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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지리산 빨치산 할머니 고계연

“내가 살아남아 1m짜리 농어 잡을 줄 빨치산 동지들이 짐작이나 했겠나”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지리산 빨치산 할머니 고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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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빨치산이었다. 3년을 지리산에서 살다 군경합동 토벌대에 체포됐다.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었다. 산에 간 건 아버지와 오빠를 찾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선택이 아니었다.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갔다.

고 선생의 이야기를 암만 들어봐도 인정 많고, 의협심 강하고, 오기 있고, 당차다는 것 말고 그에게서 사회주의자의 면모를 느낄 수 없었다. 아니 되레 부잣집 딸다운 부르주아 근성, 이를테면 일상용품에서의 고급 취향, 빼어난 심미적 감각, 고위 인사와의 교분, 사립학교 선호 등 민중적 삶과는 거리가 먼 인생관이 읽힐 뿐이다.

그런 그가 고집스럽게 전향을 거부하고 자수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한낱 우스개일 뿐인지도 모른다. 신념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존심에 의해 대세가 결정되는 일이 숱했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리석고 두려움 많고 한계에 갇힌 인간일 뿐이고 시간은 가차없이 흘러가면서 운명의 무늬를 만드니까.

고계연은 삼천포 ‘고기룡 백화점’ 막내딸로 태어났다. 요즘 같은 백화점은 아닐지라도 그 지역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고급만물상이었다. 부친은 백화점 말고도 제재소와 국정교과서 보급사업, 그리고 일본과의 무역까지 손을 뻗친, 경남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다.

굶주리던 시대였지만 그의 집안은 모든 게 풍족했다. 아버지는 ‘딸이 더 교육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분이어서 고계연은 여섯 살에 삼천포유치원에 들어갔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부경남의 최고 명문이었던 진주공립여중(현 진주여중고)에 진학했다.



오빠가 셋, 언니 하나, 남동생 하나. 형제 많고 살림 넉넉하고 아버지가 트인 분이라 다복하기 짝이 없는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며느리에게 배구공을 선물할 만큼 ‘신식 인생관’을 가진 분이었고 집안 여자들이 서울에서 옷을 주문해 입는 사치도 허락하였다.

고계연은 햇살 쏟아지는 마당에서 오빠와 올케들이 까르륵 웃으며 배구하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아버지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고 집안에 늘 화가 손님을 청해 그림을 그리게 했다.

“재주 있는 화가들이 한번 오면 일년 이상 우리집에서 묵곤 했네요. 그림 그리는 데 몇 달, 풀을 쒀서 삭히는 데 몇 달, 삭힌 풀로 배접하는 데 또 몇 달…. 종종 그분들을 위해 주연을 베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흥에 겨워 화가들이 기생 치마폭에 그림을 그려주는 것도 여러 번 봤네요.”

삼천포는 풍광이 아름답고 바다밭이 기름진 고장이었다. 날씨가 따뜻해 겨울에도 춥지 않았고 온화한 날씨만큼이나 사람들의 인심도 좋았다. 쾌활한 소녀 고계연은 곧잘 오빠들을 따라 바닷가로 낚시하러 가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낚시란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기던 그 시절에 그는 오빠들 곁에 앉아 볼락과 꽁치를 마음껏 낚아 올렸다. 더 어린 나이에는 복어를 잡아 배를 펑펑 터뜨리며 놀았다. 행복하고 찬란했다. 근심도 부족함도 전혀 없었다.

양단이불 덮고 자는 ‘소공녀’

진주여고 입학하던 해에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이 뭔지도 몰랐다. 같이 놀던 일본인 친구가 이사가게 된 것이 서러워 붙잡고 엉엉 울었다. 진주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집에서는 수시로 물 좋은 생선이며 떡, 과일을 기숙사로 보내줬다. 덕분에 고계연 학생은 걸레질 한번 하지 않는 특권을 누렸다. 다른 학생들이 후줄근한 무명이불을 덮을 때 그는 집에서 보내온 화사한 양단이불을 덮었다. 가히 ‘소공녀’의 호사를 당연한 듯 누렸다.

“내 생전에 호강할 것을 그때 다 해봤지요. 산에 있을 때도 동지가 죽으면 나는 호사를 누릴 만큼 누려서 죽어도 억울할 게 없지만, 이 사람은 평생 고생만 하다 죽는구나 싶어 더 가슴이 무너졌어요.”

학교 앞 등하교 길에는 중신애비들이 죽 늘어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신애비들은 그렇게 서 있다가 눈길을 끄는 여학생에게 다가가 뉘집 딸인지 묻곤 했다. 그렇게 인물을 보고 집안을 확인한 다음 혼담을 넣으려는 현장조사였던 셈이다.

그는 붓글씨를 잘 쓰고 수를 잘 놓는 학생이었다. 수줍어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친구들은 그에게 ‘오만해서 그렇다’고들 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니 붙임성 없는 건 사실이었다. 중학 5학년 때 결핵에 걸려 요양차 삼천포 집으로 왔다. 그것이 학창시절, 아니 빛나는 청년기의 마지막일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둘째오빠 고경전은 부산상고를 다녔고 야구부 활동을 했어요. 활달하고 유머감각이 넘치는 데다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죠. 얼굴이 아주 고운 학교 선생님과 연애결혼을 했지요. 둘째오빠는 인물이 헌칠하고 언변이 좋아 사람들 마음을 금방 사로잡았어요. 오빠 연설을 들으려고 운동장에 사람들이 모이면 그 많은 이들을 마음대로 웃기고 울리는 재주가 있었죠. 한번은 삼천포 극장에서 최승희무용단이 공연을 했는데, 둘째오빠가 다리를 놓아 진주여고 시절 무용을 했던 올케언니가 찬조출연을 하기도 했고….

그런 둘째오빠가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네요…. 일본 명치대 출신 사회주의자였던 장인의 영향을 받아 그리 된 거제요. 따지고 보면 그 오빠로 인해 우리집이 풍비박산 난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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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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