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영화 ‘달콤한 인생’ 만든 김지운 감독

“난 ‘피맛’을 안 보면 영화 찍은 것 같지가 않아요”

  • 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사진: 홍중식 기자

    입력2005-05-24 18: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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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달콤한 인생’ 만든 김지운 감독
    김지운(金知雲·41) 감독의 영화는 붉다. 선홍빛 피가 화면을 가득 메운다.

    이번 영화 ‘달콤한 인생’은 ‘피범벅 누아르’라 칭한 감독의 말처럼 시종일관 욕조에서, 빙판에서 피가 번진다. ‘장화 홍련’에서는 여주인공의 몸에서 쏟아져나온 피로 복도 전체를 물들이더니 블랙 코미디를 표방한 ‘반칙왕’에서도 아니나 다를까, 포크 끝으로 찍힌 정수리에서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데뷔작까지 가보자. ‘조용한 가족’에서 산장의 첫 손님은 부엌칼로 배를 난자당해 죽는다. 침대 시트와 방바닥까지 흘러내린 검붉은 피는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해 정말 비린내를 풍기는 것 같다.

    그런데 김지운 감독의 ‘피’는 아름답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화면 전체로 분사되는 피를 계속 접하지만 느낌은 전혀 다르다. 박 감독의 피가 잔혹함을 느끼게 한다면 김 감독의 피는 강렬하고 화려하다.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색감이다. ‘달콤한 인생’을 보면서도 머리통이 총탄에 바스러지고, 회 뜨듯 칼로 배를 휘젓는 잔인한 영상에 내내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새삼 ‘피의 미학(美學)’을 떠올렸다.

    김지운 감독과의 인터뷰는 ‘달콤한 인생’ 개봉 시기에 맞춰 ‘신동아’ 5월호용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달콤한 인생’ 일본 프로모션 일정과 겹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이 영화가 칸 영화제 공식 섹션 중 비경쟁 부문에 초청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만 해도 유일하게 공식 섹션에 진출한 한국 영화였다(이후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이 공식 섹션 중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그래서 “칸에도 갔으니 인터뷰하자”고 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제로는 ‘피맛’을 아는 이 감독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였다.



    영화 ‘달콤한 인생’ 만든 김지운 감독
    4월25일 오후 4시, 서울 압구정동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김 감독을 만났다. 날씨가 꽤 더웠지만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털모자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났다.

    -실내에서도 모자와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이유가 있나요?

    “처음에야 이유가 있었죠. 낯가림이 심한 편이거든요. 이러고 있으면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고, 굳이 말을 안 해도 되며, 인사하기 싫은 사람한테 인사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하지만 이젠 습관이 됐어요. 제가 모자와 선글라스를 안 쓰면 주변 사람들이 더 불편해하고 심지어 못 알아보기도 하죠.”

    영화주간지 ‘씨네 21’의 편집장을 지낸 조선희씨는 저서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에서 “그는 늘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뭔가 우수에 찬 듯, 또는 심각한 듯 다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코미디 반죽’인 자신을 은폐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인터뷰에 임하면서도 어느 순간 선글라스를 벗었고, 웃음이 피식피식 나오게 하는 특유의 ‘김지운식’ 유머를 자주 선보였다.

    지독한 자기애가 부른 파멸

    -칸에 처음으로 초청받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영화제 가려고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니까 그저 보너스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에요. 국제적으로도 좋은 영화로 인정을 받았다는 정도의 충족감이랄까. 사실 가면 귀찮은 일이 너무 많아요. 턱시도도 입어야죠, 한국에서도 제작 발표회 같은 부대행사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런 데 참가해야죠. 칸에 간다니까 지인들이 ‘네가 턱시도를 입어?’라고 했을 정도예요.”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것이 아쉽진 않나요.

    “경쟁 부문에 초청돼야만 세계 영화사 조류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건 한국뿐인 것 같아요. 공식 섹션이든 부대행사든 우리 영화가 많이 초청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합니다. 순위나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또 심사위원장의 성향에 따라 섹션별 출품작이 많이 달라져요. 지난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도 처음에는 비경쟁으로 갔다가 심사위원장인 쿠엔틴 타란티노에 의해서 경쟁으로 옮겨진 거고요. 경쟁에 갔고 또 수상했다고 해서 경사인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아쉬워하거나 위축될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그것보다 ‘달콤한 인생’에 생각보다 많은 관객이 들지 않은 게 아쉽죠.”

    지난 4월1일 개봉한 영화 ‘달콤한 인생’은 폭력조직 보스(김영철 분)의 젊은 정부(신민아 분)에게 한순간 ‘흔들린’ 실수로 나락에 떨어진 남자(이병헌 분)의 이야기다. 음모, 어두운 열정, 비정함, 파멸 등을 ‘피범벅 액션’으로 참담하게 그려낸 전형적 누아르로 끔찍하지만 아름답고, 진지하지만 장난스럽고, 사소하지만 중요하며, 긴장의 극단에서 유머가 튀어나오는 ‘김지운식’ 부조리가 돋보인다. 또 극적인 명암 대비와 소품이나 배경, 인테리어가 주는 색감, 그리고 강렬한 선홍빛 피가 만들어낸 세련된 영상미도 강점이다. 하지만 평단의 호평에도 영화는 기대 이상의 흥행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전국 관객 100만명을 조금 넘기며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선에서 종영됐다.

    -관객이 기대보다 많지 않았던 이유는?

    “처음엔 의외였어요. 그동안 영화를 만들면서 단 한 번도 흥행에 대해 걱정한 적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정도도 상당한 성과라고 봐요. 비수기였고, 흥행에 치명적이라는 ‘18세 이상’ 판정이 나왔어요. 또 ‘누아르’라는 생소한 장르였고, ‘주먹이 운다’는 센 작품과 동시에 개봉했고요. 그냥 이 영화를 두세 번씩 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죠. 사실 ‘달콤한 인생’은 되게 섹시하고 매력적인 영화거든요(웃음). 계속 잔상이 떠오르는 중독성이 있는 영화, 일부 관객에게 그렇게 각인됐다는 것만으로 영화를 만든 보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 자체의 흡인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피범벅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보스의 애인 ‘희수’가 너무 평범하다는 거예요. 주인공 ‘선우’에게 가장 ‘달콤한 인생’을 선사한 후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여자인데, 실감이 안 난다는 거죠.

    “희수가 팜 파탈(요부)이 아니네, 모든 이를 죽일 만한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네, 말들이 많지만 그건 제 영화를 완벽하게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에요. 선우는 희수한테 매혹당한 게 아니라 매혹의 순간 자체에 매혹당한 거니까요.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한 남자의 파멸을 그린 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나르시즘적인 요소들이 곳곳에 있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섀도복싱을 하는 게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죠.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때 가장 달콤했던 순간, 가장 아름다웠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김 감독이 생각하는 사랑의 본질도 나르시즘입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죽어 있던 내 시간을, 멈춰 있던 내 오감을 깨운 것에 대한 감사라고 봐요. 그 사람에 대한 대상화가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해준, 그래서 즐겁게 살아가도록 해준 자신에 대한 감동이자 감사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야기꾼’ 포기한 적 없어

    ‘달콤한 인생’은 이병헌의 뛰어난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파멸로 치닫는 한 남자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잘 표현했다.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하게 한 영화를 찍어서 이병헌은 원이 없겠다”고 말했을 정도. 보스 역의 김영철 등 조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김영철씨를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중년 남성의 심리를 멋지게 표현했다고요.

    “중후하고 냉철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안절부절못하는 멋진 아저씨를 연기할 만한 배우가 국내에서는 참 없더라고요. 워낙 영화나 방송이 젊은이들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중년 배우들은 시트콤에서 코믹한 연기만 선보이고 있죠. 다행히 김영철씨는 그 나이대 남자의 멋을 유지하고 있고 영화에서도 보스 특유의 카리스마와 비정함, 더불어 조잔함과 질투를 잘 표현해줬어요. 리처드 기어나 숀 코너리같이, 우리 영화계에도 중년 연기자들이 자신의 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장’이 마련돼야 해요.”

    -‘달콤한 인생’도 그렇고, 김 감독의 영화는 무척 공들여 찍은 흔적이 보입니다. 영상이 매우 세련되고 색감이 참 뛰어난데요. 특히 선홍빛 피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피맛을 봐야 영화를 찍은 것 같아요(웃음). ‘장화 홍련’ 때는 정말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공포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그러다 보니 계속 뭔가 차지 않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피로 복도 한 바퀴를 돌렸죠. 색채가 주는 강렬한 느낌…. 저 역시 피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 감정이 고조되고 흥분되거든요. 지금보다 영화를 더 잘 만들게 되면 피가 없이도 피를 본 듯한 강렬한 느낌을 줄 수 있겠죠.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아요.”

    영화 ‘달콤한 인생’ 만든 김지운 감독

    김지운 감독은 데뷔 이래 다양한 변신을 시도해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야기를 포기한 적이 없다고. <br>좌측부터 ‘장화 홍련’ ‘쓰리’ ‘반칙왕’ ‘조용한 가족’ ‘달콤한 인생’.

    -강렬하고 아름다운 영상에 집착하면서 내러티브가 약해진 것은 아닙니까.

    “이상하게도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 때는 저를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하더니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 때는 이야기를 포기한 채 ‘때깔’에만 집착하는 감독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영화에서 한 번도 이야기를 포기한 적이 없어요. 이미지로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를 실험해본 것일 뿐이죠. ‘달콤한 인생’은 내러티브가 탄탄한 영화입니다. 또 ‘조용한 가족’이나 ‘반칙왕’ 때처럼 아주 의외의 상황, 가장 긴박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유머가 튀어나오게 했죠.”

    ‘달콤한 인생’은 4월23일 일본에서 개봉해 무척 ‘잘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한류의 본체라고 하는 이병헌 덕분이다. 김 감독은 4월 중순 프로모션차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에 가서 한류를 직접 체험하고 왔는데, 어떻던가요?

    “한마디로 말해서 환상적인 경험이었죠. 물론 한류의 본체 옆에 ‘곁다리’로 낀 거지만. ‘달콤한 인생’ 기자 시사회를 시내에 있는 백화점 옥상에서 했는데, 전날부터 일본 아주머니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더라고요. 백화점 입구마다 사람들이 가득해 007 작전하듯 옥상까지 올라갔죠. 기자회견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이병헌씨가 없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저한테 확 몰리는 거예요. 경호원이 뛰라고 하기에 열심히 뛰었어요. 그런데 한 아주머니가 함께 뛰면서 제 손에 선물과 편지를 덥석 쥐어주더군요. 봉투엔 ‘김지운 감독님께’라고 한글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어요. 이병헌씨가 아니라 제게 주려고 준비했다는 거잖아요. 정말 감동했어요. 나도 ‘지사마’가 되려나. 그런데 뜯어서 읽어보니 ‘이병헌씨한테 잘해주세요’라는 내용이었어요(웃음).”

    그가 영화 주간지 ‘씨네 21’에 기고한 영화 제작기가 생각났다. 한때 영화 팬 사이에서는 김 감독의 영화만큼이나 제작기가 인기를 끌었다. 제작기를 보면 그를 왜 천부적 이야기꾼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오기민 PD가 ‘장화 홍련’을 고딕 호러 스타일로 만들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듣는 순간 필이 딱 꽂혔다. 주체할 수 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흥분된 어조로 열변했다. 오 PD는 감탄스런 얼굴로 입을 연다. ‘그건 콩쥐 팥쥐인데….’ 악몽을 꾼다. 꿈에 네 명의 소녀가 하얀 소복을 입고 누가 콩쥐 팥쥐인지, 장화 홍련인지 맞혀보라며 나를 쫓아온다.”

    ‘김지운식’ 블랙 유머

    -‘조용한 가족’ 때부터 ‘김지운식’ 블랙 유머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어느 새 이게 김 감독의 영화를 규정하는 하나의 요소가 됐는데요.

    “저는 영화에서 한 번도 웃음을 강요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웃음이 삐질삐질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잖아요. 이런 것을 웃음의 소재로 써요. 예를 들면 중년 남성이 상사를 대접한다며 큰 원탁 같은 데 모시는 겁니다. 하지만 원탁이 너무 커서 음식을 먹으려면 팔을 무한정 뻗어야 하죠. 점잖은 자리에서 중년 남성들이 음식을 먹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상황, 거기서 오는 소통의 어긋남 그리고 부조리함. 따지고 보면 일상사는 다 부조리해요. 또 웃기고 슬프죠. 무언가에 대해 발동한 측은지심이 풍자가 되고, 그 안에서 해학과 웃음이 나옵니다. 세상을 ‘껄렁하게’ 보면 그런 식의 유머가 생기는 것 같아요.”

    김지운 감독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키드’였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에 대여섯 살 무렵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순신보다 말론 브랜도를 먼저 안 아이였다. 주말만 되면 아버지와 밤을 새워 영화를 봤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귀여운 아역배우 셜리 템플이 지금 유엔 대사이고, 리처드 버튼과 리즈 테일러가 최근에 다시 재결합했다는 등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줬다. 그런 정보가 쌓이니 더욱 영화에 빠져들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혼자서 영화관을 드나들었다. 액션영화, 성인영화 가리지 않고 봤다. 영화로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조숙한 아이에게 학교는 너무도 싱겁고 지루한 곳이었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학교를 ‘땡땡이’치고 극장에 다닌 듯하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언더그라운드’적으로 보냈다. 김 감독은 당시 자신을 “한마디로 양아치였다”고 회상했다.

    1983년 서울예대 연극과에 들어갔을 땐 배우가 되고 싶었다. 실제로 무대에 여러 번 섰다. 그러던 어느 날 무대 위에서 문제가 생겨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어둠 속 객석에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뿔테 안경을 쓴 연출가 선배 한 명이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그러고는 너무나도 단순 명쾌하게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책을 말해줬다. ‘아, 정말 멋있구나. 이게 바로 연출가구나’ 느꼈다.

    영화 ‘달콤한 인생’ 만든 김지운 감독
    그후 연출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멋지게’ 살아보고 싶었다. 다음 학기부터 그는 연극 연출로 전공을 바꿨다. 하지만 곧바로 입대했고 온갖 문제를 일으키다가 제대하고 보니 대학에서는 이미 제적돼 있었다. 학교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그때부터 10년 가까이 백수였어요. 정말 아무 일도 안했어요. 하루 종일 책이나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었어요. ‘교보문고에서 몇 시까지 책을 본다’는 식의 1일 계획표를 짜서 하루하루 보냈죠. 아마 제 인생에 가장 ‘달콤한 시절’이라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싶어요. 친구를 만나 커피 한 잔 마실 때의 행복도, 책 한 권, 노래 한 곡 접할 때의 희열도 너무 컸고요. 지금은 글쎄요. 그때만큼 재미가 없으니까 계속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본인은 편했다지만 가족의 불안과 걱정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직장생활을 하던 어머니는 그에게 9급 공무원 시험을 보라고 독촉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반 폐인 상태로 문을 열어주는 서른 살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암담했기 때문. 그 역시 ‘백수 7년차’쯤 이르자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다.

    “어렴풋이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모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어요. 평소 그렇게 좋아하던 프랑스 영화를 실컷 보고 오면 무언가 길이 보일 것 같았거든요. 당시 파리에 두 달간 머물며 100여 편의 영화를 봤어요. 운 좋게도 그때 파리에서 세계 영화사의 걸작을 정리해 틀어주는 행사를 했거든요. 저도 영화 좀 봤다면 본 사람인데,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어요. 세상에 훌륭한 영화와 감독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죠. 유럽에서 보낸 5개월이 제게 영화감독의 꿈을 다시 심어줬지만, 귀국 후 3년간 백수 생활을 더 해야 했죠.”

    ‘10년차 백수’의 저력

    1996년, 2년간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거의 동시에 가만히 서 있는 차를 박았다. 수리비가 400만원이나 나왔지만 ‘10년차 백수’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목돈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처음 쓴 시나리오가 영화지 ‘프리미어’ 공모에 당선됐다. ‘그래도 10년간 헛 산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 분식집에 라면을 먹으러 갔어요. 그런데 주인 아줌마가 잡지로 그릇을 받치고 오더라고요. ‘씨네 21’이었어요. 라면을 먹으면서 잡지를 봤는데, 시나리오 공모 공지가 있었어요. 마감이 일주일 남았더군요. 그대로 집에 들어가 시나리오를 썼죠. 5일 만에 완성한 이 시나리오도 다행히 당선됐어요. 그 작품이 바로 제 데뷔작 ‘조용한 가족’입니다. 1년여 준비한 끝에 1998년 개봉했고 다행히 좋은 평가를 받았죠.”

    김지운 감독은 ‘로젤’ ‘버자이너 모놀로그’ 등으로 유명한 연극배우 김지숙의 동생이다. 한때 ‘김지숙과 그의 동생’으로 부르던 관계는 김 감독의 연이은 흥행 성공으로 이젠 ‘김지운과 그의 누나’로 역전됐다.

    -누나인 김지숙씨와 참 많이 닮은 것 같아요. 누나가 ‘업계’ 선배로서 많은 도움을 줬을 것 같은데요.

    “한번은 누나가 작업하는 걸 도와준 적이 있어요. 그런데 누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거든요. 연기는 목숨 걸고 하고, 조명이나 무대장치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기죠. 그 모습을 보고 많이 배웠어요. 또 영화나 연극, 연기에 대한 ‘잡념’이 생길 때 꼭 누나와 이야기를 나눴고요. 쓰가 호에이의 ‘뜨거운 바다’로 연극무대에 연출가로 데뷔할 때도 누나의 도움을 받았죠. 하지만 현실적인 도움보다 정신적인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혹자는 누나를 제 작품에 출연시키지 않겠냐고 묻더군요. 물론 제 영화에 필요한 캐릭터가 누나와 꼭 맞는다면 같이 해야죠. 누구보다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훌륭한 배우니까.”

    어느덧 약속한 두 시간이 지나갔다. 그래서 한 번 더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더니 흔쾌히 좋다고 했다. 약속시간을 정하면서 김 감독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 이랬다.

    “시간을 쪼개 보면 오늘 4시 한남동 쪽 괜찮고, 내일 6시 종로 쪽 괜찮아요.”

    그래서 4월30일 오후 6시 종로에서 다시 만났다.

    -문자 메시지가 재미있더군요. 백수 시절 1일 시간표를 짜서 생활했다는 얘기가 생각났어요.

    “게으른 편이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오늘도 나오면서 시간표를 짰어요. 오후 3시부터 6시 영화 관람, 6시부터 7시 인터뷰, 7시 이후 영화 관람(웃음). 방금 전에는 예술영화 전용극장으로 바뀐 허리우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왔어요.”

    -쉴 때는 주로 영화를 보나요?

    “극장에 가기도 하고 DVD를 보기도 해요. DVD를 대략 500편 모았어요. 며칠 전에도 10편을 새로 신청했고요. 영화 보는 것 외에는 별다르게 하는 일이 없어요. 만나는 사람들도 다 영화인이다 보니 영화 이야기만 하죠.”

    -영화계에서 일종의 ‘사단’을 이룰 정도로 친하게 지내는 감독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박찬욱, 봉준호, 장준환, 류승완, 임필성 감독과 정기적으로 DVD를 보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름이 ‘자랑과 험담’이에요. 만나면 자기 자랑하거나 남을 험담한다고 해서(웃음). 모두 장르 영화를 좋아하고 이른바 영화광들이기 때문에 공통점이 많아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예전엔 자주 만났는데, 지금은 서로 터무니없이 바빠져서 시사회 때나 전부 보는 정도입니다.”

    -듣고 보니 ‘자랑과 험담’ 멤버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시나리오를 직접 쓴다는 것도 있네요. 시나리오 구상은 어떻게 하나요?

    “살면서 느꼈던 의문, 인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요. ‘조용한 가족’도 우연히 신문에서 본 ‘휴지통’ 같은 작은 기사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불륜 남녀가 있는데 한 친구에게 그 사실을 고백을 한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가 오히려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돈을 뜯어내려고 했죠. 그래서 남녀가 이 사람을 살인해서 유기했는데, 또 그 광경을 지인이 본 거예요. 이 사람도 협박해서 돈을 뜯으려 하니까 또 죽여 유기했죠. 어쩔 수 없이 연쇄살인을 벌인 후 유기해야 하는 상황, 또 사랑하는 남녀가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연쇄살인을 해야 하는 부조리함이 참 흥미로웠어요. ‘달콤한 인생’도 고속도로 화장실에서 ‘용무’ 보다가 읽은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나무도 아닌 네 마음이다’라는 한 스님의 말씀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이런 것들을 이야기 안으로 끌고 들어와 시나리오로 만들어내는 거죠.”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부터 구체적인 배우를 염두에 두는 편인가요? 배우를 캐스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뭡니까.

    “연기력은 기본이고, 그 다음은 느낌인 것 같아요. 직관 또는 직감이 작용하죠. ‘장화 홍련’의 염정아씨는 사석에서 만났을 때 무척 털털하고 성격 좋고 재미있어요. 그런데 막 깔깔대고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무슨 냄새 안 나요?’ ‘무슨 소리 안 들려요?’ 하더라고요. 이런 민감한 듯한 느낌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것은 그대로 사이코틱한 새엄마 캐릭터로 나타났죠. 이런 느낌을 매우 중요시해요. 그래서 현장에서 배우들의 캐릭터를 맞바꾼 적도 꽤 있어요.”

    감독의 독창성 인정해야

    -데뷔 이래 계속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혹시 다음 영화로 정통 멜로물을 찍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멜로영화를 참 싫어했는데, 최근에 너무 괜찮은 멜로 영화 두 편을 본 후 마음이 흔들리고 있어요. 그중 하나인 ‘클로저’는 사랑에 푹 빠졌을 때의 집착, 강렬한 감정이 액션과 가깝다는 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쿨하면서도 매우 강렬한 슬픔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줬어요. 그 정도의 이야깃거리라면 멜로영화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 차기작이 구체적으로 정해지지는 않았어요.”

    -감독으로서 우리 영화계를 바라볼 때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사실주의 영화에 대한 프리미엄이 너무 많아요. 장르 영화를 경시하는 풍조도 있고요. 같은 완성도라도 사실주의 영화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하고, 사실주의적 관점으로 장르 영화를 재단하려고 하죠. 한 나라의 영화가 발전하려면 다양하고 훌륭한 장르 영화가 많이 나와야 해요. 또 감독의 독창성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비교하려는 편협한 시각도 있어요. 특정 감독을 놓고 ‘김지운은 이 사람 따라가려면 멀었다’는 식이죠. 제 영화적 목표가 어떤 감독을 따라가는 게 아니잖아요. 서로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건데, 영화 자체에 대한 완성도를 이야기하지 않고 남의 영화와 비교해 보려고 하죠. 비빔밥을 만들었는데, 쇠고깃국 맛이 안 난다고 투덜대는 것과 같아요.”

    김지운 감독은 독신이다. 20년 가까이 혼자 살다 보니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것 같다지만 이젠 좋은 사람을 만나면 결혼하고 싶다고 한다. 아직 미혼이기 때문일까. 실제로 만난 김지운 감독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특히 피부가 무척 맑았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이 인터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김지운식 유머의 핵심이기도 한 ‘부조리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피부 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아주 ‘조리한’ 답변이 나왔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고 제 또래들은 눈쌀을 찌푸리지만 저는 오히려 무척 멋있다고 생각해요. 전 새로움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대뇌가 젊게 돌아가고 스트레스 안 받고 신진대사가 잘 이뤄지니 피부가 맑아지고 노화도 오지 않는 게 아닐까요? 인체 기관 중 가장 보수적인 것이 눈이라고 해요. 눈이 늙기 시작하면 몸도 늙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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