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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기⑨|싸리재에서 고치령까지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고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고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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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고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높이가 25m에 달하는 희방폭포.

희방사 코스의 명물은 바로 희방폭포. 높이가 무려 28m에 달한다. 물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 폭포수 앞에 이르자 누군가 먼저 와서 물줄기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10년 만에 소백산을 다시 찾았다며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고 있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진 산길에서 랜턴을 켤까 말까 망설이다가 배낭에 집어넣었다. 필자와 나란히 걷던 그가 풀숲의 반딧불을 보고 탄성을 질렀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소백산을 영롱하게 물들였다는 반딧불. 그러나 지금 우리는 겨우 반딧불 하나를 보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지는 것이 어디 반딧불뿐일까마는, 우리는 너무 빨리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27일 새벽, 일찌감치 눈을 떴다. 배낭을 꾸려 밖으로 나오자 빗방울이 흩날렸다. 오늘의 목적지인 고치령까지는 빨리 걸어도 10시간 이상 걸린다. 비가 내린다면 2시간 남짓 지체될 수도 있다. 필자는 다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희방폭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바라보는 폭포는 또 다른 기품이 있었다. 저녁의 폭포가 소리에 녹아든 실루엣이라면 아침의 폭포는 소리를 깊숙이 빨아들인 한 폭의 산수화다. 소백산 깊은 골짜기의 물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마지막으로 긴 숨을 토해내는 것이니, 희방폭포는 소백산의 에너지가 결정적으로 폭발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희방사 대웅전 앞에서 잠시 예를 갖추고 본격적인 산행에 들어갔다. 희방사에서 깔딱고개로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라 몇 번이고 거친 숨을 토해내야 한다. 오죽했으면 깔딱고개라 했을까. 필자보다 100m 앞에서 걸어가는 중년부부의 발걸음이 꽤나 힘겨워 보인다. 자세히 보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깔딱고개에 이르러 그 부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소백산이 처음이라는 그들은 구름 낀 소백산의 풍광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에게 연화봉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코스를 추천했다.

일단 깔딱고개에 올라서면 연화봉까지는 무난하게 내칠 수 있다. 연화봉 정상에 도착했을 무렵 비는 거의 그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를 뿌리던 구름은 산허리쪽으로 밀려나면서 또 하나의 비경을 연출했다. 아침 일찍 연화봉에 오른 등산객들은 구름과 산의 어우러짐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했다. 구름의 이동이 어찌나 심하던지 소백산 천문대가 수초 간격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나곤 했다. 연화봉에서 제1연화봉(1394m)을 거쳐 비로봉(1439m)으로 가는 동안에도 구름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어느 순간 구름 위에 섰다가도 어느 순간 구름 아래로 가라앉는 신비로운 체험…. 만일 중국의 시성 이태백이 이 자리에 있다면, ‘산중문답(山中問答)’의 그 유명한 마지막 시구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을 읊지 않았을까 싶었다.

소백산 정상 비로봉 주변은 유럽의 초원지대를 보는 느낌이다. 특히 등산로 안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아고산 식생대가 이국적인 정취를 더해준다. 산수를 보는 눈에서 세계의 어느 민족에도 뒤지지 않았던 조상들이 이런 기이한 전경을 보고 침묵했을 리 없다. 비로봉 정상에는 조선시대의 문호 서거정이 남긴 시구가 새겨져 있다.



‘태백산에 이어진 소백산,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았네.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경기도 이천에서 왔다는 5명의 등산객은 비로봉 정상에서 막걸리를 잔에 따르고 있었다. 그 중 한사람은 소백산에 20번째 오른 날이라고 했다. 그들에게서 막걸리를 한잔 얻어 마시고 있는데, 이번엔 20대 중반의 여성이 비로봉으로 올라섰다. 그녀는 소백산만 100번쯤 올랐다고 했다. 이번엔 그녀가 막걸리를 받아 마셨다. 필자는 소백산 마니아들이 소백산을 주제로 나누는 대화를 잠시 엿들었다. 마니아는 역시 뭐가 달라도 달랐다. 필자가 구름에 반해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사이, 그들은 구름에 가려진 풍광을 더듬고 있었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묻힌 땅

비로봉에서 국망봉(1420m)으로 가는 동안 또 한 차례 비구름이 몰려왔으나 이번에도 엄포만 놓고 사라졌다. 구름 낀 하늘 사이로 햇볕이 비치고 이따금씩 비가 뿌리는 기이한 날씨였다.

국망봉은 소백산 봉우리 가운데 가장 사연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자, 그의 아들 마의태자는 이곳 국망봉에 올라 옛 도읍지인 경주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배순이라는 대장장이가 이곳에서 이퇴계와 선조대왕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국망봉에서 상월봉(1394m)을 지나는 길에 하늘이 갑작스레 어두워졌다. 이번에도 헛기운만 쓰겠거니 싶었으나 잇따른 천둥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곧바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장마전선이 전열을 가다듬고 북상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한번 퍼붓기 시작한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도 상월봉에서 마당치로 이어지는 코스는 표고차가 크지 않아 빗속에서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속도를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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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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