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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환의 문화오디세이 ⑧

올림픽에 집착한 ‘가난한 민족주의’

“조선 운동계가 바야흐로 융성하여 그칠 바를 모르니…”

  • 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eutekom@hanmir.com

올림픽에 집착한 ‘가난한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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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 집착한 ‘가난한 민족주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순간. 그 감격과 흥분은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이어졌다.

제목만 보면 마치 올림픽 대표선수 선발경기인 것 같으나 그건 아니었다. 조선체육회에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다만 지금은 아니지만 이후부터는 “조선인의 운동계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갈 것이요, 극동올림픽이니 세계올림픽이니 하는 중대한 회합을 앞두고 있는지라 장래 세계적 운동회에 참가하여 영광의 월계관을 얻으려는 용장한 선수는 미리부터 이 운동회에 참가하여 재주를 단련하라”는 뜻이었다.

1920년대 초에는 수없이 많은 ‘운동회’가 열렸다. 특히 1920년대 중반부터 올림픽은 4년마다 열리는 행사가 아니라 ‘큰 운동회’란 의미로 굳어졌다. 그해 6월말 조선신문사가 주최하는 ‘여자(女子) 올림픽’이 열렸다. 이 대회에는 소학교와 중등학교 여학생들이 주로 참여해 ‘오십미’ ‘팔백미돌 리레’(800미터 릴레이) 등의 트랙경기와 ‘고도(高跳)’ ‘광도(廣跳)’ 같은 필드부 경기,  농구 등의 종목이 열렸다.

그런데 이 큰 운동회는 여성에게만 관람이 허용되었다. 여성들만의 올림픽이었던 것. 이 대회는 국제적으로 여성의 올림픽 참가가 허용되기 전 여성들만의 대회가 열렸던 데서 착안했던 것 같다.

이밖에도 ‘올림픽’이라는 말의 쓰임새는 다양했다. 문학평론가 김기림은 1933년 조선의 일간지들이 각각 3∼4편씩의 소설을 연재하며 경쟁한 현상을 두고 ‘신문소설 올림픽 시대’(삼천리, 1933. 2)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1924년 6월에는 제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를 통해 조선의 체육은 1920년대 초반 인력거꾼들이 우승을 차지하던 운동회 수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대회 종료일(1924.6.17) 동아일보는 경기결과를 화보와 함께 대서특필하는 한편, 필드와 트랙경기 각 종목 우승자의 기록을 세계기록·극동기록과 비교해 보여주었다.



1925년의 제2회 대회도 성황리에 개최됐는데 이 대회부터는 강령·대회규정·참가비·주의사항 등이 미리 공표됐고, 또한 각 경기의 룰과 경기장 규격 등도 ‘세계 표준’을 따랐다. 이 주의사항을 잠시 살펴보자.

-선수는 필히 상당한 운동복을 당용(當用)하고 본회(조선체육회)로부터 수취한 번호표를 흉부에 부착하되 명료히 표시하게 함을 요함.

-선수는 장내에 무단히 출입함을 불허함.

-선수는 지정한 장소에 집합하여 소집원의 점명(點名)에 의하여 출장하되 이차를 점명하야도 출장하지 아니할 시에는 기권으로 간주함.

선수들은 정해진 옷을 입어야 하고, 마음대로 운동장을 왔다갔다하면 안 된다는 것은 지금 보면 별것도 아닌, 너무나 당연한 규정이다. 따라서 그동안 동네 운동회 수준에 머물던 체육행사가 근대적 제도화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지역의 운동회들은 여전히 활기 있게 유지됐다.

특히 조선인들은 각종 트랙경기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1920년대 말은 우수한 장거리 선수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였다. 전조선육상경기대회가 시작된 지 10년 만에 1936년 손기정과 남승룡이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했고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한국이 마라톤 강국이었던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었다.

참가 못하는 식민지인의 설움

1927년 8월29일자 ‘동아일보’는 서울 시내 4대 신문사, 즉 동아·조선·매일신보·중외일보의 ‘운동기자’들이 시내의 한 음식점에 모여 ‘운동기자단’을 결성하고 ‘기사의 정선(精選)과 사계의 통일’을 도모키로 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면서 기자단 결성의 취지를 “조선의 운동계가 바야흐로 융성하여 그칠 바를 모르는 상황에 부응하기 위함”이라 썼다.

이처럼 192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체육에 대한 조선인들의 관심이 점점 고조되고 각종 운동경기가 언론의 주요면을 장식하게 됐다. 그야말로 체육입국(體育立國)의 기치가 본격화됐다. 나라는 작아도 체육에는 강한 ‘매운 고추’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스포츠는 당시 민족개량주의, 또는 문화적 민족주의가 찾아낸 아주 적절한 소재였다.

1927년의 상해 극동올림픽대회, 1928년의 암스테르담 국제올림픽대회를 거치면서 이런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됐다. 일본 또한 이 시기에 스포츠와 국제대항전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높여나가고 있었다. 일본은 1927년 극동올림픽대회에서 주최국 중국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는데 불과 2년 전만 해도 구기종목 등에서 당시 아시아의 스포츠 강국이었던 필리핀에게 참패를 당했던 터였다. 그러나 일본은 달라지고 있었다. 당시 군사력과 경제력이 그러했듯 머지않아 미국, 독일과 자웅을 다투는 체육강국이 될 전망이었다. 일본이 암스테르담올림픽 선수단 참가예산을 8만원에서 12만원까지 올리자 독일신문은 ‘황화(黃禍)’가 닥칠 거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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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eutekom@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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