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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굴

“김좌진의 신민부에 살해당하고, ‘김좌진 영웅 만들기’로 친일파 몰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정위원 구영필 유족의 항변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김좌진의 신민부에 살해당하고, ‘김좌진 영웅 만들기’로 친일파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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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의 신민부에 살해당하고, ‘김좌진 영웅 만들기’로 친일파 몰렸다”

중국 영안현 영고탑 간민호회 지도자였던 구영필씨 장례행렬.

광복 후 국내 항일독립운동사 자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역한 ‘한국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만든 ‘독립운동사자료집’이다. 그런데 이들 자료에는 구영필씨의 죽음은 물론 당시 상황에 대해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유족회는 어쩔 수 없이 1968년 동아일보 기사와 ‘일본군에 의해 피살됐다’고 기록돼 있는 한국인명대사전과 국사대사전을 근거로 국가보훈처에 독립운동가 서훈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좌익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별다른 근거자료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외무성 경찰사’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 자료’ 등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일본 정부의 기밀사료들이 공개되기 시작했고, 그 사료를 정리한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편)’는 국내 학자들의 연구에 주요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이들 사료는 자료 부족으로 연구가 미진하던 항일독립운동사, 특히 1910~1920년대 만주 일대 독립운동사에 대한 학계의 새로운 접근과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이와 함께 구영필씨 피살사건에 숨어 있는 독립운동사의 ‘그늘’이 드러나는 계기를 제공했고, 이에 대해 관련 학자들은 “앞으로 새롭게 조명해야 할 부분”이라고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과연 구영필씨의 피살사건에는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던 것일까. 일본 고등경찰연표 내용 중 일부다.



‘대정 14년(1926) 11월 불온단(不穩團) 신민부 보안대장 문우천 이하 7명이 영안현에서 군자금 모집 중 중국관헌에게 체포되었는데, 이는 반대파 최계화(구영필)의 밀고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여 문 일파가 최를 살해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1928년 3월에 작성한 ‘재만불온단체(在滿不穩團體) 및 사회주의(社會主義) 단체상황’이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해(1925년) 11월에 신민부 보안대장 문우천 등 7명이 영안현 영고탑에서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자, 신민부 쪽에서는 이는 반대파인 영고탑 거주 최계화(구영필)의 밀고에 의한 것으로 추단(推斷)하여 앙심을 품게 되었다. 1926년 5월에 구영필은 돌연 암살되었는데, 신민부원의 행위라고 한다.’

이 두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구영필씨의 죽음이 신민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밀고한 데 따른 보복 살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이유가 그처럼 단순해 보이지는 않는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1928년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 ‘길림성 동부지방의 상황’이라는 문서에는 ‘1926년 신민부 보안대가 영안현 입적간민호회의 수령 최계화를 노상에서 암살하고 그 지반을 신민부가 차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비슷한 시기 일본 외무성 경찰사에는 ‘최근 영고탑에서 최계화의 횡사(橫死)와 더불어 신민부파가 진출하여 세력을 만회했다’고 적혀 있다.

단순 보복 아닌 세력다툼

이 기록을 보충해주는 중국측 자료도 발견됐다. 옌볜대 박창욱 교수가 공개한 ‘1928년 길림성 동부지방상황 기록문건’인데, 일본 자료보다 당시 상황을 훨씬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신민부는 영안 지방을 자기 세력범위에 넣고 군자금을 모으고 자기 단체 세력을 뻗치는 데 매우 필요한 지방으로 느꼈다. 때문에 간민호회를 타도하고 전 영안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정 14년 9월 먼저 보안대를 파견하여 길에서 간민호회 수령 최계화(구영필)를 암살하는 것으로, 기타는 위협, 공갈하였다. 영안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은 신민부의 이러한 태도에 질겁을 먹고 이전에 구영필을 수령으로 한 경상도파는 신민부와 연계를 갖고 있는 평안도파에 눌리게 됐다.

신민부에는 3개 보안대가 있었는데, 문우천을 대장으로 한 제3대가 영안지방을 관리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영안, 해림, 수문하와 기타 성시에 출몰하면서 군자금을 강제로 징수했다(제3보안대장 문우천은 구영필을 암살하였다는 혐의로 현(縣)공서에 구류되어 지금 심문을 받고 있다).’

이 기록들을 보면 당시 중국 관헌과 일본 총독부는 구영필씨 피살사건을 단순한 보복 살해라기보다는 영안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신민부와 간민호회 간의 세력다툼에서 발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상황은 어땠을까. 특히 이 북만 영안지역에서 세력다툼을 벌인 신민부와 간민호회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고, 두 단체의 지도자인 김좌진 장군과 구영필씨는 어떤 관계였을까.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지역의 무장투쟁단체들은 급속한 변화를 겪는다. 신주백 연구원의 저서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의 일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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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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