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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분석

북핵 벼랑 끝 전술은 ‘3대 세습’ 준비작업?

“평양은 권력승계 고비마다 한반도 긴장 고조시켰다”

  • 정리: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북핵 벼랑 끝 전술은 ‘3대 세습’ 준비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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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부자간 권력승계는 네 단계로 진행됐다. 첫 단계는 김정일이 32세의 나이로 정치국 격이던 당 정치위원회 제5기 중앙위원회 8차회의에서 위원으로 선출된 1974년에 마무리됐다. 이때 김일성의 나이는 62세였다. 두 번째 단계는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당 정치국 서열 4위, 당 비서국 서열 2위, 당 군사위원회 서열 3위로 호명된 1980년대에 마무리됐다. 사실상 후계자로서 지위를 공식화한 시기다.

세 번째 단계는 그가 김일성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면서 마무리됐다. 1991년 이미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에 오른 김정일의 국방위원장 추대는 군에 대한 장악이 마무리됐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60년대 말부터 진행된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는 1998년 북한이 헌법개정을 통해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국방위원장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제도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1997년에 이미 당 총비서에 취임한 김정일로서는 헌법개정을 통해 김일성이 갖고 있던 마지막 한 자리에 오를 필요가 없게 됐으며, 외교 의전상의 국가원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수행토록 했다.

1960년대 후반 권력승계의 초기작업 시기는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북사건과 청와대에 대한 게릴라식 습격 등 북한의 도발행위가 극에 달한 기간이다. 이러한 행위는 김일성의 묵인 아래 이뤄졌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1969년 1월14일 당 4기 4차 인민군위원회에서 발표된 김일성의 연설문에 따르면, 1969년 김일성은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이던 김창봉과 대남공작의 총책임자 허봉학 등을 군내(軍內) 간부정책에 대한 실수를 명목으로 숙청했다. 이들의 군사모험주의로 미국과의 대결양상이라는 위기국면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1967년과 1969년 사이에 김일성은 수차례 숙청을 단행했다. 1967년 5월4일부터 8일까지 계속된 당 4기 중앙위원회 15차회의에서는 정치국 상임위원회 위원이자 당비서이던 박금철과 부수상 고혁, 당비서 김도만과 당 과학교육비서 허석손이 숙청대상이 됐다. 반혁명적 사상을 전파했다는 것이 이유였으나, 전문가들은 그들이 부자간 권력승계에 필수적 요소인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해 도전했기 때문이 아닌가 관측한다.

권력승계과정에서 위기국면은 1993년에도 발생했다.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에 추대된 것이 4월이고,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것이 3월이다. ‘내외통신’ 종합판 47호에 따르면 북한의 NPT 탈퇴선언 직후 강원도 도당책이자 인민위원장이던 임형구는 군중대회연설에서 김정일이 “매우 엄중한 정세의 요구를 깊이 통찰하고 주체조선의 최고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할 데 대한 정부성명을 발표하도록 하는 현명한 조치를 취해주었다”고 발언했다. NPT 탈퇴가 김정일의 주도로 이뤄졌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국방위원장 추대 한 달 전에 의도적으로 위기국면을 초래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1970년대 초반 권력이 김정일로 승계되고 있다는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2005년의 북한도 비공개리에 제2의 권력승계 과정을 진행 중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1942년생인 김정일의 현재 나이는 63세다. 아버지의 후계자 자리를 20년 이상 지켜오면서 숙부(김영주) 및 계모(김성애)와의 권력투쟁을 겪어봤기에 후계과정은 자신의 권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진행돼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권력 엘리트의 재편 움직임

김성애는 북한의 핵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94년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그를 위해 베푼 선상연회에 이례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963년 김일성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첫 번째 권력승계 과정에서 현재 스웨덴대사로 나가 있는 자신의 아들 김평일을 후계자로 지원했다고 전한다. 마오쩌둥의 처 장칭(江靑)과 비교되기도 하는 그는 한때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기록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김일성의 사랑을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으로 귀순자들은 전한다.

반면 2000년 북한의 장성으로는 최초로 백악관을 방문한 조명록은 김정일과 김성애의 권력투쟁에서 김정일을 도와 그의 후계자 지위를 지켜준 인물이다. 황장엽 전 노동당 국제담당비서는 김일성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선택하기 전까지 김영주가 김정일과 심각한 권력투쟁을 벌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김정일이 당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던 바로 그 회의에서 김영주는 공개비판을 받고 좌천당하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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