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삶을 지배하는 우연의 힘 ‘달의 궁전’

  • 글: 장석주/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입력2004-07-30 11: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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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지배하는 우연의 힘 ‘달의 궁전’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왜폴 오스터의 소설에 이끌렸을까? 그것은 명확치 않다. 현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뒤섞는 폴 오스터에 끌려 ‘고독의 발명’에서 최근작 ‘신탁의 밤’까지 독서 행로를 멈추지 못하면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우연의 힘에 전율하고, 이야기의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오스터가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내 핏속에 쉽게 용해된다. 그렇다고 내가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팀의 성적과 선수들의 시시콜콜한 일화들이 일상적 화제로 떠오르고 저 가장 깊은 곳에 숨은 미국적 정서의 핵심을 꿰뚫는 폴 오스터의 문장에 녹아든 유머를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삶을 지배하는 우연의 힘 ‘달의 궁전’
    ‘달의 궁전’은 잃어버린 아버지 찾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세상에는 사라진 아버지, 없는 아버지들도 드물지 않다. 폴 오스터 소설 속의 아버지들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온다. 죽은 아버지들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 아들에게 유산을 상속한다. ‘달의 궁전’의 아버지들이 그렇다. 토머스 에핑은 아들 솔로몬 바버에게 50년 동안이나 죽어서 사라진 아버지이고, 솔로몬도 이 소설의 중심화자인 마르코에게 아주 어렸을 때 죽은 아버지였다. 세 사람은 할아버지-아버지-아들이라는 혈연의 고리로 연결됐지만 서로 단절된 채, 아니 혈연의 고리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은 채 저마다 삶의 궤도를 돈다. 3대에 걸친 고립·유폐의 삶은 우연과 기구함이라는 외관을 갖고 있지만 그 이어짐은 혈연의 무의식적 호명에 따른 필연적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색의 인간 아버지란 존재

    ‘달의 궁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였지만, 어쩐지 이제부터는 미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싶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 다음,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이루어낸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에는 차츰차츰 무일푼으로 전락해 아파트마저 잃고 길바닥으로 나앉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대개 작가의 작품을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각각의 작품들 내면에는 서로 무의식적 의미망(意味網)의 연쇄를 갖고 있는 법이다.



    작가의 실명이 그대로 쓰이고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고독의 발명’에서 이미 아버지는 “가장 오래된 기억-아버지의 부재”라는 구절이 나온다. 아버지를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무색(無色) 인간”이라고 한 표현도 보이는데, 폴 오스터의 소설들에서 반복적으로 아버지가 나오는 걸 보면 아버지란 존재는 작가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원형적 심상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다시 ‘고독의 발명’에서 아버지를 보자. “그의 행동은 거의 완벽하게 예측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아버지가 하는 일은 모두가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정말 이런 사람이 있다니, 감정도 없고 타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이 세상 모든 아버지는 아들과 유전적·무의식적 연좌제로 묶여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 외모와 내면의 기질에서 거울과 같이 상호조응(相互照應)한다. 이 세상의 어떤 삶도 같은 것은 없다. 저마다의 삶에는 “다양하게 형식화된 질료와 매우 상이한 날짜, 속도들”(들뢰즈/가타리)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들은 아버지와 신기하게도 닮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버지에게 삼투(渗透)한다. 아버지 속에 있는 또 다른 작은 아버지가 바로 아들이다.

    폴 오스터는 영화대본인 ‘스모크’에서도 아버지에 관한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일화를 등장시킨다.

    “25년 전쯤 전에 한 젊은이가 혼자 알프스로 스키를 타러 갔어. 그런데 눈사태가 일어나서 눈이 그를 삼켜버렸고,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어. 그때 그의 아들은 어린 소년이었는데, 세월이 흘러서 그 아들은 어른이 됐고 역시 스키를 타게 됐어. 지난 겨울 어느 날, 그는 혼자서 스키를 타고 산 밑을 향해 반쯤 내려오고 있었지. 그러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큰 바위 옆에서 멈췄어. 막 치즈 샌드위치를 꺼내 먹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는 얼음에 묻힌 얼어붙은 시체를 발견했지. 바로 자기 발 밑에서 말이야. 그는 자세히 보려고 허리를 굽혔지. 그런데 갑자기 그는 거울을 보는 것 같았어.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단 말이야. 거기에는 자신이 있었어. 죽은 채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 다음,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던 마르코가 보았던 것은 무엇일까. 그게 바로 ‘달의 궁전’ 아니었을까. 마르코는 전락의 순간을 최대한도로 지연시키며 그 동안 빅터 삼촌이 유산으로 남긴 천 몇백 권의 장서를 남김없이 읽어치운다. 이 명민한 컬럼비아대학 출신의 젊은이는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보기로 작정한다. 그것은 일종의 제 운명 찾기, 혹은 정체성 찾기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가 착지한 현실의 막장은 공원을 떠돌며 쓰레기통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한데서 잠을 청하는 노숙자의 삶이다. 밑바닥까지 전락한 사람은 저 고원(高原)을 향하여 올라가야 한다.

    저마다 다른 성을 쓰고 저마다 다른 삶의 동선에서 움직이던 세 개의 떠돌이 별들, 토머스-솔로몬-마르코는 우연한 계기에 본디 궤도로 돌아온다. 실명한 괴팍한 노인 토머스의 간병인 겸 책 읽어주는 비서로 들어갔던 마르코는 산책 도중 주변의 사물들을 자세하게 묘사해보라는 토머스의 요구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야단을 맞으면서 사물의 가변성을 직시하는 지혜를 배운다.

    “소화전, 택시, 포장도로에서 피어오르는 김. 그런 것들은 내게 아주 익숙한 것이어서 나는 그것들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의 가변성, 즉 그것들이 빛의 강도와 세기에 따라 달라지는 방식과 그것들의 모습이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 말하자면 그 옆을 지나치는 사람이나 갑작스러운 돌풍, 이상한 반사 등에 의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었고 비록 벽을 구성하는 두 장의 벽돌이 아주 똑같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동일한 것일 수가 없었다.”

    달은 만월에서 초승달로, 다시 초승달에서 만월로 차고 기울기를 계속하는 것처럼 사람의 삶도 성공과 퇴락을 반복하며 유전한다. 우주의 모든 만물은 가변성과 유전의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50년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채 살던 장님 노인 토머스가 죽고 난 뒤 그의 유언에 따라 마르코가 찾은 솔로몬이 바로 제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과거-현재-미래라는 혹성들이 도는 동선(動線)은 미국의 사막과 도시들, 대륙 전체에 퍼져 있다. 그건 아주 극적이다. 연결고리가 끊어진 채 제멋대로 궤도를 순환하던 과거(할아버지)-현재(아버지)-미래(나)가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지며 본디의 질서와 궤도를 회복한다. 뛰어난 이야기꾼인 폴 오스터의 절묘한 서사 구축 솜씨가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의 문체는 플로베르처럼 정확하면서도 따뜻하다. 그의 문장들이 인간의 운명의 미세한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직관과 통찰, 영감과 암시들로 충전될 때 나는 그 매혹에 쉽게 감염된다.

    ‘달의 궁전’은 달에서 시작해서 달로 끝난다. 첫 문장에서 아폴로가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해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음을 암시한 소설은 마르코 포그가 돈과 자동차를 잃고 서쪽으로 향하다가 밤하늘의 노란 달과 만나는 것에서 끝난다. 달의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중국식당 이름도 ‘달의 궁전’이고 외삼촌 빅터의 밴드도 ‘문멘’이다. 달과 신대륙과 서부는 하나의 상징으로 묶인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 미래의 세계에 대한 상징이다. 토머스-솔로몬-마르코의 걸음이 한결같이 서쪽을 향했다는 것은 미국의 서부 개척사와 겹쳐진다.



    중국식당 ‘달의 궁전’에서 과자에 들어 있던 점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 나는 단절과 무의미의 먼지들이 부유하는 삭막하고 공허한 이 세상이 실은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따뜻하게 공유하는 사람들이 유전하며 사는 몽환적인 ‘달의 궁전’임을 속삭일 때 감동을 받는다. 야윈 하현의 달이 차올라 둥근 만월이 되어 세상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비출 때 아무리 삭막하다 해도 세상은 궁전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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