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호

산골 생활 10년, 몸과 마음의 무게가 같아졌네!

  • 글: 김광화 농부 flowingsky@naver.com

    입력2005-03-24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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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 생활 10년, 몸과 마음의 무게가 같아졌네!

    몸과 마음이 좋지 않을 때는 도끼질로 스트레스를 푼다. 술 대신.

    따르르릉…

    “여보세요?”

    “예, ○○일보인데요….”

    아내에게 온 전화다. 한 일간지에서 ‘자연과 삶’이란 주제의 칼럼을 부탁한단다. 내 입에선 절로 푸념이 쏟아진다.

    “시골로 내려와 살자고 한 건 난데, 왜 나한테는 글을 써 달라고 하지 않을까? 당신은 시골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서 망설였잖아.”



    “사람들이 당신처럼 잘난 걸 싫어하니까. 나처럼 ‘힘들다’ ‘어렵다’ 해야 공감을 얻거든요.”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딸이 “사람들은 아빠가 살짝 망가져야 좋아해요”하고 거들었다.

    딸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망가질 필요야 있겠나. ‘신동아’에 글을 연재하기로 한 뒤 다시 생각해보았다. 왜 글을 쓰는가.

    나는 한때 도시생활을 하면서 지독히 망가졌다. 산골에서 생활하면서 몸과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지만 가야 할 길은 멀다. 워낙 많이 망가져서 아직도 몸놀림이 자연스럽지 않고, 게으름같이 이따금 삐져나오는 삶의 군더더기도 있다. 하나씩 고쳐가고 싶다.

    그런데 치유란 개인의 몫이지만 시대와 사회의 몫도 있다. 개인이 건강하다면 사회도 건강할 것이다. 반대로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면 개인도 온전히 건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글쓰기의 이유를 여기서 찾고 싶다. 그동안 주로 일기 쓰듯 혼자 내 몸을 고쳐왔지만, 내 경험과 치유의 노하우를 좀더 많은 사람과 나눈다면 사회가 훨씬 건강해지리라.

    마지막 선택, 그 끝자락에서

    나는 1960년대에 농촌에서 자랐다. 대학 들어가면서부터 서울서 살았으니 20년 가까이 도시에서 생활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인간다운 삶과 정의로운 사회를 고민했지만,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해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니 현실 인식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내 성격 탓도 있다. 나는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그냥 푹 빠져드는 외고집이다. 그것도 능력 있는 고집쟁이가 아니라 나만의 당위와 욕망으로 가득 찬 고집쟁이였다. 할 수 있는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 이루고 싶은 꿈에 푹 젖었다. 당위가 앞서니 쉽게 상처를 받는다. 이런 나를 두고 아내조차 ‘잘 삐친다’고 힘들어했다. 게다가 한번 상처를 받으면 치유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니 스스로 친 울타리에 점점 더 갇히게 된다.

    어느 순간,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고통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통은 점점 커져 몸을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점차 눈앞이 흐려지고,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무릎이 마비됐다. 할 일도 거의 없었고, 하고 싶은 일도 사라졌다. 가장의 역할은 제쳐두고, 내 한 몸조차 돌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엑스레이도 찍어보고, 피 검사도 했지만 뚜렷한 병명이 없었다. 그때마다 진통제를 먹거나 한방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가장이 집안 기둥으로 버팀목이 되기는커녕, 서서히 썩어가는 기둥이 된다는 자괴감이 들자 정말 견딜 수 없었다.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보고 싶은 책도 없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더는 없었다. 소주 한 병 들고 한강으로 갔다. 술을 마시면 죽을 용기가 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술을 마실수록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그러면서 눈앞에 뭔가가 보였다. 그래, 죽기 전에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 한 번만 하고 죽자.

    고개 들어하늘을 보았다.

    뿌연 서울 하늘이아름다울 줄이야!

    내려다본 한강 물은살아 굽이쳐 흐르는 게 아닌가.

    그냥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남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나만을 위한 삶을 살고 싶었다. 흙으로 돌아가자. 어린 시절, 여름이면 저수지에서 동무들과 자맥질에 더위를 잊고, 소를 몰고 산으로 쏘다니고, 겨울 빈 논에서 공을 차기도 하고, 눈이 오면 행여 토끼라도 한 마리 잡을까 온갖 작전을 짜며 놀던 곳. 나를 아무 조건 없이 키워주고 받아주던 흙에서 한 번이라도 실컷 뒹굴어보고 싶었다.

    집안 어른들과 아내의 반대, 가장의 의무, 대학까지 나온 내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가라는 회의, 정말 내가 흙을 일구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이것들을 일단 접어두자. 마지막 그 하나, 몸으로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했다.

    몸뚱이 하나 믿고 떠나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선택이었지만 그건 또 다른 선택의 시작이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언제 떠날 것인가. 이럴 때 누군가 함께 살아보자고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망망대해, 무수히 널려 있는 우리 땅 곳곳, 산과 들과 강. 땅은 많았지만 오라는 사람은 없었다.

    요즘이야 ‘귀농’이란 말이 흔하고, 관련 단체도 많다. 인터넷 카페도 많고, 지방자치단체에선 상당히 호의적이기까지 하다. 시골 생활에 지침이 될 만한 책이 시리즈로 나오는 세상이다. 그러나 내가 귀농을 고민하던 1995년엔 허허벌판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전국 지도를 펼쳐놓고 하루에도 수십번 마음속으로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1996년 봄, 서울을 떠났다.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뿐. 그동안 추구해왔던 이념도, 몇십년 맺어온 인연도 접어두었다. 처음에는 경남 산청에서 대안학교를 준비하는 어느 공동체로 갔다. 아내가 낯선 시골에서 농사만 지으며 살아간다는 걸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해서다. 내가 먼저 내려갔고 조금 뒤 아내와 아이들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따라왔다. 워낙 많이 망가진 몸과 마음이라 산청 공동체 생활은 쉽지 않았다. 공동체의 꿈보다 자신을 치유하는 게 더 급했다. 낯모르는 이웃들과 함께 살기보다는 다른 길을 선택하고 싶었다. 우리 식구만의 땅을 마련해 농사를 짓고 싶었다.

    땅을 마련하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때는 ‘땅값 싸고 물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가 이곳 전북 무주에서 마음에 드는 논을 찾았다. ‘말뚝 박는 기분’으로 그 땅을 샀다. 마을의 서광철 아저씨는 ‘젊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안쓰러움으로 빈집을 소개해줬다.

    ‘농사지을 땅도 있겠다, 살 집도 있겠다’ 생각하니 살아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외면당하는 시골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내 마지막 선택을 수호(!)하기 위해 첫 해에 논밭 2000평에서 열심히 일했다. 여기서 좌절한다면 아내와 아이들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낮에 관리기로 밭을 갈다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달빛이 아까워 또 일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 아니라 주경야경(晝耕夜耕)이었다.

    모내기철은 더했다. 어둑어둑한 새벽 4시쯤, 모판의 모가 잘 안 보여도 손에 닿는 느낌으로 모를 찌다 보면 날이 밝았다. 그 무렵 소쩍새는 얼마나 구슬피 우는지. 논밭의 물은 차갑다. 그래도 내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 열심히 일한 탓에 저녁 먹고 나서 머리를 대면 그 곳이 잠자리였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고개가 저절로 방바닥으로 기울어진다. 몸이 지구 중력을 잘 따른 셈이다.

    그렇게 일해도 그해 가을걷이 전까지 돈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농사를 시작하며 6개월 만에 만져본 돈이라고는 고작 2만5000원이 전부였다. 그것도 내가 아니라 우리 딸이 번 돈이다. 초등학교 다니던(중학교를 끝으로 학교에 다니지 않는 딸은 지금 열여덟 처녀가 됐다) 딸아이가 토끼를 키웠는데 새끼를 낳았다. 그 새끼를 이웃집 아저씨가 산 것이다. 시골 노인네가 건넨 꼬깃꼬깃한 돈에서 여러 사람의 몸 냄새가 났다. 가을걷이 끝나고 농산물을 정리했지만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몸으로 한 선택은 내게 자신감을 줬다. 돈으로는 맛볼 수 없었던 자신감, 잃어버린 내 분신을 찾은 느낌이었다.

    내 권력이 내 상처를 치유하다

    선택한 것을 기다리거나 선택당한다는 건 마음 졸이는 일이다. 보고서를 올리고 결재를 기다릴 때, 신춘문예에 글을 투고하고 발표를 기다릴 때, 아내 될 사람에게 청혼을 하고 답을 기다릴 때…. 살아오면서 그런 일들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러나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권력과 관련이 있다. 내가 가진 힘으로 원하는 걸 고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유교적이고,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자란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나 역시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권력을 갖고 싶었다. 돈을 갖고 싶었고, 명예를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은 몸뚱이와 시간뿐이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언저리조차 제대로 차지하지 못했던 내가 무언가를 고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그 힘과 권력이 내 지난 상처를 치유해주고 있다.

    농사에는 정말 많은 선택이 있다. 벼농사, 잡곡 농사, 약초 재배, 가축 키우기 등. 어디 그뿐이랴. 언제 씨를 뿌리고 거둘까,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심을까…. 이 모두 내가 선택해야 한다.

    산골 생활 10년, 몸과 마음의 무게가 같아졌네!

    종자를 고를 때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수확한 고추 중에서 튼실한 씨앗 고추를 고르고 있다.

    가장 신나는 선택은 씨앗 고르기다. 볍씨를 고를 때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500평 산골 다락논이지만 벼로 700kg 정도 나온다. 낟알로 헤아리기도 어려운 많은 볍씨 중에 올해 농사로 쓸 볍씨를 선택한다. 어떤 씨를 고를까. 볍씨 처지에선 다 씨앗이 되고 싶을 것이다. 어느 볍씨가 스스로 사람 밥이 되고 싶겠나. 나와 볍씨의 이해관계가 다르지만 나는 농사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게 최선인 게 볍씨한테도 최선일 것이다. 튼실한 볍씨가 튼실한 열매를 맺으리라. 무수한 낟알 가운데 어떤 게 튼실할까.

    벼를 베기 전에 논두렁을 오가며 우선 씨앗으로 쓸 벼를 눈으로 찍어둔다. 햇살 잘 받아 튼실하게 익어가는 벼를 다른 벼보다 일주일쯤 먼저 베어 그늘에 말려둔다. 그러다가도 막상 벼를 베다 보면 눈에 쏙 들어오는 벼가 있다. 햇살도 거름도 물도 충분하지 않았는데 잘 여문 벼에는 단번에 마음이 끌린다. 그러면 먼저 챙겨둔 씨앗은 먹을거리로 자리바꿈하기 일쑤다.

    그렇다고 그 볍씨가 다음해 다 씨앗이 되는 게 아니다. 달걀이 살짝 뜰 정도로 소금물을 만들어 거기에 볍씨를 담근다. 그러면 충실하지 않는 것들은 물에 뜬다. 물에 가라앉은 것들이 못자리로 간다. 아직 한 고비 더 남았다. 조금 넉넉히 씨앗을 마련했기에 모판에 볍씨를 뿌리고 남는 건 씨앗이 되지 못하고, 닭 모이가 된다.

    벼 한 알에도 우주가…

    곡식 처지에서 보면 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다. 어디 볍씨뿐인가. 옥수수, 감자, 고추…. 수십 가지 농사에 쓰이는 씨앗 대부분을 내 손으로 고른다. 농사짓고 나서 처음 한동안은 종묘상에서 고추 씨앗을 사다가 썼다. 그럴 때는 선택의 맛이 다르다. 씨앗마다 가격이 다양하고, 병충해의 적응 정도가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 선택의 기준은 돈벌이다. 고추 씨앗을 선택하기 전, 이 고추로 얼마를 생산해서 얼마를 벌 수 있는지 가늠해야 한다. 그럴 때는 고추가 곡식이 아니라 돈으로 보인다.

    그렇게 몇 해가 흘러 토종 고추를 알게 됐다. 수량은 적게 나오지만 종자를 채종할 수 있는 고추다. 종묘상에서 산 고추 씨앗은 수확한 뒤 씨앗을 받아 다시 수확하면 보잘것이없다. 게다가 굵기와 길이가 제각각이다. 손가락 마디만하거나 작은 밤알 정도 되는 고추도 보았다. 이 고추를 처음 본 순간 참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길쭉한 고추만 보았으니 저것도 고추인가 싶어 섬뜩하기도 했다.

    나는 종자 전문가가 아니니까 어떤 고추끼리 교배해 종자를 얻었는지는 잘 모른다. 돈이 필요했고, 유기농이란 사실만이 뿌듯했다. 팔 때는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고 거뒀다며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일반 고추 값보다 두 배를 더 받고 팔았다.

    하지만 만족도 잠깐이었다. 이듬해 봄, 또 씨앗을 사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내 손으로 가꾸고 거둔 고추가 돈은 될지언정 씨앗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어떤 상실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당장 토종 고추 재배로 전환하자니 자신이 없었다. 이웃에게 토종 씨앗을 구한 다음 두 해쯤 실험을 했다. 수량은 적었지만 맛이 좋았고, 다음해에도 수확량이 일정했다.

    장일순(한살림운동본부 창시자) 선생이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벼 낟알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는 뜻이겠지. 그 깊이까지는 모르겠지만 농사를 하면서 우리가 잊고 있던 그 무엇이 자꾸 되살아난다. 깜깜한 동굴 속에서 희미한 빛을 찾아간다고 할까.

    예를 들면 아이들 교육 문제가 그렇다. 아이 교육이란 바로 ‘자식 농사’다. 우리 부부 씨앗으로 태어난 아이들도 이 다음에 아이를 낳을 것이다. 내 손으로 키운 아이들이 ‘자기 복제’를 잘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무엇이 더 자연스러운 삶인지 고민했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든가, 돈도 자연을 토대로 나왔다는 말이 새삼스레 살갑게 느껴졌다. ‘자연의 맛’은 알아갈수록 근본을 찾게 한다.

    몸이 마음을 선택하게 하라

    글을 쓰면서 중요한 걸 발견했다. 지난 시절, 꿈은 큰데 이룰 힘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몸을 노예처럼 마구 다뤘다. 그러니 망가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몸과 마음 관계가 제법 대등해졌다고나 할까. 일방적으로 몸이 마음에게 끌려가지 않는다.

    한동안 담배를 끊겠다고 몸부림친 적이 있다. 사흘 버티다가 핀 적도 있고, 석 달을 견디다가 다시 피우기도 했다. 인내와 처절히 싸웠지만 다시 피우는 순간 자신이 송두리째 무너지듯 아팠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담배를 안 피우게 됐다. 안 피우는 건 고사하고 담배가 싫었다. 가끔 이웃들과 술 마실 때 “담배 안 피우세요? 언제부터 안 피웠어요?” 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때 특별히 해줄 말이 없었다. 나도 내가 왜 안 피게 됐는지 잘 몰랐으니까.

    이제 기억이 되살아난다. 10년 전, 죽으려고 한강에 갔다가 살겠다고 다시 돌아온 뒤부터다. 이후 한번도 담배 생각이 없었다. 그 사이 어렵고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았나.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자니 마음고생도 많았다. 그래도 담배는 당기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산골 생활 10년, 몸과 마음의 무게가 같아졌네!

    아내(장영란·왼쪽)와 고추씨를 모종밭에 넣고 있다. 아내는 2년 전 ‘신동아’에 ‘귀농인 장영란의 우리 땅, 우리 맛’을 연재했다.

    담배를 끊은 게 아니라 담배가 멀어진 셈이다. 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담배는 술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다는데 술보다 담배가 먼저 멀어진 이유가 뭘까. 몸이 회복되는 과정인 것만은 확실하다. 몸과 마음의 연결고리가 뇌라니, 손상된 뇌의 어떤 부분이 고쳐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담배를 멀리하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것도 마음이요, 끊고 싶은 것도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에도 여러 단층이 있는 것 같다. 피우고 싶은 건 ‘확장된 욕망’이요, 끊고 싶은 건 ‘절제된 욕망’이 아닐까.

    그러나 나와 담배가 멀어진 것은 ‘절제’ 때문이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몸이 마음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몸이 마음을 이끄는 고리는 무얼까. 순간순간 마음이 몸을 선택하듯 몸이 마음을 끄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러한 선택을 나 자신의 치유를 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사용하자. 앞에서 말한 대로 선택하는 즐거움이 권력을 누리는 거라면 이 권력을 더 확장하고 싶다. 우선 이미지가 선명한 말을 하나 만들어야겠다. 몸이 하는 선택이니 ‘몸 권력’. 너무 강렬하다. 마치 원시사회에 사는 느낌이다. 몸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뜻인데, 좀더 부드럽게 ‘자기 권력’이 어떨까. 내 몸이 이끄는 대로 하되 내 자신이 나아지고, 이웃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는 권력. 그런 권력이라면 마음껏 누리자. 눈치보지 않고, 가슴 졸이지 않으며 누리자. 그리고 확장해가자.

    술 한잔 생각날 때

    담배는 멀어졌는데 왜 술은 멀어지지 않을까. 우리보다 몇 해 먼저 산골로 내려온 해강이 아버지는 나와 비슷한 또래이고 농사 선배라 어려울 때면 그 집에 들렀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자니 먼저 술이 당긴다. 그런데 해강이 아버지는 술을 안 마신다.

    “술을 좋아하지 않나요?”

    “예! 안 마셔도 알코올이 몸에서 팍팍 나오는데 왜 마십니까?”

    그때는 이해하기 힘든 선문답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이해가 된다. 그런 경지는 아무나 오르는 건 아닌 것 같다. 살다 보면 한두 번이야 그런 경험을 하지만 술을 안 마셔도 몸에서 알코올이 ‘팍팍’ 나오기가 어디 쉬운가. 남 따라가다가는 가랑이 찢어질 수 있으니 우선 자신을 돌아보는 게 순서다.

    술을 처음 배운 건 대학 시절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메우기 힘들 때마다 술을 마셨다. 대학 시절은 물론 사회생활을 할 때도 그 틈은 벌어져 있었고, 그래서 자주 술을 마셨다. 맑은 정신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날은 일주일에 고작 월요일 하루뿐이었다.

    시골에 와서도 한동안 술을 마셔야 했다. 이웃과 땅 문제로 부딪히면서 마시고, 아내가 못살겠다고 집을 나갔을 때도 마셨다. 나이도 어린 후배가 나를 윗사람 대접하지 않아 화가 나서 마셨다. 큰비 때문에 논두렁이 터져 망연자실해 마셨고, 무너진 논두렁을 힘겹게 다시 쌓으며 마셨다. 겨울철 고즈넉한 달빛 아래서는 외로움 때문에 마셨다. 좋은 일이 생겨도 술을 마셨다. 나락을 처음 거둔 날, 첫 농산물을 트럭에 실어 보내던 날, 우리집 상량식 하던 날, 이웃 집들이, 돌잔치, 마을 어른들 회갑 때도 마셨다.

    그러면서 내 몸에 대한 자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안 좋은 일로 술을 마시면 몸이 훨씬 더 망가졌다. 그러면 몸이 신호를 보낸다. 그 신호를 무시했다가는 어쩌다 한두 잔을 마셔도 토했다. 고통스럽게 토하면서 되살리고 싶지 않는 기억들이 살아나곤 했다. 서울 살 때 망가졌던 내 모습이 다시 떠오르면 진저리를 쳤다.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해가 갈수록 몸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낀다. 자연이 긴장과 강박감(시골생활에서도 돈은 필요하고 시간은 늘 부족하다) 때문에 난 상처를 많이 치유해준 셈이다.

    이제는 억압이나 외로움으로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몸과 마음이 좋지 않을 때는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대신 몸을 움직여 억압을 풀어낸다.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땔감을 줍거나 도끼질을 하며 푼다.

    그러나 반가운 만남에는 아직 술이 좋다. 기분 좋게 마시면 취하지도 않는다. 이럴 때 내 몸이 받아들이는 술은 무얼까. 술도 언젠가는 저절로 멀어질까.



    요즘은 해강이네 식구를 만나면 술 없이도 이야기가 푸짐하다. 술 안 마시고도 가슴속 이야기를 쉽게 한다. 참 신기하다. 곡식이나 나무 또는 바위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만나면 속 이야기부터 먼저 나온다. 올 한 해, 그 내공을 본받고 싶다. 그러기 위해 몸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눠보자고 마음먹는다. 언젠가 내 몸에서도 알코올이 팍팍 나올 날이 있겠지. 그래도 지금은 아내랑 술 한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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