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노무현 친위대’ 386 정치인들아, 趙光祖에게서 배우라

  • 입력2004-08-25 1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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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친위대’ 386 정치인들아,  趙光祖에게서 배우라
    화순(和順)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새벽에 의금부의 아전이 찾아와 전라도 능성(綾城, 지금의 화순)으로 유배지가 정해졌다고 말해주었지만, 정말로 유배를 떠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한강을 건널 때 되돌아본 목멱산(남산)은 왜 그리 쓸쓸해 보이던고. 남들 같으면 이제 과거를 치르고 조정에 입문한다 해도 그렇게 늦다고 할 수 없는 38세의 이 나이에, 한 때 온 나라를 흔들기도 했던 내가 벌써 탈가(脫駕, 벼슬자리 등에서 내려옴)해야 하는가.

    하기는 초고속 승진이 두렵기도 했다. 문과에 급제하자마자 사간원정언(1515. 11), 홍문관수찬(1516. 3)을 거쳐 홍문관교리(1517. 2)를 했고, 불과 여섯 달 만에 세 단계를 뛰어넘어 홍문관전한(1517. 8)으로 승진을 거듭했을 때 다들 부러워했다. 그러나 나는 사실 두려웠다. 불과 2년 만에 종6품의 정언에서 홍문관전한(종3품)이 되었으니 동료가 시기하고 선배가 견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2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뜻하지 않게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처음 임명되었을 때, “헛된 명예로 세상에 알려지기”보다는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무너진 나라를 바로 세우기를 기약하지 않았던가. “이왕에 이 길로 나아가려면 문과를 거쳐 출신(出身)하지 않을 수 없다”던 내 탄식 어린 다짐이 바로 그것이었다(‘정암선생문집’ 부록 권5, 연보).

    그러나 대사헌의 자리는 달랐다. 경연석상에서 성리학의 이념을 해석하는 과정에 정치를 비판하고 개혁안을 제시하는 홍문관원이나, 유생의 교육을 맡는 동지성균관사(1518.7)는 그래도 ‘경국대전’에 면책특권이 보장된 활동이었다. 내 정적들이 드러내놓고 나를 공격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무백관의 치적(治積)을 조사·규탄”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경국대전’ 吏典 / 京官職) 사헌부의 수장이 되었을 때, 나는 권력의 자기장(磁氣場)으로부터 더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조정을 공론 메커니즘에 따라 운영되게끔 만들고



    수레가 남태령을 지나 과천을 지날 때까지도 희망은 남아있었다. 앞서가는 압송관이 지나치게 길을 재촉하는 것이 불길하기는 했다. 그런데도 나는 “정암(靜庵, 조광조)을 다시 부르라”는 전하(중종)의 파발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부처(付處), 즉 정상을 참작하여 배소(配所)로 가는 도중인 천안 근처에라도 머물게 하는 중도부처(中途付處)의 전교가 내려올 것으로 기대했다. 아, 그런데 7일의 강행군 끝에 지금 화순 근처의 너릿재고개를 넘으면서 그러한 희망과 기대가 터무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이번 사건의 주동자인 남곤을 이조판서로, 이장곤을 병조판서로, 그리고 심정을 지의금부사로 임명했다고 한다. 인사권과 군·경찰권이 저들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대간들도 전면 교체되었고, 나를 변호하던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안당 등도 언제 파직될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노무현 친위대’ 386 정치인들아,  趙光祖에게서 배우라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박원종·유자광 같은 ‘반정공신’이 “군부 위협하기를 마치 다리 사이와 손바닥 위에 놓고 희롱하듯”할 때 전하를 그들에게서 구해드렸고, 전하가 그렇게 사랑하시던 “국모를 마치 병아리새끼 팽개치듯 내쫓은”(‘중종실록’ 10/8/8) 저들을 탄핵하고, 폐비가 된 신씨의 복위를 위해 그토록 노력했건만, 도리어 우리를 이렇게 내팽개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편을 가르고 당을 합하여 조정에 분란을 조성하는 나쁜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자식이 아버지를 비평하는 태도를 곧다고 하고, 아우가 형을 비판하는 것을 공정하다고 하였”다고?(‘중종실록’ 14/12/14)

    물론 ‘반정’세력 쪽으로 줄을 잘 섰다는 이유만으로 ‘공신’ 행세 하는 자들을 몰아내고, 공자의 가르침을 아는 ‘사림들’을 그 자리에 앉히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끗을 노리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소인배들에게 관직을 맡겨두고서 이 나라 정치가 어떻게 잘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형은 형다워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내가 “위로는 나라의 법도를 함부로 고치고, 가운데로는 전하의 조정을 어지럽히고, 아래로는 나라 사람들이 따르고 지켜야 할 도리를 무너뜨렸다”는 생원 황이옥 등의 상소다(‘중종실록’ 14/12/14).

    도대체 저들은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기나 한단 말인가? 세조와 연산군이 흐트러뜨린 법도를 바로 세우고(단종 생모의 능(소릉) 복권, 1616.3), 조정을 ‘반정공신’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내 공론메커니즘에 따라 운영되게 만들었고, 전하로 하여금 경연석상에서 요순의 정치를 함께 궁구(窮究)하게 하였으며,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그릇된 습속”이자 “이단”행위인(‘중종실록’ 13/8/21) 소격서에 제사지내는 관례를 혁파함으로써 모두들 “눈을 비비고 발돋움하여” “순수하게 다스려지는 나라”(‘중종실록’ 13/8/1)를 바라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말인가(소격서 폐지, 1518.9).

    저들은 우리가 길을 갈 때면 도성의 남녀노소가 모두 말 앞에 늘어서 절하며 “우리의 상전(上典)이 오셨다”고(이이, ‘율곡전서’ 경연일기) 기뻐하던 모습을 보지도 못했단 말인가.

    ‘노무현 친위대’ 386 정치인들아,  趙光祖에게서 배우라

    성급하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던 조광조는 ‘정치세계의 우연성’과 ‘역사의 다면성’을 알지 못한 죄로 사약을 받기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지난 4년은 칼날 위를 걷는 듯한 나날이었다. 압록강변 어천역의 찰방(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마침 인근의 희천에 유배와 있던 김굉필 선생에게서 배운 성리학이 아니었다면, 진작 ‘좌절’하거나 ‘타협’했을지도 모른다.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 즉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 본성(性命)과 사회의 규범법칙(義理)을 공부하고 깨달아(窮理), 실천하는 자세(居敬)를 강조하는 성리학이야말로 혼란한 이 나라를 바로잡는 ‘진리’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우주와 인간과 사회와 국가의 원리로서 혼자 있을 때나(修己) 나라를 다스릴 때나(治人) 한결같이 적용할 수 있는 푯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때, 나는 동료들에게 이것을 말했고, 또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나를 보고 속유(俗儒)들이 웃고 손가락질했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이미 ‘진리’를 발견했고, ‘푯대’를 보았는데, 망설일 것이 무엇인가. 그대로 실천할 따름이었다. 임금께서 하루는 사정전에 납셔서 우리에게 발표(講)를 시키셨을 때, 나는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允執厥中)”는 그 한마디로 순임금의 치법(治法)을 요약해서 말씀드렸다. 나는 그때 보았다. 창호지에 먹물이 스며들 듯 내 생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당신의 눈빛을!

    내가 과거로 출신한 1515년 알성시(謁聖試)에서도 우리는 의기투합했다. 전하는 다음과 같이 출제하셨다.

    “공자께서 ‘만약 나를 사용하는 자가 있으면 1년이면 다스림을 기대할 수 있고, 3년이면 공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 성인이 어찌 헛된 말을 했겠는가?” “내가 다스림을 원한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기강이 세워지지 않았고, 법도도 정해지지 않았다.” “여러 유생들은 지금과 같은 때를 맞아 옛날의 융성했던 정치에 이르려고 하면 어떤 것에 먼저 힘써야 하는지 모두 말하여 보라.”(‘靜庵集’ 謁聖試策)

    나는 거침없이 답안을 써 내려갔다. 먼저 공자께서 ‘1년이면 다스림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은 군주의 마음을 깨우치려 한 말이었다. 즉 나라 다스리는 일이 복잡한 것 같지만, 치국의 원리가 모두 성리학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임금이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그 ‘하나’의 원리를 실천하면 “되겠구나(可)” 하는 기대를 임금과 사람들이 갖는 데 1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3년이면 공적을 이룬다’는 말씀은 군주가 깨달은 바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 실천하는 요체는 원리를 아는 “대신을 공경하고 그에게 정치를 위임하는” 것이다.

    임금은 국가의 중심에 서서 좋은 인재와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직접 나서서 일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나라의 일은 공자의 가르침을 아는 신료에게 맡기면 된다. 신료로 하여금 “조선은 임금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내 나라요 내 후손의 나라”라는 신념을 갖게 하고, 각자 재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기강이 바로 서고, 법도가 자리잡혀” 국운이 융성해지리라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역사의 승리’만을 의식했지, 전하의 불안감을 헤아리지 못했다

    우리의 적은 사방에 깔려 있었다. 연산군시대의 기득권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반정공신’들 역시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무엇보다 위험한 적은 우리 내부에 있었다. 이번 기회에 기득권 세력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새판’을 만들려는 급진파들은 나를 “혼자만 점잖은 체한다”고 몰아붙였다. 그들은 집을 고치는 것이 새집을 짓기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다. 단시일에 ‘가시적인 결과’를 거두는 것에 급급했다.

    관료들과 무신들의 불만은 더욱 컸다. 그들은 과거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한 천거제, 즉 현량과(賢良科)로 인해 천직(賤職)으로 밀려나거나 실업자가 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천거된 인재를 이조에서 외면하여 미관말직에 배치하거나 아예 임용조차 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했다(‘중종실록’ 13/3/11).

    가장 강력한 적은 전하의 마음이었다. 사정전 세미나와 알성시 문제를 출제할 때 전하의 마음과 눈빛이 점차 흔들리고 있음을 나는 느꼈다. “전하께서는 단단하고 굳은 것은 버리고 유약하고 부질없는 것을 생각하며, 이리저리 정처 없이 헤매면서 용단을 못 내리십니다”(‘중종실록’ 13/8/1)라고 하여 임금의 마음을 다잡아놓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져 갔다.

    사실 전하의 마음은 늘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의 원천은 열등감에 있었다. 쿠데타를 통해 형(연산군)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생각과 형과 달리 군주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애초에 전하는 박원종 등의 ‘반정세력’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서 전하를 왕으로 옹립했고, 따라서 아무런 권한도 주지 않았다.

    ‘반정’ 후 공신을 책봉할 때 모든 것은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의 ‘반정 3공신’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100명이 넘는 ‘정국공신’을 책봉하는 데 정작 국왕인 당신은 윤탕노 한 사람을 3등 공신으로, 그것도 나중에 추가하여 건의할 수 있었다.

    가슴 아픈 것은 전하가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신씨를 ‘반정공신’들에게 빼앗긴 사실이었다. 아무리 신씨가 연산군의 처제이며, ‘거사’를 반대하던 신수근의 딸이라지만, 전하가 등극하면서 이미 왕비가 된 분을, 임금의 ‘간청’을 무시하고, 그리도 표독스럽게 폐위시켜 내쫓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전하는 그 이후 공중에 매달린 줄 위를 걷는 듯 모든 것에 극도로 소심해졌다. 즉위한 후 나를 만나기까지 10년 동안 발생한 5건의 역모사건도 전하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그중에서도 특히 재위 2년에 발생한 ‘이과(李顆)의 역모’는 임금의 불안감을 극도로 자극했다. 공신책봉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현재 임금을 폐위하고 견성군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중종실록’ 2/8/26) 했던 이 역모사건 이후 전하는 왕위를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힘들어했다.

    당신 자신이 왕위를 빼앗은 경험이 있는 터라 자신도 언제 누구에 의해서 형처럼 제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때문에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이 등장하면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고야 말았다.

    사실 나를 비롯한 사림집단의 결정적인 패인(敗因)은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옳은가 그른가만 생각했지, 전하가 우리를 경쟁자로 생각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광통교를 지나는 우리에게 백성들이 말 앞에 늘어서서 엎드려 절할 때, 운종가의 상인들이 우리에게 지지와 성원을 보낼 때, 우리는 ‘역사의 승리’만을 확신했지, 전하의 커져 가는 불안감을 헤아리지 못했다.

    언로가 통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

    역사가 가면을 벗어 던지기 전까지 우리는 진리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세인의 이목을 처음으로 집중시키고 전하의 마음을 잡아끈 이른바 ‘폐비 신씨 복위 논쟁’(중종 10년)은 그 한 예다. 당시 전하는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큰 번개와 천둥소리가 나자 “비상한 재변(災變)이 있다면 반드시 비상한 변고(變故)가 있기 마련”이라면서 ‘구언(求言)의 교지’를 내렸다.

    이에 대해 박상과 김정이 장문의 상소를 올려 “폐비 신씨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궁궐 밖으로 몰려난 지 벌써 10년이 되었는” 바, “명분도 없고 까닭도 없이 내쫓은 신씨를 다시 복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중종실록’ 10/8/8). 이는 ‘반정공신’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취한 조처가 “명분도 없고 까닭도 없는” 행위였음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이었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당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반대세력의 반발과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여전히 권력을 장악한 공신들은 상소를 올린 박상과 김정을 당장 잡아다 문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몇몇 사림은 구언의 명에 따라 올린 상소 내용을 문제 삼아 처벌하는 것은 언로를 막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정언 표빙(表憑)은 “언로에 방해가 된다는 것은 오히려 작은 일입니다. 이 사건은 실로 그 사악한 생각이 종묘와 사직의 안위에 크게 관계”됨을 보여주는 일이라면서 “문초”를 더욱 강력히 요청했다. 대부분의 대간은 박원종·성희안 등 반정의 주역이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기정사실화한 이 일을 다시 거론할 경우 나라의 기강이 흔들릴 것을 염려하여 이들을 “문초”하고 “유배”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언로냐 국가기강이냐’를 놓고 조정이 떠들썩할 즈음 마침 나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임명된 지 이틀 만에 나는 상소를 올려 대간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했다.

    즉 나는 먼저 “언로가 통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대간이 된 자는 언로를 연 후에야 비로소 대간의 직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상과 김정의 일에 대해서 나라의 재상들이 그들을 처벌하자고 주장하더라도, 대간에서는 반대로 그들을 용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언로를 넓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대간에서 언로를 막고 그들을 처벌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막 정언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그 본분을 잃어버린 대간들과 함께 근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사헌부·사간원의 대간 전원을 파직”하든지, 아니면 나를 파직하라고 상소했다(‘중종실록’ 10/11/22).

    이에 대해서 많은 동료·선배가 비난했다. ‘문과에 급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정언이 되어서, 그것도 임명된 지 이틀 만에 감히 대간 전체를 탄핵해?’ “함께 임명된 유옥·박명손은 그 일에 대해 가만히 있는데, 왜 조광조 너만이 그런 주장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실 구차스럽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지도 않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한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사실 많은 사람이 간과하고 있지만, 나는 폐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대간의 태도와 언로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을 뿐이었다.

    물론 이 일이 발생하기 5개월 전인 1515년(재위 10년) 3월에 두 번째 왕비 윤씨가 죽자 전하는 매우 쓸쓸해하셨고, 새 왕비를 간택할 것이냐 아니면 “분홍색 치마를 뒷동산 바위에 펼쳐놓고” 기다리는 신씨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놓고 고심하고 계셨다.

    그래서 폐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 전하가 좋아하실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원칙론만 얘기함으로써, 선비들의 신망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전하의 뜻에도 부합하려 했다. 내 상소로 인해 조정의 논란은 더욱 뜨거워졌고, 전하께서도 “조광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온 조정이 서로 대립하니 매우 놀랍다”면서(‘중종실록’ 10/12/乙卯) 빨리 이 문제를 끝맺으라고 지시했다. 결국 이 문제는 좌의정 정광필을 필두로 한 많은 관료가 그들을 용서해주자고 하여 박상과 김정은 다시 관직에 돌아올 수 있었다(1516년 11월).

    역사는 우리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조광조가 주장한 것은 그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사림의 공론”이라는(‘중종실록’ 10/12/4) 대사간 방유령의 말처럼, 공론의 소재를 알아 그것을 부상시키기만 하면 논쟁을 거듭하다가 바른 데로 귀결되었다. 당시 나는 34세의 경험 없는 신참 관료에 불과했다. ㄱ런데도 진리의 푯대를 내걸자마자 온 조정이 요동치더니 결국 ‘옳은 것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종의 어머니 권씨 왕후(소릉)를 복권하는 일도 그랬다.

    사실 ‘소릉 복권 사업’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비록 소세양이 세조 임금의 권씨 왕후 강등조처로 말미암아 “문종의 영혼이 부인이 없어 홀로 제사를 받으셔야 한다”고 하면서 소릉의 추복(追復)을 주장했지만, 이 문제는 세조시대의 정치적 유산을 청산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연산군 때에는 남효온이 부관참시까지 당했기 때문에 아무도 선뜻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소세양은 용감하게도 이 문제를 거론했을 뿐만 아니라, “만약 자손이 선대의 왕이 한 일이라 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비록 천만년이 지나도 그 잘못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일 중에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을 것입니다”고(‘중종실록’ 7/11/22) 하여 역사 바로 세우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유순·성희안 등의 원로대신은 소릉을 복위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 것 같지만, 이미 세조께서 종묘에 다 고한 일을 그 뒤를 이은 임금이 경솔하게 뒤집을 수는 없다고 하여 반대했다(‘중종실록’ 7/11/26). 전하조차 “지금 다시 종묘에 고하고 왕후로 명칭을 고친다면, 이것은 세조의 잘못을 드러내는 일이므로”(‘중종실록’ 7/12/1) 따를 수 없다고 주장하셨다.

    그런데 대세가 ‘복위 불가’ 쪽으로 기울던 1513년(재위 8년) 2월에 종묘(宗廟)의 소나무 두 그루에 벼락이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늘의 경고라는 이 ‘사건’으로 인해 소릉을 복위하라는 주장이 힘을 얻어갔다. 결국 전하께서도 그 주장을 수용했다. “근래에 해마다 재변이 있어서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이제 태묘(종묘)에 변고가 있어 몹시 놀랐다.” “소릉의 복위는 의리로 보아 당연한 일”이라는(‘중종실록’ 8/3/2) 임금의 말이 그것이다.

    이 일은 내가 관직에 들어가기 전에 발생한 일로서 직접 개입한 바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일을 통해 천명이 분명히 있고, 나라일은 그 천명대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배향 사업(‘중종실록’ 12/8/18)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의 실천이었고,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이었다.

    역사가 언제나 진리의 편은 아님을 깨달았어야

    역사는 1519년 11월15일 밤중에 드디어 가면을 벗어 던졌다. 우리가 현량과를 통해 ‘학식’과 ‘행실’이 출중한 자를 뽑아 국정을 쇄신하고, 내가 대사헌에 임명되어 소인배들이 제거된 ‘군자의 나라’를 만들려 할 때, 그리고 오랜 숙원사업인 ‘정국공신’ 개정사업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려 할 때, ‘이성의 간지(奸智)’는 전하의 마음을 돌려놓아 버렸다.

    그날 밤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연추문(경복궁의 서문)이 활짝 열려 있고, 의금부 도사가 나를 비롯해 김정·김구·윤자임 등의 체포 영장을 가지고 왔을 때, 나는 알았어야 했다. 역사가 언제나 진리의 편은 아님을. 역사는 진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승자와 패자의 기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우리에게 내려진 죄명은 “서로 붕당을 맺고[朋比]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은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하였으며, 국왕의 존재를 무시했다”는 것이다(‘중종실록’ 14/11/15). 붕당의 죄? 그것은 소인배들이 이끗을 보고 결탁하여 권력을 사사롭게 사용하려는 집단에 대한 죄로 ‘대명률’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아닌가? 아! 그렇구나. 전하께서는 우리를 소인배 무리로 보았구나. 내가 현량과를 이용해 자기 세력을 심고, 정국공신에 대한 ‘위훈삭제(僞勳削除)’를 통해 정적을 제거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하셨구나.

    딴엔 그런 점이 없지는 않다. 현량과로 등용된 28명이 대부분 서울과 경기도 출신으로 도성 인근에 모여 있었으며, 평균연령이 35.5세로 ‘성리학의 세례’를 강하게 받은 이념집단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조광조의 행동대원’이라 불렀다.

    실제로 이들은 내가 “정국공신 중에는 폐주(연산군)의 총신이 많은데, 이들의 죄를 논하자면 결코 용서할 수가 없”다면서(‘중종실록’ 14/10/25) 70여 명에 달하는 가짜 공신의 호를 삭제할 것을 요청할 때, 승정원·사헌부·사간원 등의 여론을 불러일으켜 국왕을 압박했다. 이때 전하는 우리를 사사롭고 당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붕당으로 본 것이다. 더구나 전하는 우리를 “상전”으로 부르는 백성을 보면서 가뜩이나 권좌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으셨던가.

    ‘역사의 간지’가 경복궁 연추문으로 들어온 그 다음날(11월16일)부터 우리의 죄과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그 동안 나에 대해서 ‘비판적 지지’를 보내던 영의정 정광필은 “저 사람들은 왕께서 뽑아서 높은 지위에 임명하셨으며, 그들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셨는데, 하루아침에 처형하면 전하께서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꼴이 되지 않겠느”냐(‘중종실록’ 14/11/16)면서 왕의 처사를 비판했다. 의정부·육조·한성부에서도 “이들이 붕당을 맺었다는 죄를 자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증거도 없는데, 이들을 붕당죄로 다스리는 것은 전하의 덕에 큰 흠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전하는 “조광조가 처음부터 나라일을 그르치고자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조정에서 이와 같이 처형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들을 “사사(賜死)”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중종실록’ 14/11/16). 문제는 “조정이 청했다”는 왕의 말과는 달리 아무도 청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삼정승은 물론이고 승지와 언관까지도 이들의 죄를 청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광필 등은 “그 조정이 대체 누구의 조정이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기사관 권예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처럼 중대한 일을 밤에 몰래 해서야 되느냐”(‘중종실록’ 14/11/16)고 추궁했다. 심지어 승지 유은필은 누가 이 일을 왕에게 처음 청했는지를 밝히라고 요구하면서 “이런 일은 나라가 어지럽던 연산군 때를 연상케 한다”고(‘중종실록’ 14/11/16) 말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4일 만인 11월18일에 드디어 감추어져 있던 역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대간들이 상소를 올려 “전하께서 조광조처럼 명망 있는 신하를 겉으로는 신임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모조리 죽일 생각을 한 것이 아니”냐고 몰아붙이자, 드디어 왕은 사태의 내막을 털어놓았다.

    즉 처음에 홍경주·남곤·김전 등이 무사(武士)들의 불온한 분위기(무사 30명이 조광조 등 문사를 죽이려 한다는)를 듣고, 임금께 그 사실을 전했으며, 따라서 무사들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전하께서는 “조광조 등의 본뜻이 옳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성급하고 과격하게 자기들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 버릇이 되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중종실록’ 14/11/6)고 하여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말씀했다.

    이에 정광필은 “이 사람들(홍경주·남곤 등)이 간사한 사람으로 지목되면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국왕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라고 촉구했다. 이 자리에서 다급해진 홍경주는 비로소 자신이 직접 남곤·김전 등과 의논하여 “조광조 등의 죄를 바로잡자”고 청했음을 밝혔다.

    무인(武人)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도 감지되었다. 무인들은 나에 대한 처벌(유배)이 너무 가벼운 데 불만을 가졌으며, 우리를 지지하는 유생들에 반대하여 ‘실력행사’도 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이에 전하는 “이들을 처벌한 것은 조정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를 처음부터 다시 논할 수는 없다”고 하여 우리의 죄를 기정사실화했다.

    세상은 군자들의 선에 의해서만 다스려질 수 없어

    내가 압송관의 독촉을 받으며 충청도 일대를 지날 때였다. 마침 부제학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오던 이사균(李思鈞)을 만났다. 그는 전에 “행동이 방정치(檢束) 못하다”는 이유로 내가 내쫓은 인물이다. 그 때문에 남곤 등이 “조광조에게 거슬린 사람”이라 하여 그를 의심치 않고 임용했다.

    뜻밖에도 이사균은 내 손을 잡고 “자네는 아직 ‘중용’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당우(唐虞)의 사업(요순의 정치)을 하려 했는가. ‘중용’에 있지 않은가. ‘어리석으면서 자기를 내세우기를 좋아하고, 미천하면서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며, 지금 이 세상에 나서 예전의 도를 행하려 하면, 재앙이 몸에 미치지 않는 이가 없다’고. 자네가 재앙을 면치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이이, ‘율곡집’ 경연일기) 간곡히 말했다.

    아! 내가 경멸하던 이사균조차 알고 있던 것을 나는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다. 나는 어리석은 자이면서도 내세우기를 좋아했다. 더구나 지금 이 세상에 나서 예전 요순의 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재앙이 몸에 미친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나는 사정전의 그 세미나에서 전하께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는 ‘중용’의 구절을 외워서 요약해 드렸건만, 정작 그 깊은 의미는 모르고 있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군자들의 선에 의해서만 다스려질 수 없으며, 선과 악의 경계선도 분명치 않았다. 정치가 “순일(純一)한 진리”를 가르쳐서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순일함의 악마성’, 나는 그것을 어렴풋이 본 것이다.

    전하는 군주와 군자의 경계를 의심하고 계셨다. 내가 그 경계를 넘어서서 군주의 자리까지 차지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광필이 전하께서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것은 전하가 아니라 바로 역사의 간지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

    정치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함정,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일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때로는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최악의 결과로 치달을 수도 있음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정치의 그 우연성 때문이라도 우리는 좋은 의도를 성공시켜 좋은 열매를 거두어야 했다. 정치가는 자신의 정책을 성공시켜야만 한다는 저주받은 운명이라는 것을, 그리고 철저히 결과윤리에 따라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좀더 깊이 깨달아야 했다.

    그런데 박상·김정을 복권시켰을 때, 정몽주·김굉필의 문묘배향 때 본 역사의 미소는 무엇이던가? 그리고 나를 대사헌에 임명하면서 “삼대의 정치”를 함께 만들어보자던 전하의 따뜻한 격려는 또 무엇이었는가? “마치 두 임금의 얼굴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중종실록’ 14/12/16).

    공자의 말씀대로, 하늘과 인간과 세상을 관통하는 진리를 실현하는 데 우리는 온몸을 바쳤다. “유래가 오래되었고 조종께서 지켜오신 소격서를 하루아침에 폐지할 수 없다”는 대신들과 전하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정도(正道)”를 지키기 위해 다섯 번이나 똑같은 말로 전하를 “협박”까지 하면서 관철시켰다. 그런데 그 소격서가 다시 부활되고, 현량과는 폐지되었으며, ‘위훈삭제’사업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역사의 진리는 있기나 한 것인가? 나는 심히 당혹스럽다.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고 그 희미한 경계선에 존재

    이곳 화순에 온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화순의 수령이 관아의 아이들을 보내 세숫물을 준비하고 식사를 거드는 일을 돕게 하였다. 고마운 일이다. 아직 얼굴을 보지는 못했으나, 중죄인에게 이처럼 따뜻한 마음을 보인 그 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삶은 고구마를 보내온 농부도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입으로만 말하던 민심을 겪고 있다. 그것은 쉽게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배고프면 찡그리고 슬프면 울며 눈앞의 작은 이익을 두고 다투기도 했다. 우리가 경멸하던 소인배의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작지만 움직일 수 없는 믿음과 소망이 있었다. 그들은 임금과 조정신료들이 정치를 잘하는지 어떤지를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었다. 그 희미한 경계선상에 존재했다. 이사균이 헤어지면서 내게 한 말이 생각났다. “자네는 지금 젊으니 ‘중용’을 읽으며 노력해서 자신을 애중히 하게.”

    오후에 갑자기 관원들이 몰려와 가시울타리를 빙 둘러섰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밥 한 사발이나 먹을 시간이 지나자 의금부도사 유엄이 ‘사사(賜死)의 명’을 가져왔으니 순순히 받으라고 말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나는 그에게 “사사의 명만 있고 사사의 글은 없소?”라고 물었다. 유엄은 말없이 ‘사사의 명’이 적힌 쪽지만 내보였다. 기가 막혔다. “내가 전에 대부(大夫) 줄에 있다가 사사를 받게 되었는데, 전하께서는 쪽지 한 장으로 내 목을 내놓으라고 하십니다그려. 도사의 말이 아니었다면 믿지 않을 뻔했소.”

    나는 조정의 분위기를 물었다. 그는 조정에서 나를 “왕망(王莽)’에 비유하고 있으며, 누가 정승이 되었고, 심정(沈貞)이 지금 어느 벼슬에 있는지에 대해서 소상히 말해주었다(‘중종실록’ 14/12/16).



    비로소 나는 그 ‘사사의 명’이 정말임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참으로 중죄인”이라는 것을. 내가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했다”는 것은 전하도 알고 세상도 알며 하늘도 알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세계의 우연성을 몰랐으며, 정치가의 저주받은 운명과, 역사의 다면성(多面性)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 어찌 정치의 죄인이 아니며 역사의 죄인이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중용’을 다시 읽을 기회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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