무 코치가 최선의 대안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정무 코치 개인의 입장에선 이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의였다. 우선 그는 2000~02년 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대표팀 코치를 맡는다면 보는 각도에 따라서 일종의 강등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가 관장하는 용인 축구센터의 운영도 본궤도에 올랐고 무엇보다도 국내외 몇몇 프로구단에서 감독직을 제의하고 있는 상태였다. 수입과 소득만을 생각한다면 허정무 코치는 몇 억원의 현찰을 발로 차버린 것이다. 유로 2004 관전 도중 8강전을 앞두고 일정을 변경해 급히 귀국해야 했던 일은 거론하지 말자. 적어도 그가 코치 선임을 위해 자가발전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싫다는 사람, 하기 어렵다는 사람을 붙잡고 마지막까지 마음을 돌리라고 협박 반 애원 반으로 설득작전을 펼친 것은 기술위원회다. 이것이 대한축구협회의 원칙이다.

    대표팀 감독은 꼭 외국인이어야 하는가, 코치 선임의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필자는 이렇게 답한다. 외국인이냐 내국인이냐는 어떤 경우에도 유효한 선택기준이 아니다. 지구인 가운데 그 일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가 누구인가가 유일하고 분명한 선택기준이다.

    “내가 인정할 만한 경기가 아니다”

    7월10일 광주에서 본프레레 감독은 바레인을 맞아 한국대표팀 감독 데뷔전을 치렀고 이동국 최진철의 연속골로 2-0의 승리를 거두었다. “감독인 내가 스스로 인정할 만한 경기를 하지 못했다. 이겼지만 만족할 수 없다.” 경기 직후 본프레레는 굳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버스에 오르기 전 잠깐 면담한 허정무 코치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기고도 즐거워하지 않는 건 그들이 그만큼 정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정직함에 기대를 건다.

    전언에 의하면 대표팀은 경기 직전까지 고강도 체력훈련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필자는 선수들의 몸이 다소 무거워 보인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지난 6월28일 필자는 본프레레 감독과 저녁을 함께했다. 디저트를 먹으면서 당신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슬쩍 물었더니 그는 씨익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월드컵 우승은 조금 힘들지 않겠어. 그건 천운이 따라줘야 하거든.” 이거 진담인가.



    “이봐요 장 교수, 어떤 대회든 출전한 감독은 우승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거요. 그게 진정한 프로의 세계거든. 물론 나름대로 계산을 하지만. 예컨대 한국 정도의 시설과 지원이라면 내 야망을 실현할 재료로는 충분하겠구나 하는. 자신이 없었으면 아예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이 남자, 정말 큰일을 낼 만한 사람 아닌가.

    2006월드컵 결승전이 열릴 베를린 올림픽메인스타디움. 마라토너 손기정과 남승룡의 영광이 우리를 부른다. 태극기 한 폭을 온몸에 휘감고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열창할 수 있다면 거기가 세상의 끝이라 해도 아무런 여한이 없으리라. 그리하여 저 먼 미래를 향해, 본프레레호여 힘차게 발진하라!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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