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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에세이

첫눈 내리던 날

첫눈 내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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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뒤로 다시는 안 봤냐고? 천만에! 집에 와서 곰곰 필름을 리와인드 해보니 좀 전까지 부끄럽고 얼얼하기만 하던 천둥번개가 서서히 달콤한 초콜릿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오빠가 보고 싶었다. 그 다음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시침 뚝 떼고 우리는 또 만났다.

그 후로도 오빠 친구들하고 무등산엘 갔는데 그날도 눈이 펑펑 쏟아졌다.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눈이 겹겹이 쌓인 바위에 기대 잠깐 쉬고 있는데 오빠가 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윤아, 저 눈꽃 좀 봐. 너무 예쁘지?”

나는 또 그의 말에 속아 눈꽃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오빠는 나에게 기습뽀뽀 제 2탄을 날리고 말았다. 그날 함께 산에 간 그의 친구들이 나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며 소개해달라고 조른다면서 오빠는 또 이렇게 말했다.

“윤아, 그 녀석들한테 너보다 훨씬 더 예쁜 애를 소개시켜줘도 싫단다. 한사코 너만 사귀고 싶다는데 나는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니가 그렇게 빼어난 미인도 아닌데 말야!”



“오빠,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말해도 되는 거야. 내가 미인이 아니라고 누가 그래? 어디서 확인한 사실이야. 국가에서 검증서라도 받아왔어?”

그렇게 토라지긴 했지만 나도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오빠와 나를 놀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무모한 판단력으로 안목이 잠시 흐려졌거나. 그랬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만나던 우리 사이에 서서히 결혼 말이 오고갔다. 오빠가 나이가 많으니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 고향 광주에서 소문난 병원집 아들, 나는 가세가 기울어가는 가난한 집 딸. 그 격차를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지금처럼 ‘뻔순이(뻔뻔지수가 높은 사람)’ ‘철순이(얼굴에 철판 깔고 사는 사람)’였다면 아마 나는 그가 하자는 대로 결혼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왜 그리 양심적이었는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저렇게 빵빵한 집안에 내가 어떻게 덥석 들어간담? 난 안 돼. 우리는 격에 안 맞아. 얌체 없는 짓이야!’

그래서 나는 헤어지자고 했다. 그가 내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별의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약효가 없었다. 완전 100% 무공해 순수한 영혼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격렬한 사랑에는 대항할 수 없었다. 그의 막무가내 추진력은 가히 덤프트럭을 능가하는 ‘인공위성급’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가장 야비한 방법을 택했다. 그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 다니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는 거처하는 자취방을 가르쳐주지 않고 이사를 가버렸다. 그러나 그는 몇날 며칠을 걸려서 기필코 찾아내고야 말았다. 세상에. 그 많은 집, 그 넓은 신촌 일대를 다 뒤져서 한 집, 한 집 다 노크해 물었다고 한다. 나는 감동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또 몇 달간 더 만났다.

그런데 마침내 결정적인 최후가 찾아왔다. 그가 우리 집에 찾아오는 치명적 실수를 해버린 것이었다. 기품 있고 멋진 그의 집, 쇠락해가는 우리 집. 나는 도저히 창피해서 참을 수 없었다. 온몸의 세포가 튕겨져 나올 듯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왜 네 맘대로 찾아오고 난리냐? 너희 집이 잘사니까 보이는 게 없냐?”

이성을 잃고 그에게 쏘아붙였다. 내 안에 쌓여 있던 ‘열등감의 대바겐세일’이었다. 그리고 그와 가장 친한 친구에게 통보했다.

“물론 그 오빠는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좋은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은 다르다. 나는 다른 사람이 있다!”

얼마나 야비한가. 그러나 극약처방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 오빠의 추진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자 깔끔한 성격의 오빠는 단숨에 나를 떠났다. 그 후로 나는 얼마나 슬펐는지…. 그리고 일 년쯤 지나 오빠는 나에게 결혼소식을 알려왔다.

“윤아, 니가 떠나버리고 나는 너무 힘들었어. 그리고 너를 잊기 위해서라도 빨리 결혼하기로 결심했어. 그래도 난 네가 밉지 않아. 너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너와의 추억만으로도 행복해. 그러나 아내가 될 사람에게는 정말 잘해주고 싶어. 왜냐하면 지금도 내 가슴속에는 너밖에 없으니까. 그러면 아내한테 너무 미안하잖아. 미안한 만큼 더 잘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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