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박근혜 대표 핵심 2인방의 장수비결

전여옥: 박근혜라면 ‘화장실 정치’도 함께
유승민: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정치인생 ‘올인’

  • 글: 이승헌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ddr@donga.com

    입력2005-04-21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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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표 핵심 2인방의 장수비결

    지난 1월11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당직개편을 발표한 뒤 주요 당직자들과 화합을 다졌다. 왼쪽부터 유승민 대표비서실장, 박 대표, 김무성 사무총장, 전여옥 대변인.

    1년 2개월째 한나라당 ‘선장’을 맡고 있는 박근혜 대표를 놓고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말이 많다. 박 대표 본인도 “나는 계파를 만들지 않는다. ‘박근혜 계보’라는 것은 없지 않으냐”고 말한다.

    박 대표를 지지하는 당내 세력도 끊임없이 변해왔다. 취임 초기에는 당을 바꿔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남경필, 원희룡 의원 등 개혁 성향 소장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다 국가보안법 등 4개 쟁점 법안의 처리 방향을 놓고 박 대표 특유의 원칙론이 여야 협상 결과를 압도하면서 소장파와 결별하고, 한때 김기춘, 이방호, 이한구 의원 등 영남 보수파의 말에 귀기울였다.

    올해 들어서는 ‘대안 세력’으로 부상한 강재섭 원내대표, 맹형규 정책위의장 등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당 안팎의 정치적 환경에 따라 지지 그룹도 변해온 것이고, 그만큼 박 대표와 지지세력의 관계는 ‘정치적’이다.

    그런 박 대표에게도 오랫동안 곁에서 보좌해온 당내 최측근 그룹이 있다. 전여옥(田麗玉·46) 대변인과 유승민(劉承旼·47) 대표 비서실장이다. 전 대변인은 박 대표 취임 직후부터 정치적 행보를 같이했고, 유 실장은 지난해 가을부터 급속도로 가까워지면서 각종 정무적·정책적 판단을 보좌하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많이 다르다. 출신부터가 다르다. 전 대변인은 방송기자(KBS) 출신이고, 유 실장은 경제학 박사로 오랫동안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에서 일해왔다.



    정치입문 과정도 다르다. 전 대변인은 프리랜서 방송인 및 기고가로 일하다가 2002년 대선 때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총선 전 당시 최병렬 대표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여 입당한 후 박 대표 진영에 합류했다. 반면 유 실장은 처음부터 철저히 이회창 전 총재의 심복으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뚜렷한 공통점도 있다. 이는 다른 한나라당 의원들에게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특징이자 박 대표가 이들을 곁에 둘 수밖에 없는 ‘매력’이기도 하다.

    “빨리 일어나야죠. 내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 이렇게 누워 있으면 어떡해….”

    지난해 11월경 서울의 한 종합병원 입원실. 계속된 과로로 쓰러져 입원한 전 대변인을 찾은 박근혜 대표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동행했던 수행원들은 박 대표의 표정과 말투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빨리 일어나셔야죠’ ‘피곤하시죠’ 정도로 그쳤을 것”이라는 게 한 배석자의 설명이다.

    박 대표의 전 대변인에 대한 감정의 일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박 대표는 남성 의원과 나눌 수 없는 세심한 결의 대화도 같은 여성 정치인인 전 대변인과 나눈다고 한다.

    “전 대변인이 박 대표의 측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안 것은 우연히 두 사람이 여자 화장실에 함께 가는 것을 본 뒤다. 박 대표는 화장실에서 종종 긴요한 통화를 하는 등 주요한 ‘정치 무대’로 활용하는 것 같다.”

    은근한 ‘질투’가 느껴지는 한 남성 핵심 당직자의 설명이다.

    有色有臭한 전여옥

    이런 전 대변인의 특징을 주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유색유취(有色有臭).’ 한나라당 내에서 전 대변인은 누구보다 호불호가 뚜렷한 인물로 꼽힌다. 그래서 ‘싸움닭’으로 불리고, ‘열린우리당에 유시민이 있으면 한나라당엔 전여옥이 있다’는 말이 나온다. “이거다” 싶으면 좌우고면(左右顧眄)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과 의견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측근들은 종종 “그러지 말라”며 말리지만 전 대변인은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이런 성향은 정치권에 입문하기 전부터 드러났다. 전 대변인은 박 대표 진영에 합류하기 몇 달 전인 2003년 후반기에 박 대표를 정면으로 비판한 바 있다. 그 유명한 ‘유신공주’ 사건이다. “그때는 내 생각이 그랬다. 그런데 총선을 같이 치르면서 박 대표에 대한 감정과 생각이 바뀌었다”는 게 전 대변인의 설명이다.

    거침없는 생각과 발언은 동료 정치인을 대할 때도 자주 발견된다. 지난 3월 행정도시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뒤 박세일 전 정책위의장이 이에 반대하며 보직 및 의원직 사퇴의사를 밝히자 곧장 “자신의 말에 책임지라”고 치고 나섰다가 이재오, 김문수 의원 등으로부터 대변인 사퇴 압력을 받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런 일도 있었다. 지난해 말 열린우리당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A의원과 말싸움이 붙었다. 그 와중에 A의원이 “왜 말을 그렇게 하냐”며 전 대변인을 살짝 밀었다고 한다. 그러자 전 대변인은 “아니, 지금 체육과 나왔다고 몸싸움하자는 거예요” 하고 몰아붙였고 A의원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공식적으로는 문과대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는 A의원이 사실 다른 대학 체육과를 다니다 편입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싸움을 시작하니 화가 치밀어올라 그런 말을 하게 됐다”는 게 전 대변인의 후일담이다.

    가끔은 대변인의 본분(?)을 벗어나 기자들에게도 유감없이 자기 생각을 말한다. 지난 2월 초 정부가 ‘과거사 진상규명 7대 과제’를 발표하자 한 방송사 기자가 전 대변인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 등에 대해 공감을 표하는 발언을 카메라를 보며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전 대변인은 기자실이 떠나가라 고함쳤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이러니 방송개혁을 하자는 말이 나오는 것 아니냐!”

    워낙 기세가 등등해 당시 전 대변인 옆에서 말을 듣고 있던 한 방송사 기자는 “우리 회사에서는 요구한 적 없는데요”하며 머쓱해했다.

    순진이냐, 충성이냐

    전 대변인은 입버릇처럼 “2007년 대선에서 패하면 즉시 의원직을 사퇴하겠다”고 말한다. “한나라당이 야당 생활 청산하고 집권하는 것 보려고 입당했지, 내가 국회의원 몇 번 더 하는 것에는 관심 없다. 사실 지금 그만두고 집필하고 강연 활동에 집중하면 더 윤택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비례대표 의원이 2008년 총선에서 나설 지역구를 물색하고 몇몇은 이미 지역구를 닦고 있지만, 전 대변인은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강원 출신인 전 대변인은 “평소 강원도에 거의 갈 일이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적어도 정치판에서 별로 두려울 게 없다는 것이고, 대변인을 맡는 동안은 애당심 차원에서라도 당 대표를 보좌하는 데 진력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곧 박 대표와의 친소 여부로 친박(親朴)과 반박(反朴)으로 나뉜 한나라당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충성심으로 투영된다. 평소 정치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로 애국심을 꼽는 박 대표의 인식 구조와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하는 대목이다.

    이런 전 대변인은 각종 회의석상에서 박 대표에 대한 지원 사격을 서슴지 않는다. 지난해 8월 전남 구례에서 열린 의원연찬회에서 이재오, 김문수 의원 등이 박 대표의 정수장학회 이사장직 사퇴 등을 거론하며 맹공을 퍼붓자, 전 대변인은 지난해 총선 당시 박 대표가 이들의 지역구를 돌며 지원 유세한 것을 곧장 거론했다. 그러고는 “도와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남자들이 이럴 수 있느냐”며 반격을 가했다. 박 대표는 다음날 전 대변인의 논리를 확대 발전시켜 장장 40여 분간 이 의원을 비판하며 탈당을 요구했다.

    3월에는 당내 소장파 의원들의 모임인 ‘새정치수요모임’에서 박 대표를 겨냥해 조기 전당대회 실시를 요구했다. 그리고 한 회의 석상에서 이규택 최고위원이 조기 전대 요구를 조선 말 갑신정변에 비유하며 비판하자, 소장파인 김희정 의원이 그 유명한 ‘충신, 매국노’ 발언으로 맞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평소 소장파와 반박(反朴) 진영을 이끄는 이재오 의원 등에 대해 분노를 응축해왔던 전 대변인은 “당장 사과하라”며 김 의원을 윽박지르기에 이르렀다. 사실 다른 대변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중립을 지키는 게 보통이다.

    전 대변인은 기자와 수차례 만나 반박 성향의 의원들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자기네들이 도대체 지난해 탄핵 이후 당을 위해 한 게 무엇이 있다고 박 대표를 이렇게 흔들어댈 수 있느냐. 자기네들에게 대안이 있나. 없다면 일단 박근혜로 가야 할 것 아닌가. 지금 내가 대변인이니까 이 정도로 해두지, 언젠가 대변인직을 벗어 내 어깨의 짐이 가벼워진다면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

    순발력, 그러나 가끔은 독이 되는…

    전 대변인이 박 대표 체제에서 중용되는 이유 중 하나로 뛰어난 순발력을 빼놓을 수 없다. 정당 대변인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인 논평 작성 속도는 대한민국 당 대변인 중 가장 빠른 편이고, 1인당 논평 생산량도 마찬가지다. 각종 회의 내용의 브리핑은 물론, 대변인의 주요 임무 중 하나인 정치적 현안에 대한 당의 방향 설정도 비교적 빠른 편이다.

    전 대변인이 박 대표의 의중을 심대하게 왜곡 해석했다는 말도 아직은 들리지 않는다. 지난해 몇 차례 대변인 교체 가능성이 거론되며 방송인 출신 초선 의원들이 유력하게 하마평에 올랐지만 결국 없던 일로 된 것도 이런 점들이 고려됐다는 게 중론이다.

    다만 오랜 대변인 생활 탓인지 가끔 사안을 자신의 기준과 스펙트럼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도 들린다. 이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 ‘일본은 없다’ 등의 작가로 활동할 때부터 전 대변인을 둘러싼 논쟁이기도 하다.

    한 중진 의원은 “전 대변인의 말을 들으면 시원해서 좋다. 그러나 정치 오래 할 생각이라면 자기가 대부분 옳다는 ‘오류’에서 벗어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병원에서 다시 수술하라는데 시간이 없어 가보지도 못하고, 죽겠네….”

    요즘 유승민 비서실장의 얼굴을 보면 좌우 뺨이 움푹 꺼져 있는 게 말이 아니다. 영양실조나 다이어트로 인한 것이 아니라 치아 전체의 90%가량에 임플란트 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원인은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지난해 박 대표를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하면서 상태가 나빠지더니 올해 초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급속도로 악화됐다. 주변에서는 “유승민의 독기가 다시 발동했다”고 한다.

    박 대표의 비서실장이지만 유 실장은 여전히 ‘이회창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회창 전 총재 시절 한나라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장을 지냈고, 그의 정치적 분신으로 불린 시절도 있다. 본인도 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올 초 박 대표로부터 비서실장 제의를 받고 옥인동(이 전 총재의 자택이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있어 정치권에서는 이 전 총재측을 보통 ‘옥인동’이라고 부른다)에 의사를 타진했을 정도다.

    그때 옥인동의 뜻은 “웬만하면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 실장은 강력하게 “해보고 싶다”고 했고, 결국 그의 뜻대로 됐다. 옥인동에서는 여전히 불쾌해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얼마 전 유 실장은 “요즘도 자주 옥인동에 간다. 1주일에 한 번은 가는 것 같다. 그런데 밥은 잘 안 먹는다. 주로 옥인동 주변 해장국집에서 해결한다”고 말해 미묘한 갈등 관계가 있음을 시사했다.

    유 실장은 그 뒤 맹렬한 속도로 박 대표에 ‘올인’했다. 대정부 질문이 열리거나 박 대표에게 다음날 주요한 정치적 행사가 있을 때면 새벽 3, 4시까지 국회(또는 서울 염창동 당사) 대표실과 비서실장실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올해 3월 박 대표 방미 준비 과정에서 생긴 일화다. 대표 취임 후 미국 무대에 데뷔하는 미국 방문길을 앞두고 박 대표는 긴장했다. 북핵 사태 해법에 대해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지난해 국가보안법 논란 과정에서 비친 강경보수 이미지는 어느 정도 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방미 준비를 하자니 손발이 없었다. 때마침 터진 행정도시법 파문으로 박 대표 주변 인사들이 멀어져갔다. 당내 대표적 미국통인 박진 당시 국제위원장도 이 문제로 박 대표와 마찰을 빚었고 방미 준비 과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결국 유 실장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미국 내 지인을 총동원해 미국 인사들과의 면담 일정을 잡았다. 첫 방미 과정에서 주요 면담 일정이 ‘펑크’날 경우 유 실장이 떠안게 될 정치적 부담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장기간 면담하는 예상치 않은 ‘성과’를 거두는 등 방미 일정은 대과(大過) 없이 마무리됐다.

    앞다퉈 박 대표를 비판하거나 멀리하면 곧 당내 개혁세력으로 비쳐지는 요즘, 박 대표가 유 실장에게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 이유이다.

    흔들림 없는 정체성

    유 실장은 평소 스스럼없이 자신을 ‘꼴통’이라고 말한다. 대구 출신인 유 실장은 “시대가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보수”라는 것이다. 그는 주변에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말하곤 한다. 이는 곧 ‘박 대표=한나라당 대선후보=보수세력의 2007년 승리’라는 도식으로 연결된다.

    유 실장은 이런 도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의견에 대해 그냥 넘어가는 법이 거의 없다. 앞서 말한 전여옥 대변인도 마찬가지지만 공세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유 실장이 더 강하다. 이를 보여주는 두 가지 일화.

    3월 방미 기간에 유 실장은 몇 명의 수행기자와 술자리를 가졌다. 유 실장은 이날 방미 일정에 따른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는지 과음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 기자가 그 무렵 박 대표의 행보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한참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유 실장은 술자리가 끝난 뒤 그 기자와 차 뒷자리에 함께 앉아 본격적으로 논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존댓말로 시작한 논쟁이 나중에는 막말이 뒤섞인 말싸움으로 번졌다. “도대체 뭐가 그리 못마땅하냐” “대안이 있다면 말해보라”…. 유 실장은 결국 다른 일행을 먼저 숙소로 보낸 뒤 차에 남아 그 기자와 마저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최근 유 실장은 박 대표를 최측근에서 돕는 보좌진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단합대회를 겸한 자리라서 빠르게 술잔이 돌아갔고 모두 취기가 거나하게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유 실장이 보좌진 A씨를 가리키며 “이리 와보라”고 했다. A씨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곧 유 실장은 “어떻게 대표를 모시는 놈이 박 대표를 박근혜라고 부를 수 있느냐”며 성토했다. A씨는 “잘못 들은 것 아니냐,결코 그런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유 실장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며 결국 분위기를 다잡았다고 한다.

    일방통행의 한계

    유 실장은 자신의 이런 일관된 지향과 정체성을 말로만 떠들지 않는다. 유 실장은 주변에서 “말이 아니라 펜으로 일한다”는 말을 듣는다. 정무적 기능이 우선시되는 비서실장 업무에 학자 출신으로서 정책 입안 능력을 적절히 접목하고 있다는 평이다. “박 대표가 웬만한 정책, 정무 관련 판단에 대해서는 1차적으로 유 실장의 말을 듣는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이회창 망치더니 박근혜도 망치려 하나….”

    유 실장이 당 안팎에서 가장 많이 듣는 비판 중 하나다. 물론 유 실장은 억울해하지만, 이 전 총재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면서 2002년 대선에 패배한 데 대해 책임을 져도 시원치 않을 그가 다시 박 대표를 최측근에서 보좌해서야 한나라당이 2007년 대선에서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 실장측은 “그때는 유 실장이 모든 것을 보좌했지만 지금은 비서실장에 불과하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유 실장 본인은 이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일방통행식 밀어붙이기는 이 전 총재의 경우처럼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본인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해 국가보안법 등 4개 법안을 놓고 박 대표의 보수 지향성에 일조했지만 올해 초 비서실장을 맡자마자 ‘무정쟁의 해’라는 아이디어를 주도하고, 대북 유화적인 이미지를 내놓은 것도 그렇다.

    그러나 일부 소장파 및 중도파 의원들은 여전히 “과연 유승민이 2007년에 걸맞은 시대정신을 갖고 고민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시각을 거두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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