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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의 한국혼

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향내음으로 삭혀낸 가마터 늙은 匠人의 망향가

  • 글: 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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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이삼평이 발견한 이즈미 야마의 도광지(陶鑛地) 기념비. 안내를 맡아 설명해준 이삼평의 14대손 가나가에 쇼헤이씨가 서있다. ‘이삼평발견지도광지’라는 비문이 보인다. 지금은 멀리 규슈 남서쪽의 아마쿠사(天草)의 도광석을 쓰므로 이곳은 폐광 상태다.

삼평의 5대 후손까지는 자기를 구웠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6대에 이르러 폐업하고 이후에는 농사만 지었다. 아리타 기록에는 1828년 큰 불이 나 마을이 전소되다시피 하여 자기산업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되어 있다. 어쩌면 그 무렵과 삼평 후손이 도자기 만들기를 그만둔 시기가 일치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13대 산??요시토)씨의 어릴 적 생활은 빈궁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농업학교를 마치고 당시만 해도 선망의 대상이던 철도기관사가 되어 40년을 일했다.

“도조 이삼평의 자손임을 가슴에 새기고 있지만 우선 먹고 사는 게 급했으니까요.”

그는 정년퇴직 후 퇴직금을 털어 가마터를 닦았다. 1975년의 일이다.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과 더불어 요업도 번성했다. 나이 쉰여섯에 새롭게 출발한 그는 완전히 아마추어로 요업을 배우고 익혀 대전엑스포에 기념출품도 했다. 가업을 이어가려 차남 쇼헤이에게도 규슈조형단기대학의 도예코스를 다니게 했다. 쇼헤이의 아내도 그림을 배워 자기에 밑그림을 새겨 넣는다. 이렇게 가업계승의 기틀을 다지고 나니 이제 경기가 영 말이 아니라고 산베에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14대 쇼헤이씨가 유적 안내에 나섰다. 그는 손수 작은 경차를 몰아 아리타 변두리의 시라카와(白川) 냇가에 닿았다. 낡은 물레방앗간에 커다란 물레방아가 놓여 있다.

“이즈미산에서 자기용 광석을 캐다가 여기서 빻아 분말을 만들었습니다. 돌덩이가 워낙 크고 단단해서 사람의 힘으로는 가루를 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력을 이용하기 위해 냇가에 시설을 만든 거지요.”



그가 다음으로 안내한 곳은 냇가에서 올려다보이는 덴구다니(天狗谷)라는 언덕이었다. 밋밋한 오르막이었으나, 계곡이라는 이름처럼 숲 사이로 움푹 패 있다.

“여기가 자기를 굽던 가마터입니다. 국가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가마의 불길이 위로 솟구쳐 올라가도록 오르막에 터를 잡은 것이지요.”

이곳에 아리타 교육위원회가 세워놓은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가마터는 아리타의 도자기를 창시한 이삼평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이즈미산의 자석광(磁石鑛)을 발견한 뒤 아리타를 자기생산의 주력으로 삼고 생산을 본격화했던 초기단계의 가마터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로 4기 이상의 계단식 오름가마 및 거기서 나온 자기조각 등이 확인되었다. 조업년대는 1630~60년대로 추정된다. 일본 요업역사상 중요한 가마터다.’

쇼헤이씨가 부연해 설명했다.

“광석을 빻아 가루로 만들고 가마에 굽는 동선(動線)이 짧아 매우 능률적이지요. 냇가에서 이곳 가마터가 지척이니까요. 지금은 다들 장작을 태우는 가마가 아니라 가스 가마를 쓰니 굳이 덴구다니 같은 장소를 고를 이유가 없어졌지만 말입니다.”

여러 가지 이점이 있어 요즘엔 너도나도 가스 가스만 쓴다고 했다. 우선 연기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연료 값이 싸 훨씬 경제적이고 제조기법도 쉽다는 것이다.

불교에 기대 망향의 한 달래다

도자기 가마와 땔감에 얽힌 이야기가 ‘아리타 역사’라는 책에 적혀 있다. 나베시마 부대가 조선에서 납치해온 도공은 모두 예닐곱 명이었다. 이들에게 도자기를 굽게 했더니 불티나게 팔리고 인근 이마리(伊萬里) 항구를 통해 일본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아리타 도자기는 초기에 이마리 도자기라 불렸으며 나가사키를 거쳐 유럽에 팔리면서도 ‘이마리’ 상표가 붙었다.

이 경이적인 돈벌이를 곁눈질하던 일본인들이 조선 도공들을 모방해 사가현 도처에서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문제는 1000℃가 넘는 가마불을 지피려면 땔감이 엄청나게 들어가기 때문에 나베시마 번주의 번유림(藩有林)을 훼손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나베시마 번주는 비상조처를 발동해 조선도공을 제외한 일본 도공 남녀 800명을 추방했다. 결국 일본인 가운데 조선 도공 밑에서 배운 내력이 확인된 ‘정통파’에 한해 일부 면허증이 발급됐다. 그리하여 1647년 공식기록에 남은 도공 집안은 155가구. 당시 아리타에는 활발한 자기 생산으로 인구가 크게 늘어나 총 1300가구에 총인구는 5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삼평 묘로 가보실까요?”

쇼헤이씨를 따라 내려가자 가마터 아래쪽 냇가 공동묘지에 이삼평의 묘비가 서 있다. 시든 꽃이 놓여 있고, 한글로도 비명이 쓰여 있다.

‘아리타는 도자기 창업 연대를 1616년대라고 보고 창업 300주년을 맞은 1916년 도산신사(陶山神社) 뒤편 언덕에 도조 이삼평의 비를 세워 그 공적을 기렸습니다. 1959년 이곳 시라카와 공동묘지에서 월창정거사(月窓亭居士)라는 계명의 묘비가 발견됐고, 1967년 그 이름이 이삼평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마을의 사적으로 지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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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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