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호

남도의 호방함 담아낸 낭만파 음유시인의 ‘열린’고택

  • 사진·글: 정경택 기자

    입력2004-09-30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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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는 참으로 풍요로운 곳이다. 넓은 평야와 영산강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풍성함을 누려왔다. 고인돌과 고분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인기 있는 주거지역이었음에 틀림없다.

    나주 임씨(林氏) 대종가는 다시면 회진리에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회진현(縣)으로 불렸던 곳으로, 그만큼 오랜 역사를 지녔다. 조선 초에 나주 임씨 중시조(中始祖) 감무공 임탁(林卓)이 개성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임탁은 재물보다는 후손이 번성할 수 있는 지형을 택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대종가는 단 한 번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순수 종통을 이어왔다.

    종택은 남도 특유의 일자형을 취하면서도, 사랑채가 안채와 떨어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사랑채 앞 정원은 온갖 이름 모를 나무들과 화초들로 무성한데, 격식이나 체면치레를 따지지 않는 이 집안 특유의 기질 때문일까. 마치 비밀정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남도의 호방함 담아낸 낭만파 음유시인의 ‘열린’고택

    대가족이 살았음을 말해주는 안채 옆 장독대. 담장 너머 사랑채가 보인다.

    남도의 호방함 담아낸 낭만파 음유시인의 ‘열린’고택

    ① 집안 가양주인 죽주. 죽순이 딱딱해질 무렵 담근다.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br>②③ 한때 생활 무대의 주인공이었다가 지금은 퇴역한 각종 유물들.

    자고로 ‘집안 자랑’하려면 슈퍼스타 한 명쯤은 있어야 하는 법. 나주 임씨가 자랑하는 인물은 다름아닌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87)다. 조선 선조 때의 시인인 그는 평안부사로 부임하던 중 황진이의 무덤에 들러 시 한 수 읊었다가 좌천당한 인물. 다음은 그가 황진이의 무덤에 들러 읊은 유명한 시조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난다잔 잡아 권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요즘에야 낭만적이고 멋있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당시 사대부와 기생의 신분 관계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정서적으로 서인에 가까웠기에 동인들의 시빗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이후 정치에 혐오를 느끼고 39세로 타계할 때까지 전국 산천을 주유하며 주옥 같은 시 1000여 수를 토해냈다.

    조선 중기 영남지방이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분위기였다면 호남에선 송순, 정철, 윤선도 등 기라성 같은 문장가들이 중앙정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음풍농월하며 시가문학을 꽃피웠다. 임제는 호남시단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갖고 있었는데, 정치를 멀리하고 산천을 떠돌면서 얻은 풍부한 감성과 호방함이 시에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은 그의 감성을 보여주는 일화.

    임제가 어릴 적 밤 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아 동네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찾아나섰다. 외진 개울가를 헤맨 끝에 그를 찾았는데 영문을 묻자 소년은 까만 눈망울로 하늘을 쳐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별이 너무 아름다워요.”

    나주 임씨가 600여년을 내려오면서 정치판에 얽혀 화를 입은 적이 없고, 임제의 외손자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이 유년시절을 여기에서 보내고 나중에 영남학파를 대변하는 남인의 좌장이 된 것을 보면 이 집안이 학연이나 지연 따위를 가리지 않는 열린 가풍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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